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기원전 428-348)
- 생활정보
- 2007. 4. 29. 16:58
플라톤은 고대와 중세 문화를 특징짓는 동시에 기독교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사상가이다. 기원전 428년 아테네에서 오래된 전사귀족가문의 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약 2년간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남부이탈리아에서 지냈다. 그후 아테네에 Heros Akademos(Akademie)에 봉헌된 학당(Schule der Weisheit)을 세웠다. 이 도시에서 그는 기원전 348년 81세의 나이로 죽었다.
플라톤은 수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부분은 대화형식으로 된 것이다. (34 an der Zahl): <<법률>>과 <<국가>>가 이에 속한다. 그의 사유는 신화적 세계상에 hineinreicht, 현실을 두 차원으로 나누는 데서 출발한다. 생성하는 시공간적 세계에 맞서 시간과 공간의 피안에 존재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존재의 세계는 오직 우리의 사유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영원불변을 repraesentiert. 생성의 세계는 우리의 지각으로 인식가능한 세계이다.
이로써 플라톤은 엘레아학파(형이상학자)의 세계해석을, 끊임없는 변화를 설파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그것과 결합시켰다. 영원한 이에다(eidos)는 존재의 세계를 구성하며, 지각의 세계와는 분리되어 있다. 이데아를 가정함으로써 한편으로 사유와 언어 간의, 다른 한편으로는 사유와 현실 간의 연관이 gefunden werden kann. 이데아는 우리에게 현실의 사물들의 원본paradeigmata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물들onta은 구성된 것, 파괴될 수 있고 변화하는 것이며 비가시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하나의 형태만을 갖는다.
우선,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 참됨 자체가 있다.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아름답고, 좋으며 참된 것으로 통하는 것은 아름다움, 좋음, 참됨의 영원한 이데아에 참여하는 것이다. 덧없는 경험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진술은 단지 개연성만을 가질 수 있을 뿐, 결코 최종적인 확실성에 이를 수 없다. 세계Kosmos는 선하고 공정한 세계창조자Weltbaumeister/demiourgos에 의해 창조되었고, 이때 그는 영원불변하는 이데아를 본떠서 세계를 만든 것이다. 세계의 질서는 기하학적 구조를 따른다.
인간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세계도 비가시적인 영혼(psyche)을 가진다. 이 영혼은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고, 존재의 양태Modalitaeten들을 매개한다. 이러한 세계혼Weltseele은 존재ousia, 동일성tauton, 그리고 상이성theatron으로 구성된다. 이와 유사하게 인간의 영혼도 욕망하는 부분, 용감한 부분, 그리고 사유하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철학은 현실의 순수한 근원적 형상을 다루는 것이며, Dialektik의 방법을 통해서 가설적인 것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은 전제들을 nivelliert하고 스스로 길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데아 중에서 최고의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이다. 그것은 인식의 대상에게 진리와 인식가능성을 부여한다. 인식하는 주체에게 그것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그것은 인식의 대상이 존재einai와 존재성Seiendheit/ousia을 갖게 해준다. 변증가Dialektiker는 자신의 대상을 알며, 그것의 본질Wesens-Logos을 말할 수 있다. 좋음을 인식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러나 좋음의 이데아는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직관적인 방식으로[만] 파악된다.(인식된다) 빛으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가장 빛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표상불가능한 아름다움이며 als himmlischer Ort 모든 본질을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것은 신적인 특질을 가진다.
인간의 영혼이 신체적인 것의 모방에서 이데아의 세계의 참된 형상으로 눈을 돌리면, 그는 신적인 것에의 동화Angleichung를 경험하게 된다. (homoiosis theou) 영원한 이데아의 영역은 불멸하는 인간영혼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적인간"으로 이해되며, 죽은 뒤에 모든 행위와 행동에 대해 심판받아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신, 신들, 그리고 신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어떤 인격적이고 인간적인 신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영원한 이데아와 관계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뭔가를 인식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보았던geschauten 이데아를 기억해(상기해) 낸 것이다. 그므로 영혼의 불멸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wahrscheinlich.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은 우리 안에 영원한 이데아에 댜한 사랑Eros을 타오르게 한다. 이 영원한 이데아는 우리에게 좋은 삶에 대한 확고한 규칙을 준다.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는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덕arete은 영혼의 건강함과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간주된다). 그러나 악함은 병들고 추악한 영혼의 표현(표식)이다.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지혜, 절제, 용기와 정의의 덕이며, 다른 한편 영혼을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무지와 무절제, 비겁함 그리고 불의의 악덕이다. 영혼은 스스로 운동하기 때문에 불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영혼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 새로운 육체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영혼은 삶과 죽음의 윤회를 따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스스로 운동하므로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에는 세 계급이 있다. 귀족과 전사의 영혼에는 황금이 들어있고, 자유로운 시민의 그것에는 은이 함께 뒤섞여 있으며, 노예계급의 영혼은 청동과 철의 혼합물로 규정된다. 모든 영혼은 욕망하는 부분, 용감한 부분, 사유하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인간의 국가는 위계적으로 질서지어져 있으며, 영원한 법에 의해 통치된다. 지혜로운 자가 국가의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데, 이는 좋음을 인식하는 자만이 그것을 또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의 국가는 철학자가 이끄는(지도하는) 국가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좋은 국가는 영원한 법이 지배하는 국가이다. 이 법은 신성에 의해 공포된 것이며 절대적 타당성을 지닌다. "naechtlcher Rat"는 모든 사람Bewohner이 영원한 법을 지키고 있는지에 대해 모든 국가에서 감시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플라톤은 폐쇄적인 전체주의 국가의 선구적 사상가가 된 것이다. 그에게 국가의 임무란 모든 사람에게 도덕과 법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국가모델은 기독교국가에 의해 실현되었고, 오늘날에도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수많은 저작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대부분은 대화형식으로 된 것이다. (34 an der Zahl): <<법률>>과 <<국가>>가 이에 속한다. 그의 사유는 신화적 세계상에 hineinreicht, 현실을 두 차원으로 나누는 데서 출발한다. 생성하는 시공간적 세계에 맞서 시간과 공간의 피안에 존재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존재의 세계는 오직 우리의 사유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영원불변을 repraesentiert. 생성의 세계는 우리의 지각으로 인식가능한 세계이다.
이로써 플라톤은 엘레아학파(형이상학자)의 세계해석을, 끊임없는 변화를 설파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그것과 결합시켰다. 영원한 이에다(eidos)는 존재의 세계를 구성하며, 지각의 세계와는 분리되어 있다. 이데아를 가정함으로써 한편으로 사유와 언어 간의, 다른 한편으로는 사유와 현실 간의 연관이 gefunden werden kann. 이데아는 우리에게 현실의 사물들의 원본paradeigmata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물들onta은 구성된 것, 파괴될 수 있고 변화하는 것이며 비가시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하나의 형태만을 갖는다.
우선,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 참됨 자체가 있다.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아름답고, 좋으며 참된 것으로 통하는 것은 아름다움, 좋음, 참됨의 영원한 이데아에 참여하는 것이다. 덧없는 경험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진술은 단지 개연성만을 가질 수 있을 뿐, 결코 최종적인 확실성에 이를 수 없다. 세계Kosmos는 선하고 공정한 세계창조자Weltbaumeister/demiourgos에 의해 창조되었고, 이때 그는 영원불변하는 이데아를 본떠서 세계를 만든 것이다. 세계의 질서는 기하학적 구조를 따른다.
인간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세계도 비가시적인 영혼(psyche)을 가진다. 이 영혼은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고, 존재의 양태Modalitaeten들을 매개한다. 이러한 세계혼Weltseele은 존재ousia, 동일성tauton, 그리고 상이성theatron으로 구성된다. 이와 유사하게 인간의 영혼도 욕망하는 부분, 용감한 부분, 그리고 사유하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철학은 현실의 순수한 근원적 형상을 다루는 것이며, Dialektik의 방법을 통해서 가설적인 것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은 전제들을 nivelliert하고 스스로 길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데아 중에서 최고의 이데아는 좋음의 이데아이다. 그것은 인식의 대상에게 진리와 인식가능성을 부여한다. 인식하는 주체에게 그것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그것은 인식의 대상이 존재einai와 존재성Seiendheit/ousia을 갖게 해준다. 변증가Dialektiker는 자신의 대상을 알며, 그것의 본질Wesens-Logos을 말할 수 있다. 좋음을 인식하는 것은 다른 모든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러나 좋음의 이데아는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직관적인 방식으로[만] 파악된다.(인식된다) 빛으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가장 빛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표상불가능한 아름다움이며 als himmlischer Ort 모든 본질을 포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것은 신적인 특질을 가진다.
인간의 영혼이 신체적인 것의 모방에서 이데아의 세계의 참된 형상으로 눈을 돌리면, 그는 신적인 것에의 동화Angleichung를 경험하게 된다. (homoiosis theou) 영원한 이데아의 영역은 불멸하는 인간영혼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적인간"으로 이해되며, 죽은 뒤에 모든 행위와 행동에 대해 심판받아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신, 신들, 그리고 신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어떤 인격적이고 인간적인 신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영원한 이데아와 관계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뭔가를 인식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보았던geschauten 이데아를 기억해(상기해) 낸 것이다. 그므로 영혼의 불멸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wahrscheinlich.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은 우리 안에 영원한 이데아에 댜한 사랑Eros을 타오르게 한다. 이 영원한 이데아는 우리에게 좋은 삶에 대한 확고한 규칙을 준다.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는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덕arete은 영혼의 건강함과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간주된다). 그러나 악함은 병들고 추악한 영혼의 표현(표식)이다.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은 지혜, 절제, 용기와 정의의 덕이며, 다른 한편 영혼을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무지와 무절제, 비겁함 그리고 불의의 악덕이다. 영혼은 스스로 운동하기 때문에 불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영혼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 새로운 육체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영혼은 삶과 죽음의 윤회를 따르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스스로 운동하므로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에는 세 계급이 있다. 귀족과 전사의 영혼에는 황금이 들어있고, 자유로운 시민의 그것에는 은이 함께 뒤섞여 있으며, 노예계급의 영혼은 청동과 철의 혼합물로 규정된다. 모든 영혼은 욕망하는 부분, 용감한 부분, 사유하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인간의 국가는 위계적으로 질서지어져 있으며, 영원한 법에 의해 통치된다. 지혜로운 자가 국가의 권력을 행사해야 하는데, 이는 좋음을 인식하는 자만이 그것을 또한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의 국가는 철학자가 이끄는(지도하는) 국가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좋은 국가는 영원한 법이 지배하는 국가이다. 이 법은 신성에 의해 공포된 것이며 절대적 타당성을 지닌다. "naechtlcher Rat"는 모든 사람Bewohner이 영원한 법을 지키고 있는지에 대해 모든 국가에서 감시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플라톤은 폐쇄적인 전체주의 국가의 선구적 사상가가 된 것이다. 그에게 국가의 임무란 모든 사람에게 도덕과 법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국가모델은 기독교국가에 의해 실현되었고, 오늘날에도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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