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번역이론에 대한 연구
-그의 보들레르 연구를 중심으로
1. 벤야민의 언어이론에서 핵심은 '언어 자신의 성찰성'에 있다. 언어 자체의 성찰성은 달리 말해 언어의 번역가능성이다. 이때 작가나 화자의 의도는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며, 독자나 청자의 해석은 언어 자체의 운동이 허락하는 한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이 운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가의 과제, 발터 벤야민의 언어마법이론(메닝하우스), 이름-텍스트-목소리(멩케)
2. 보들레르는 탁월한 번역가이다. 첫번째로 미술비평가로서 그림 언어의 탁월한 번역가이며, 두 번째로 근대의 시인으로서 도시 언어의 탁월한 번역가이다. 벤야민은 이 두 측면 모두에 주목하여 보들레르 연구를 진행했던 바, 그것의 성과가 "파사젠베르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운동하는' 성찰성을 가진 언어(다시 말해 번역가능한)는 단지 인간의 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낭만주의에서 말하는 '세계의 책'을 상기할 것. 전달가능한 정신적 내용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 언어이며, 인간의 언어는 그것의 특수한 한 경우일 뿐이다.
*'번역가능한'이라는 사태는 '전달가능한'이라는 사태와 동일하지 않다, 결코! 예를 들어, 보들레르의 시가 어떻게 번역되든지 그것은 보들레르의 전달 의도(만약 그런게 있다면)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그의 시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번역가능성이 그것을 좌우한다.
3. 성찰성, 번역가능성이 핵심이다. '문제해결적 활동성'은 번역가능성의 긍정적 측면이다. 번역가능성은 언제나 극단적인 위험을 내포하는데, 이 위험의 상징이 다름아닌 '화폐(교환가지)'이다. 성찰성의 동력, 즉 언어의 운동을 추동하는 힘은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인데, 화폐는 바로 이러한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의 반대극을 형성하는 힘이다. 화폐는 언어의 운동을 정지시키고 무화하는데, 화폐 그 자체는 '빈 자리Leerstelle'이면서 동시에 모든 번역가능성을 자기 자신에게로 환원시키는 근대의 악마이다.
4. 보러의 "문학의 자기준거성" 혹은 "언어의 자기준거성"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번역가능성을 제한적으로만 파악한 관점이다. 언어는 자기준거적이지만, 그 자신이 끊임없이 운동하므로 단순히 자기준거적이지만은 않다. 게다가 언어는 언제나 '잘못' 번역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번역가능성 자체로부터 나오는 필연적인 위험이다. 이는 벤야민이 이미 언어 타락의 역사를 통해서 암시한 바 있다.
페터 지마의 "간술화적 대화"와 "반성", 그리고 "메타 언어"에 대한 관점은 언어를 너무 좁게 파악하고 있다. 언어는 단순히 담론 혹은 텍스트 차원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대화' 요구는 언제라도 묵살 가능한 무기력한 요구이다. 대화는 보다 넓은 번역의 한 양상이다. 다시 말해 대화가 성사되는 경우는 번역가능성이 실현되는 순간이며, 이때 지마의 공헌은 번역가능성의 위험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더 보아야 할 텍스트: 메닝하우스, 멩케, 보러, 지마, 아도르노, 바흐친, 보들레르.
-그의 보들레르 연구를 중심으로
1. 벤야민의 언어이론에서 핵심은 '언어 자신의 성찰성'에 있다. 언어 자체의 성찰성은 달리 말해 언어의 번역가능성이다. 이때 작가나 화자의 의도는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며, 독자나 청자의 해석은 언어 자체의 운동이 허락하는 한에서 이루어진다. 물론 이 운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번역가의 과제, 발터 벤야민의 언어마법이론(메닝하우스), 이름-텍스트-목소리(멩케)
2. 보들레르는 탁월한 번역가이다. 첫번째로 미술비평가로서 그림 언어의 탁월한 번역가이며, 두 번째로 근대의 시인으로서 도시 언어의 탁월한 번역가이다. 벤야민은 이 두 측면 모두에 주목하여 보들레르 연구를 진행했던 바, 그것의 성과가 "파사젠베르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 운동하는' 성찰성을 가진 언어(다시 말해 번역가능한)는 단지 인간의 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낭만주의에서 말하는 '세계의 책'을 상기할 것. 전달가능한 정신적 내용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 언어이며, 인간의 언어는 그것의 특수한 한 경우일 뿐이다.
*'번역가능한'이라는 사태는 '전달가능한'이라는 사태와 동일하지 않다, 결코! 예를 들어, 보들레르의 시가 어떻게 번역되든지 그것은 보들레르의 전달 의도(만약 그런게 있다면)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그의 시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번역가능성이 그것을 좌우한다.
3. 성찰성, 번역가능성이 핵심이다. '문제해결적 활동성'은 번역가능성의 긍정적 측면이다. 번역가능성은 언제나 극단적인 위험을 내포하는데, 이 위험의 상징이 다름아닌 '화폐(교환가지)'이다. 성찰성의 동력, 즉 언어의 운동을 추동하는 힘은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인데, 화폐는 바로 이러한 아이러니와 알레고리의 반대극을 형성하는 힘이다. 화폐는 언어의 운동을 정지시키고 무화하는데, 화폐 그 자체는 '빈 자리Leerstelle'이면서 동시에 모든 번역가능성을 자기 자신에게로 환원시키는 근대의 악마이다.
4. 보러의 "문학의 자기준거성" 혹은 "언어의 자기준거성"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번역가능성을 제한적으로만 파악한 관점이다. 언어는 자기준거적이지만, 그 자신이 끊임없이 운동하므로 단순히 자기준거적이지만은 않다. 게다가 언어는 언제나 '잘못' 번역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번역가능성 자체로부터 나오는 필연적인 위험이다. 이는 벤야민이 이미 언어 타락의 역사를 통해서 암시한 바 있다.
페터 지마의 "간술화적 대화"와 "반성", 그리고 "메타 언어"에 대한 관점은 언어를 너무 좁게 파악하고 있다. 언어는 단순히 담론 혹은 텍스트 차원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대화' 요구는 언제라도 묵살 가능한 무기력한 요구이다. 대화는 보다 넓은 번역의 한 양상이다. 다시 말해 대화가 성사되는 경우는 번역가능성이 실현되는 순간이며, 이때 지마의 공헌은 번역가능성의 위험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더 보아야 할 텍스트: 메닝하우스, 멩케, 보러, 지마, 아도르노, 바흐친,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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