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자료

'합의'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 합의된 적은 없으며, 이는 그 뜻이 확정되기 위해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할 모든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합의는 언제나 불완전한 합의다.

벤야민의 순수언어와 비트겐슈타인의 침묵

개념의 실체화, 진리화(니체의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참조) --> 상품의 물신화, 화폐의 물신화(벤야민의 파사젠베르크)

불완전한 합의의 상태로 굳어진 개념이 반복되고 재생되어 순환되면서(니체의 표현, 동전이 닳듯이)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비약하는 신비. 즉 개념이 실체라고, 상품이 실재라고, 화폐가 진짜라고 믿게하는 힘을 갖게 되는 그 신비. 다시 말해, 그러한 믿음의 신비를 규명해 볼 것.

합의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목숨을 건 도약'(마르크스, 고진)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고진이 말하듯, 공동체보다는 사회가 우선이고, 이 사회는 무엇보다도 '교통'으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교통'은 이미 나 있는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길을 만드는 행위이다. 그 길은 그리고 언제나 끊어질 위험에 처해있다. '목숨을 건 도약'이 이루어진다는 사태, 혹은 그러한 도약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렇다면,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합의의 상태'를 전제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합의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 식으로 말하자면, 세계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신비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계라는 신비 속에 살고 있고, 이 신비를 통해 '도약'이 이루어진다. 물론 이 도약은 빈번히, 아니 거의 대부분 실패한다. 게다가 그리 많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대개 '길 위로' 다니지, 구태여 길을 만드는 수고를  자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가 합의를 통해 가능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이미 불완전한 합의의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 바로 번역이다. 번역은 언어의 불완전한 합의가 그 존재를 여실히 드러내는 지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번역자의 인칭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무인칭의 번역자는 말하면서 침묵한다는 역설을 실천한다. 이 역설은, 말할 수 없는 것에 의지해 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역설이다.

벤야민의 순수언어는 곧 '말할 수 없음'이요, 침묵인데,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아마도 벤야민이 말하는 '이름'조차도 사라질 것이다. 침묵은 언어와 모순되는 사태인데, 이 모순이 바로 언어가 태어나는 자리이다.


합의와 계약, 언어의 일물다어성, 정치적 동물(남경희), 간술화적 대화, 사회기호학, 이데올로기와 이론(지마), 목숨을 건 도약, 교통, 형식에의 의지와 0의 문제, 화폐와 교환, 상품(고진), 순수언어, 번역가, 언어일반, 번역가능성/불가능성(벤야민), 언어게임, 침묵(비트겐슈타인)

이 불완전한 합의의 상태는 인간의 눈에는 무한히 지속될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만, 침묵하는 신의 언어는 이 불완전성을 종식시키고 완전한 합의를 이루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신'에 대해서도 아무런 합의를 보고 있지 못하며, 또한 신은 사실 '합의'를 이룰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신에게 언어 따위는 잉여일 뿐이다. '신의 언어'를 창작해 내고, 이 허구에 힘입어 '완전한 합의'를 꿈꾸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합의'를 완전하다고 착각하거나, 그것의 불완전함을 망각한다. '합의'혹은 '무언어(침묵)'에 도달하려는 자들은 '초월적인 것'과 소통하려는, 다시 말해 '존재를 건 도약'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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