27.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
- 생활정보
- 2007. 7. 16. 16:11
박학한 학자였던 라이프니츠는 1646년부터 1716년까지 살았다. 라이프치히 출신으로 철학, 수학, 물리학, 법학, 그리고 역사를 공부했다. 한때 외교관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하노버에 황실도서관을 운영하기도 했다. 거기서 그는 <<교황파의 역사>>를 썼다.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학술아카데미의 설립을 추동했으며, 첫 번째 의장이 되었다(1700). 말기에는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의 사상은 처음에는 스콜라 철학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그는 자연에 대한 기계론적 고찰방식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현실의 본질은 정신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궁극적 목적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학문의 영역들을 두루 개관하는 것보다 통합적 사유가 중요했다. 그는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 형이상학적 실체들을 믿었다. 이 실체들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만, 이 공간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수학에 있어서는 미분계산이 중요해졌다.
형이상학자로서의 라이프니츠에게 현실의 본질은 정신적인 질이었다. 따라서 비가시적인 힘의 영역이 존재해야 했는데, 물질은 데카르트가 가르친 것처럼 연장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물체는 점의 형태를 가진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요소들은 0차원적 힘의 중심(모나드)으로 나타난다. 이것들은 실체의 단위를 이루지만, 연장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과 생물은 이 모나드들로 구성된다. 이것들은 활동적이고 살아있으며 정신적인 특성을 갖는다.
모나드는 작용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변하지만, 그것의 형식은 언제나 동일하다. 이 형식은 사물의 전개와 변화에 법칙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하는 정신은 그 자체로 하나의 통일체요, 형이상학적 실체이며, 따라서 하나의 모나드이다. 내가 나를 하나의 통일체로 인식하기 때문에 나는 현실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의 통일을 이해하고 창조하는 것은 인식하는 정신이다. 경험의 대상들은 인식하는 주체에 의존되어 잇다.
그러나 후에 라이프니츠는 통일체들은 우리의 사유에 전적으로 독립적으로 개개의 유기체 속에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모든 모나드와 사물, 생물들을 결합시키는 끈이 존재한다. 우리는 영혼의 모나드와 물체의 모나드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영혼 뿐 아니라 물체도 모나드로 구성되어 있다. 창조주는 그것들을 배열했고, "이미 확립된 조화" 속에서 창조했다.
모든 실체적이고 정신적인 모나드는 우주를 반영한다. 영혼의 모나드를 통해 우리 인간은 의식적인 체험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 많은 사건들을 체험한다. 우리가 외부세계의 사물을 지각하면, 우리 영혼의 모나드들의 상태가 변화한다. 모나드들의 정신적 힘의 중심들은 항상 위계적인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낮은 단계로서 무의식적 모나드가 사물과 대상 안에 있다. 그보다 높은 곳에 우리 인간에게 감정과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영혼의 모나드가 있다. 이것들보다 상위에 우리가 비판적 사유와 자기반성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무의식적 모나드가 존재한다. 모든 모나드들 위에 순수한 의식인 "근원모나드"가 존재한다. 우리 영혼 안에는 우리가 현실화시킬 수 있는 본유관념들이 이미 존재한다. 가장 강력한 본유관념은 신에 대한 관념으로서, 이는 모든 민족과 인류가 다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본유관념들을 현실화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감각경험을 필요로 한다. 감각들 속에 먼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정신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 전체는 상호작용을 통해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 인간에게는 실재 세계에 대한 논리 뿐 아니라 가능세계에 대한 논리도 있다. 이 두 번째 논리는 창조주에 의해 생각되어진 것이지만,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창조주는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최고의 세계를 창조했다.
우리 인간은 또 4차원 혹은 5차원의 공간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공간들 역시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물리학의 법칙이 가능하다. 실재 세계에 대해 수많은 가능세계들이 맞서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가 모든 가능세계들 가운데 최고의 세계라면, 어째서 우리 인간에게는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는가? 지진, 질병, 전염병, 전쟁, 때이른 죽음들은 왜?
참으로 신은 전지전능한가? 라이프니츠는 여기서 스콜라적 신학을 생각했다. 그는 세 가지 종류의 악을 구별하는데, 이 모두가 우리의 삶을 위해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형이상학적 악은 우리에게 우리의 한계를 보여준다. 육체적인 악은 우리의 삶에 속한다. 그것은 우리의 도덕적 교화를 위한 신의 교육수단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해악은 선에 반하는 악의 권력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은 자유롭게 결정하는 존재이므로 죄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악과 고통을 결정할 수 있다 .우리의 결정은 신의 의지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고통이 없는 세계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근본적으로 실체 형식에 대한 중세의 철학을 따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사상가는 수학과 논리학에서 많은 자극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근대 최후의 폭넓은 교양적 지식인으로 간주된다. 그의 사유는 형이상학과 합리주의의 근본가정들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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