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크리투스

사람들은 이 위대한 사상가의 이름을 보통-그리고 이는 매우 타당한데-가장 작은,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원소(Atome)에 대한 이론과 결부시킨다.

이 원소는 그 angenommenen 촘촘함  때문에 분리불가능하고, 성질을 가지지 않으며, 그 때문에 공간적이고 양적인 규정만을 받을 수 있다. 감각의 성질(색, 맛, 온도)들은 지각의 과정을 통해 발생하며, 원자 자체에는 아무런 성질 규정도 주어지지 않는다.

원자들은 서로 매우 상이한데, 특히 세 가지 관점에서 그러하다. 양과 형태(둥근 것, 각진 것, 구부러진 것)에 있어서, 나아가 그것들의 배열 순서에 관해서, 마지막으로 그것들의 위치와 관련해서. 데모크리투스는 이를 A와 N의 형태의 차이, AN과 NA의 배열상의 차이, Z와 N의 위치(Lage)상의 차이를 제시하는 직관적인 방식으로 알기 쉽게 설명한다. 질없는 원자에 대한 그의 이론은 그리스의 정신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모든 질적 규정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시킴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과학으로의 도정에 중요한 진전을 이루어냈다. 그리고 이는 비록 그 자신에게는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수학의 발전(Mathematisierung)에 도움이 되었다.

근대 과학과의 큰 차이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사물(자체)의 구조를 파악하려 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데모크리투스에 있어 원자의 개념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며 사변적인 것이고, 따라서 관찰을 통한 추상으로는 획득될 수 없는 이론적 구성물을 표현한 것이며, 이 구성은 무엇보다 생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를 파헤쳐야 하는 것이다. 즉 파르메니데스에 의해 일면적인 (절대적으로 정적인) 의미만을 가졌던 그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이 원자설에서의 중요한 결론은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관통하는 필연성에 대한 가정이다. 이로써 인과원리가 보편적 원리로 인정받게 되며, 이는 인간이 기계론적 세계상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전적으로 근대적이라 부를 수 있을 그러한 의미에서 데모크리투스는 원자의 끊임없는 운동에 대한 가설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연관에 있어서(in diesem Zusammenhang) 물리학적 이론을 수립함으로써 이 중요한 가설을 뒷받침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은 유감스럽다. 그래서 이에 반해 압력과 충돌을 통해 발생하는 운동은 시초가 없다는 사실이 확립되었고, 따라서 우리는 그를 따라 원자의 운동은 원자의 Konstituens로 간주될 수 있다는 가설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그 양이 변할 수 있는 원자  외에 지각할 수는 없지만, 모든 지각가능한 사물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 할 운동하는 입자를 상정해야 했을 때, 데모크리투스가 또한 기계론적 심리학을 전개시킨 것은 당연하다. 이 원자들은 물질적으로 개념화된 영혼의 소재인 것이다. 이것들은 공모양이며(공이 당시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이상적인 모형이었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끊임없는 운동과 온기Waerme 속에서 산출된다. 이제 흥미로운 것은, 개체에 있어서 조정하는 Instanz의 역할을 담당하는,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영혼과 호흡 간에 그가 설정한 연관관계다. 다시 말해 그는 개별적인 영혼의 원자들이 육체를 떠다닌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질료 가운데 큰 부분이 빠져나가면 죽게 되며, 당연히 이렇게 개념화된 영혼에 있어서는 불멸성에 대한 가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의 가능성 역시 논리적 일관성이 있게 기계론에 종속된다. 여기서 그의 약간은 이상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론>이 효력을 발휘한다. 실제로 그는 그림은 지각가능한 실체로부터 출발하며, 그림들은 감각기관으로부터 출발하는 신체와 만나게 되며, 이를 통해 개개의 감각기관에 주어지는 특정한 인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 역시 문제적일 수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일관된 것이기는 하다. 즉 인간은 사물을 실제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작용을 미치는 바 대로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또한 그는 참되고 진실한 오성의 인식에 반해 감각지각을 애매한 것이라 말할 수 있었고 또 말해야 했다. 현실의 객관적 본질에 대한 인식(고대 그리스 시기의 모든 철학적 자연학적 체계들의 노력letztlich)은 따라서 반박된다. 동시에 ㅣ로써 서로 다른 인간들이 받아들이는 같은 종류의 자극은 서로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에 정당성이 부여된다.

오성의 인식 또한 물질적인 것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특히 지각행위에 대한 의존성 하에서 행해졌다. 그는 이러한 의존성을 지각과 오성 간의 대화의 형식으로 표현했다. "불쌍한 오성이여, 우리들 중에 너는 증명의 임무를 가졌으며 그로써 우리를 쓰러뜨리려 한다. (그러나) 네가 우리를 쓰러뜨리게 되면, 너 자신도 쓰러지게 된다." 또한 그의 -이미 간단히 언급된 바 있는- 제일 속성과 이차적 성질(달콤한, 추운, 노란...) 간의 구별이 이와 관련된다. 이러한 구별은 17, 18세기의 많은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긜고 경험적이고 이론적인 인식에 대한 그의 구별도 최소한 데카르트와는 대응됨Pendant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설-여기서는 원자설-이 얼마나 결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그가 신과 악마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있는 것은 오직 분자와 공허 뿐이라는 자신의 가정에 입각해서 답하려 했다는 사실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그의 가설에 알맞게, 인간에게 지각될 수 있는 신과 악마, 그리고 초인간적 본질의 그림(이미지)은 공기를 통해 퍼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몇몇의 해석가들이 이 가설을 터무니없는 가설로, 소박한 민중신앙에 대한 경의의 표시Reverenz로 서술한 것은 모순적이다. 데모크리투스가 자신의 원자설을 모든 물리학(자연학)적, 생물학적, 종교적 영역 및 보편적 인간의 영역에 관련시키지 않았다면, 그는 (적어도?) 일관성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데모크리투스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저 세상에 대한 두려움없이 구체적이고 삶과 연관된 문제에 전념하기 위해서 신의 존재에 대한 의미없는 물음을 도외시했다.

유감스럽게도 윤리학에 대한 그의 상술Ausfuehrung은 체계적이지 못하며 원본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좋은 건강(건강함)을 이성적인 태도(올바른 생각, 말, 행동)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 목적으로 제시한다.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그는 본성에 따라 그어진 자신의 한계를 존중할 때 이룰 수 있는 올바른 기준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편적 삶에서의 중용은 건강gutes Befinden의 근거다. 거센 충동과 강한 자극은 그것을 방해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혼의 원자를 방해하며 혼란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의 균형은 물리적이고 원자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의 형벌이론은 아주 구체적이다. 즉 법의 합법적 강제의 성격을 매우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악행에 대한 가혹한 처벌에 동의한다. 인간의 공동생활은 군인과 무기에 의해 형성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는 평등주의적인 사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작품: 위대한 세계질서, 정신에 대하여, 단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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