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시작으로서의18세기-라인하르트 코젤렉

모든 시대구분은 그 자체 당혹스러운 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불일치를 감수해야 하는데, 이는 각각의 구획들이 모든 역사적 정황과 일치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 때문에 질문이 달라짐에 따라 더욱 배가되는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 우선 시대 단위를 특징짓기 위한 연대기적 서술의 부정확성 속에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 단절을 증명하기 위해 사건사적으로 유명한 연대(날짜)가 제시된다. 1917, 1789, 1640, 1517, 1492, 혹은 800, 410, 375 등의 숫자를 우리는 상기해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식의 셈법은 시대를 심층규정하는 데 있어 다만 하나의 분기점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분기점은 어느 시대에나 상징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또한 사건사를 평가절하하지 않는 사람도 모든 세기가 하나의 날짜로부터 다른 날짜에로 이행하는 것을 내용적으로 규정하고자 할 때는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그러한 분기점 혹은 전환점만으로 만족해 왔다. 사건의 흐름으로부터 연대가 바뀌게 되는 시대를 도출해내어 표본화하는 데에는 전환점이나 분기점이 그지없이 만족할 만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대'라는 단어가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하나의 시대란 뒤따르거나 선행했던 시공간에 대해 고려하지 않으면서 한 시공간이 끝나고 다른 시공간이 시작되게 하는 단절을 지시했다. 독일 이상주의의 언어가 사용된 이후에야 비로소 한 시대로부터 다른 시대가 산출되면서 서로를 지시하는 장기적 연관성을 고려하는 시대개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연대기의 의미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시대는 정확하게 측정될 리가 없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미끄러지는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으며, 이로부터 그러한 시대는 상대적인 단위들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화된 단초 속에 두 번째의 커다란 어려움이 놓여 있다. 초점이 맞추어진 연관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정확한 구획선을 긋기가 더 어려워진다. 이른바 중세로부터 이른바 고대를 구분짓는 것은 이미 중세개념이 발명된 그 세기부터 흔들리기 시작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의 근대 개념도 훨씬 더 넓게 늘려질 수 있다. 그 동안에 초기근대는 엄격한 의미의 근대와 구분되어 왔는데, 이는 프랑스어 근대사와 동시대사(현대사)의 구별에 상응한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전통에 부응하여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하는 두 개의 시대 사이에 공백을 두었다. 반면 러시아인들은 1789년 대신 1917년을 새로운 역사를 가장 새로운 역사 및 시대사로부터 떼어내기 위한 분절시기로 여긴다. 독일에서는 시대사란 표현이 나치즘 시대와 그 이후를 주제화하는 데에 미심쩍게 쓰이고 있다. 이렇게 민족사로부터 도출가능한 연대는 명백히 수백년 동안 축적되어온 구분의 노력을 위한 보편사적 구획으로서 충분히 정초가능하게끔 만들기에는 전혀 부적절하다.


연대기적 분절점과 구조적 심층규정 간의 절충을 위해 독일에서는 '시대문턱'이라는 단어가 도입되었다. 이 개념은 이행의 시대로 정의가능한 장기적 과정을 파악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여, 규정적으로 주어지는 기준 안에서 '예전에는 아직 아니'었고 '이후에는 더 이상 아닌' 것의 최소조건들을 확정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이러한 역사이론적으로 풍요로운 개념에서도 내용적 기준은 아직 도출되지 못한다.


연대기적 사건의 날짜와 장기적이며 연대를 넘어 지속되는 연관들을 시대개념으로 모사해 내려는, 언급된 모든 어려움은 이를테면 '새로운 시대' 혹은 '근대'가 역사적 시대개념으로 성찰된 이후에야 비로소 부각된 것이다. 18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이 부상했던 것이다. 이것들은 이제까지 논쟁 없이 근대로 불리고 있는 우리 시대의 기호에 속하는 것들이다. 여기서 근대가 여전히 지속될 것인지의 여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선 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구획의 시도들에 대해 짧게 훑어봄으로써 오늘날의 문제상황으로부터 계몽주의로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에 제기되어 오늘날 우리 역사가들도 여전히 대면하게 되는 문제들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모든 시대형성에 결부되어 있는 어려움은 교과서나 사전에 제시된 분절들에 의해서 간신히 은폐되어 있다. 이른바 근대라는 시대에 대한 몇 가지 예가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로의 시대문턱이 1500년에 세워지는 것인지 아니면 1800년에 세워지는 것인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거리이며, 이는 트뢸취가 맹렬히 18세기를 옹호했을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미 랑케가 중세와 새로운 역사(근대) 간의 경계선 긋기에 대해 저항할 때 그는 이러한 개념들 없이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1500년을 전후로 문턱시대가 있었는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들이 있다. 아메리카의 발견과 이에 따른 유럽의 세계팽창이 시작되었고, 노예무역과 노예경제를 배경으로 한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성이 조금씩 싹텄으며-이 노예경제는 아마 일찌기 그리스-로마의 고대 때보다 더 악랄한 것이었을 터인데-, 아메리카 식민농장 및 그곳의 은광에서의 노동과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전개된 동아시아 무역간의 관계가 교체되었고, 의사소통체계 전체와 구어 자체를 바꾸어 버린 인쇄술의 발명이 있었으며, 포탄 기술의 발전은 군사기술의 변화를 넘어서 전체 사회의 상황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심층적 구조변환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 의해 과학혁명이 일어났다. 언급된 이 모든 것 외에도 일찌기 당대인들에 의해 새롭고 최종적인 세계시대를 알리는 소식으로 파악되었던 교회의 분열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와 다른 셈법도 재빨리 준비되었다. 지역에 따라 정도를 달리 하긴 하지만 유럽 국가들의 중세 전성기에 만개했던 신분국가적 이원론은 프랑스 혁명에까지 이르렀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효력을 미쳤다. 경제사적으로는 1450년부터 1650년까지 하나의 순환주기가 있었는데, 이 주기는 어떤 영속화되는 비약에도 이르지 않았다. 급격한 생산성 증가는 이에 상응하는 일반적 생활조건의 악화와 결부되어 있었다. 마르크스가 생산성 증가의 비약을 실현한 것이라 보았던 기계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1500년이라는 문턱을 제거한 구조사적인 진술을 도외시한다고 해도 사건사적 층위에서 비슷한 어려움이 제기된다. 여기서도 어떤 중심점이 사건을 추진해가느냐에 따라 단절 시기는 앞으로 혹은 뒤로 이동될 수 있는 것이다. 농민전쟁은 양가적 혁명이었는데, 그들이 "근대적" 초기자본주의의 압력에 직면하여 농민 봉기 따위로 반응한 것을 볼 때 그 혁명의 퇴행적 측면은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된다. 어쨌거나 혁명은 실패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오래된 제국에서의 농민의 지위가 높아지긴 했지만 말이다.


상업자본주의를 보장하는 헌법을 향한 길의 첫 번째 성공정인 혁명으로서 사람들은 네덜란드 독립운동을 이야기하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경우 1500년 이전에 만개했던 북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업 및 금융자본주의는 어떤 안내자의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이 곧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추코프가 1640년을 근대가 시작된 시기로 보았던 것과 같이 영국 혁명을 첫 번째 성공적인 돌파지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심점이 산업혁명 자체로 옮겨가게 되면 근대의 열어젖힌 시작점은 18, 19세기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스케치, 아니 오히려 하나의 캐리커쳐와도 같은 개관으로부터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이 나온다. 어떤 질문제기가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다양한 사건들의 계열선이 안팎으로 경계지어진다는 점이다. 이 사건 계열체는 소위 중세 시대로부터 근대를 분리해 내기 위해 '예전에는 아직 아니었던' 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 이때 이 사건들은 모두 세계사적으로 보편화될 가능성을 갖지 못한 채 유럽중심주의적인 것으로만 남는 것들이다. 우리는 21세기 중국의 시각에서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결론을 도출해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1800년이라는 문턱시대에 대해서도 역시 찬성과 반대가 있다. 산업혁명의 결과들은 19세기에야 비로소 광범위한 힘을 갖게 되었고, 그 이래로 유럽의 개발도상국들로부터 시작해서 식민지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사회사 연구는 아날학파의 새로운 문제제기와 함께 프랑스 역사로 눈을 돌렸다. 제 1, 2 신분-이들은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 체계로 교체되는데-에 의해 대표되던 봉건주의와 같은 진행모델은 거의 기력을 소진했다. 새로운 진입자가 있었음에도 프랑스 지배계층의 연속성과 동질성은 혁명 이후에도 전혀 의심받지 않았다. 법률가들과 귀족, 그리고 시민의 역할은 혁명의 시작에 있어서도 결정적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주도적이었던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세 계급으로 이루어진 도식은 1789년 이전에 벌써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고, 1815년 이후에는 국가위계적 직업의 범주가 프랑스 사회를 구조지었다. 마찬가지로, 소유집단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소유권 분할에 있어서의 연속성 또한 놀라우리만치 연속적이다. 변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법질서였고, 이는 사회제도에서의 그것보다 심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혁명 이전부터 지배 귀족 계층의 경계에 구멍을 뚫고 봉건적 부담의 압력을 경감시켜왔던 프랑스 행정작업의 연속성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혁명이 초래한 역사는 근대화하는 산업자본주의에 반하는 금융자본주의가 프랑스 혁명의 성과들을 다만 제한적으로 받아들였던 독일 같은 지역에서보다 훨씬 더 강하게 보존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은, 장기적인 구조에 있어서 의문시되면서 그 주역들과 참여자들, 그리고 후손들에 의해 계속해서 부여된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프랑스 혁명에 대한 프로이센의 대답이 여하한 관점에서도 하나의 시대단절로 고찰될 수 있는지에 대해 비판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경제제도는  심층적으로 변화되었다. 소유권과 경쟁의 자유 및 토지에 묶여있던 강제노동의 철폐를 통해. 소유 및 노동과 관련된 제도는 철저히 자유롭게 되었지만, 이를 통한 토지와 관련된 사회구조의 변화는 미미했다. 기사계급은 자본주의적 시장의 조건들에 적응해 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적 주도권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농업구조의 근본적인 근대화-이는 서독과 동독에 대해서도 타당한데-는 아주 서서히 이루어졌고, 1945년 이후에야 비로소 확실히 진행되었다. 19세기까지는 화학과 수공업의 결합을 통해서만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졌고, 20세기 이후에는 이러한 결합이 기계적 생산 수단을 통해 폐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이후에야 비로소 농업은 기능적으로 일관되게 자본주의 경제체계-혹은 동독의 경우 사회주의 경제체계-로 편입되어 들어갔으며, 산업내적인 구조와 노동제도에 의해 근대 산업사회의 한 층을 담당하게 되었다. 강조점을 경제제도의 자유화에 두느냐 혹은 새로운 생산기술의 적용에 두느냐에 따라 농촌의 사회제도가 언제부터 근대화되었느냐 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1800년이라는 문턱시대에 대한 것이 1500년이라는 문턱시대에 대해서도 똑같이 타당하다. 질문을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특수한 계층에 따라, 지역에 따라, 민족에 따라, 대륙에 따라, 혹은 보편적으로 이른바 '근대'라는 시대가 시작된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아주 상이한 시간분절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질문의 틀이 어떤 역사적 상태를 구성하는가에 따라 자연스레 사례들은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묘사해온 통시적 왜곡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거치는 모든 구별들을 묶어주는 하나의 공시적 단위가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즉 모든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시대의 단면에 하나의 혼동할 수 없는 특색을 부여하는 연관들이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언어의 풍속으로부터, 의복과 유행으로부터, 건축양식과 기념들에서, 사유방식과 관심의 표현들에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갈등 및 해결의 방식들로부터, 모든 계층과 시대를 관통하며 해마다 혹은 어쩌면 세기마다 기록될 각각의 '시대정신'을 추론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문화와 정치, 경제와 종교를 결합시키는 듯 보이는 그러한 공시적 단위를 구성한 경우에도 새로운 어려움이 발생한다. 그런 종류의 공시화된 시대단위들은 인류사에 대한 일반적 시대의 단면을 정초할 수 있기 위해서는 거의 보편화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대적인 것의 비동시대성이 곧장 부각된다. 이를테면 우리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에스로 확장되어 간 동시에, 전부는 아니지만 몇명 유럽 국가들과 마침내는 일본으로까지 확산된 과학적, 경제적, 기술적 발전의 거대한 흐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선진적 기능에 비추어보면, 나머지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은 만회를 강요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게 된다. 이들은 문화적으로 완전히 미개하고 후진적인 어떤 것으로, 즉 개발도상국으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생산력에 따라 측정된 모든 시대구획은 시대분절에 대한 보편진술을 아주 어렵게 만드는 지연과 가속, 중첩, 그리고 지역에 특수한 시차로 이어진다. 각각의 시대에 새로운 것은 분명 일반적으로 대답될 수 없다. 태양의 순환으로부터 도출된 자연적인 연대기는 변화된 관점에 따라서는 전환점 혹은 주요자료로서 해석될 수도 있을 수많은 자료들을 자의적으로 처리한다. 그리고 우리가 장기적인 구조변환에 대해 물어본다 해도, 존재하는 것은 영역에 따라 지역에 따라 상이한, 보편적으로 일치될 수 없는 시간의 지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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