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문학과 소설시점의 이론-선생님 논문

만일 우리가 시각적 자극이 시각적 이미지로 구성되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의식해야 한다면, 우리는 생존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접근해오는 사자를 얼마나 빨리 인지하느냐가 영양의 목숨을 좌우한다. 인식은 곧 시간의 문제인 것이다. (14)

우리는 세계를 효과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구성한 것을 외부에서 주어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빠져 있다. (15)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밖으로 걸어 나와서, 타인이 어떻게 세계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가 보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와 같지 않고, 그 세계의 풍경은 달 세계의 풍경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미지의 것이다. 예술 덕택에 우리는 단 하나의 세계(우리의 세계)만을 보는 대신에 다수의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된다. 창조적인 예술가들의 수만큼 많은 세계들[...](26,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인용)

프루스트와 슈클로프스키의 미학적 틀 내에서, 진리는 이처럼 상이한 두 개 이상의 시점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진리는 충격이다. (27)

말은 무의미해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음향이 된다. (35)

내가 지금 "블룸의 건너뜀"이라고 명명한 현상은 특히 모더니즘 소설의 분석과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38)

주인공은 화자라는 주체에 의해 인식되고 이야기되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환경에 대해서 인식의 주체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이야기는 이야기되는 대상에 속하는 주인공이 다시 그 대상에 대해 주체의 지위에 서있다는 점에서 자기반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42)

시점은 우리가 세계로부터 받아들이는 무수한 정보 가운데서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 유관한 것과 무관한 것을 구별하는 기준을 제공한다. 지마Zima는 이를 유관성기준Relevanzkriterium이라고 부른다. (45)

사전지식으로서의 시점은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의 경계를 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슈탄첼, 쥬네트, 기타 영미 비평이론에서의 시점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결정한다. (45)

사물을 구별하자면 절대적인 차이의 세계,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절대적으로 다른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는 특정한 사물의 차이를 지각하기 위해서 다른 무수한 차이들을 무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46)

독자는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를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인식된 것, 또는 누군가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만 접한다. 독자는 주인공과는 달리 그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독자가 접하는 이야기세계의 구성에 참여한 주체들을-그것이 화자이건 주인공이건 간에-우리는 필터라고 부를 수 있다. (...) 필터는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와 독자 사이에 서 있다. (49)

암필터는 편지를 건너뛰며 읽는 블룸이 그랬듯이, 독자가 대면하고 있는 텍스트에 구멍을 내며, 우리가 앞에서 말한 "빈틈이 있는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50)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경악의 효과는 주인공의 인지적 과정이 독자(관객)의 의식 속에서도 그대로 재생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주인공이 플롯의 마지막 단계에서 도달하게 되는 최종적 진실이 독자에게도 명백히 밝혀질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진실의 공유가 공감의 기본 조건인 것이다. (125)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은, 우리의 자아가 늘 무지에서 지로 이행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지에서 다른 종류의 지로, 하나의 시점에서 다른 시점으로 이행하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과거의 자아가 중요시했던 것들을 얼마나 여전히 알고 있는가? (...) 그렇다면 내가 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과거의 나에 대해서 취하는 전지성이란 가상의 전지성에 지나지 않는 셈이 된다.(162)

현재의 자아가 과거의 자아에 대해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은 그가 실제로 더 성숙하고 더 많이 알고 더 확대된 자아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현재의 자아만이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자아는 자기의 시점에서 과거의 자아를 규정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는 반면에, 과거의 자아는 오직 인식되고, 규정되고, 이야기될 뿐이다. 과거의 자아는 목소리가 없고, 자기를 변호할 수도 없다. (164)

주인공의 목소리 자체가 요약되지는 않는다 해도, 주인공의 목소리가 이야기세계를 "요약"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81)

화자의 역할은 바로 이같은 번역자에 비유할 수 있다. 화자는 주인공의 의식, 목소리, 말을 자기 말로 옮기는 번역자인 것이다. 화자의 역할은 주인공의 의식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데 있다. 번역자가 외국어 텍스트를 먼저 읽고 이해해서 외국어를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 텍스트로 전환시키는 것처럼, 화자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먼저 이해한 뒤에 이를 독자에게도 이해가능한 형태로 바꾸어주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183)

"우리가 무언가를 말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것은 가치를 잃어버린다. 우리가 심연 속으로 내려갔다고 하자. 우리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창백한 손끝에는 물방울이 묻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물방울은 이미 바다 밑에 있던 그 물방울이 아니다. 우리는 갱도 속으로 들어가서 진기한 보물을 발견한 줄 안다. 그러나 밝은 곳으로 나와보면 우리가 가져온 것이라곤 고작해야 형편 없는 돌이나 유리조각 따위일 뿐이다. 하지만 어둠 속의 보석은 여전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189, 생도 퇴얼레스의 혼란, 무질 인용)

"주석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동일한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오해는 서로 완전히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189, 법 앞에서, 카프카 인용)

"글은 변함이 없으며, 해석이란 다만 이에 대한 절망의 표현일 뿐이지." (190, 소송, 카프카 인용)

이런 의미에서 다성적 소설은 전통적 시점이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형, 즉 일종의 2인칭 형식으로 정의된다. "소설의 모든 구조로 볼 때 작가는 주인공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대화적이고 함께 참여하는 지향자세만이 타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의미론적 입장으로서, 또 다른 시점으로서 그 말에 접근할 수 있다. [...] 모든 것이 등장인물을 자극하고, 도발하고, 다그치고, 논쟁으로 끌어내야 한다. 모든 말은 등장인물 자신을 겨냥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것은 실제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는 자에 대한 말로 느껴져야지, 부재중인 자에 대해 이야기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는 안된다. 즉 '3인칭'이 아닌 '2인칭'의 말로 느껴져야 하는 것이다."(200, 도스토예프스키 시학, 바흐친 인용)

"인간은, 생존해 있는 한 완결되지 않았고 자신의 마지막 말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 (203, 바흐친 인용)

인간이 자신의 마지막 말을 했다면, 사람들은 이제 그를 두고 3인칭적으로 이야기하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03)

"그것은 결코 다 끝나버린 대화의 속기록이 아니다. 작가는 이 대화에서 빠져나온 상태가 아니며, 마치 고차적인 결정을 내리는 사람처럼 이 대화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입장도 아니다. [...]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이 커다란 대화는 바로 문턱에 서있는 닫혀지지 않은 인생의 전체로 구성되어 있다."(204, 바흐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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