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주체2-서론

'말걸기'(to address)와 '전달하기'(to communicate)라는 두 명칭의 의미는 엄밀하게 구별될 수 있다. '겨냥하다'와 '맞추다'라는 대조적인 어구에서 구별할 수 있듯이 전자는 수행표현(performative)으로서 그 행위가 달성되는 사태를 배제한는 반면 후자는 그 행위가 달성되는 사태를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적을 맞추기' 위해서는 먼저 '표적을 겨냥해야' 한다. 먼저 겨냥하지 않으면 '표적을 못 맞추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겨냥하다'가 '맞추다'에 선행하듯이 '말걸기'는 '전달하기'에 선행해야 한다. 그리고 '말걸기'가 '전달하기'와 구별되는 것은 말을 거는 행위가 메시지의 목적지 도달을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말을 걸 때의 호칭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동일한 정보를 전달했는지와 무관하게, 본질적으로 수행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렇게 지시되는 관계는 장 뤼크 낭시가 '무관계의 관계'로 언급하는, 아마도 모든 '소통이론'이 파탄난 상황에서 가장 명료하게 나타나는 관계일 것이다.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호격지시로서의 '우리'는 서로 동일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집단과 혼동될 수 없다. 그러한 집단은 상상적으로 그리고 표상에서만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보의 동일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요하다. 번역되지 않으면 정보 속의 무엇이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는지를 확정할 수 없다. 번역되고 전이된 것은 번역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인식 가능하다. 번역할 수 있는 것과 번역할 수 없는 것은 둘 다 반복으로서의 번역에 선행할 수 없다. 번역불가능성은 번역이 있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번역은 번역불가능성에 대해 선험적이다.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에서는 말걸기와 전달하기 사이의 불일치가 눈에 띄게 지각되는 반면에 균질언어적 말걸기의 실천계는 '우리'라는 부름과 그 표상 사이의 불일치에 대한 자각을 억압하게 만들며 그럼으로써 직접적이고 상호적인 이해라는 가설을 보강한다. 벤야민이 분명하게 보았듯이 번역의 목적/끝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다. 번역이란 기입/각인의 전달과 기입/각인으로서의 전달이 불가피하게 잇따라 일어나는 심급이기 때문이다. (49,50)

이 균질언어적 말걸기의 실천계에서 배제되는 것은 청중집단 안에 혼재하고 동거하고 있는 복합적인 언어유산이며, 이러한 말걸기에 이어서, 외국어를 쓰는 화자에 의한 또는 외국어를 쓰는 화자를 향한 발화는 진정한 형식의 발언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로 무시된다. 모든 듣는이들이 자기의 말을 이해할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미리 배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말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만약 '우리'가 하나의 언어공동체라면 '우리'는 우리끼리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과 혼동되는 것이다. 요컨대 전달이 쓰기(writing), 기입(inscription), 나아가 '외기'(外記, excription)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균질언어적 말걸기에서의 일체화(communion)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균질언어적 말걸기의 실천계는 무의식 중에 또 다른 가정을 요구한다. 즉 외국인에 의한 또는 외국인을 향한 발언은 부차적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발언은 동일한 매체 속에서 완결되어야 하며, 다른 매체를 가정하는 한, 번역은 독창적이거나 기원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실천계 아래서는 발화가 먼저 나오고 그러고 나서 그것이 번역된다. 그것은 '전달'이 보장되고 '말걸기'에 선행하는 언어적 균질성의 영역을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달의 실패를 특정한 방식으로 배분하는 질서를 만들어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균질언어적 말걸기의 자세에서는 타자의 발화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발언이 타자에 의해 오해되는 경험이 곧바로 이해불능이라는 경험을 이해하는 경험으로서 파악되고 만다. 가령 어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왔는데, 그 사람이 전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어떤 사람이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왔는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물론 러시아어를 모른다는 조건에서.) 첫째로 이해불능이라는 경험을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아주 의심스럽다. 더욱이 상정된 원인에 의한 설명을 포함하는 경험의 표상에 의해 전달의 실패를 개념화하는 이런 방식은 필연적으로 암묵적 동어반복을 가져오며 그러한 동어반복은 경험의 묘사와 그 상정된 설명을 구별할 수 없게 혼동시켜 버린다. 그 결과 이해불능이라는 경험은 이해하지 못한 원인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주어진다고 가정하게 된다. 바꿔 말해서 전달에 실패한 이유를 알면서 전달불능이라는 사건을 경험한다고 가정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평범한 통찰에 유의하는 것이 좋다. 즉 전달은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언어공동체들 사이의 격차 때문이 아니라 전달이 '외기'로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달하려는 행위는 스스로를 외부성(exteriority)에, 의미작용에서의 지시대상의 외재성(externality)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외부성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전달에 실패할 때 그 실패원인으로 매체 속의 지나친 잡음이나 듣는이의 응답 거부 등을 탓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가 전달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전달의 실패는 우리  각자가 타자에게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우리'가 분리되어 있는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타자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흩어져 있음을 가르쳐주는 전달의 실패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사회성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소급적으로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번역의 표상의 결과로서 우리는 타자의 발화에 대한 이해불능이라는 경험을 종종 간국민적 도식화(international schematism)에 따라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52,3)

('번역'이라는 말의 이해가능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번역자가 번역하면서 말하는 번역/통역이라는 상황에 관해서 인격[인칭]의 진동 또는 비한정성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소통 모델'로는 번역자의 장소를 지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54)

모든 번역은 그에 응답하는 번역을 부르며, 이런 유의 말걸기에서 분명한 것은 전달의 틀 내에서 번역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에서 듣는이는 쓰인 것이든 말해진 것이든 간에 발언을 실제로 받기 위해서는 모든 발언을 번역해야 한다. 또한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에서는 발화행위를 통한 말걸기가 최종적인 전달과 일치한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에 말하는 이가 제공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 듣는이는 행동하는 것을 요구받는다. 즉, 듣는이를 향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배달되지는 않는다는 것인데, 그것은 말걸기와 전달하기 사이의 격차, 말하는이와 듣는이 사이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말하는이나 듣는이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가지는 본질적 거리를 나타내는 격차 때문이다. 그래서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에서 받는 행위는 번역이라는 행위로 생겨나고 번역은 모든 듣기나 읽기에서 일어난다. 균질언어적 말걸기의 자세에서는 번역이 필연적으로 균질적인 매체의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면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에서는 원칙적으로 듣는이가 말하는이의 발언을 수용할  때마다 번역이 일어난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55,6)

번역자는 그 위치 때문에 본질적으로 뒤섞이고 이질적인 청중들을 향해 발화해야 한다. 번역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복수성을 단순히 계산가능한 복수성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복수(複數)의 언어 속에서 듣고 읽으며 말하고 써야 하기 때문에 번역자가 이언어적 행위체로서 행동하고 언어의 복수성이라는 입장에서 말을 거는 한에서만 한 언어로부터 다른 언어로의 이동이라는 표상이 가능하다. 번역자는 복수의 언어가 상호작용하는 그런 위치를 필연적으로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와 독자 양쪽에 대해 현전하는 번역자는 전달의 교류를 규제하지만, 한 언어에서 작가가 내놓은 메시지가 다른 언어의 등가의 메시지로 전이되고 독자들이 그것을 받는다는 번역의 표상 속에서 번역자에 의한 매개는 지워져야 한다. 이런 경우 역시 작가는 독자들에게 균질언어적 공동체라는 전제하에 말을 걸게 된다. 같은 언어공동체에 속하는 한 지각상의 장애가 없으면 이해시킬 수 있다는 가정은 여기에 고스란히 살아남아 있다. 말하는이와 듣는이 사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한 언어공동체와 다른 언어공동체 사이에 약분불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번역이 필요하다고 믿는 것이다. (57)

게다가 서예작품에서처럼 언어기호와 비언어기호를 쉽게 분리할 수 없을 때 야콥슨이 말하는 기호체계간의 변형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서예작품은 언어적인 것일까, 아니면 비언어적인 것일까? 그것은 보는 작품인가, 아니면 읽는 작품인가? 서예작품을 번역할 수는 있을까? 만약에 가능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구두로 이야기된 것(the verbal)이 언어적인 것(the linguistic)과 곧바로 동일시되는 조건이란 어떤 것일까?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은 점차 '본래적 번역'의 본래성을 당연시할 수 없는 담론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해줄 것이다. 오늘날 환태평양지역에 살든 대서양지역에 살든 번역의 이념은 거의 늘 자명하며, 그것을 다르게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이언어적 말걸기의 자세를 부과한다면 우리는 자명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이러한 입장을 지탱해주는 윤리-정치적 가정들과 습관화된 실천계들에 대해 탐구할 수 있다. (58)

번역자는 번역 속에서 약속할 수 있을까? 그는 번역하면서 말한 것에 대해 책임질 수 있을까? '번역자'라는 명칭이 지시하는 것이 직업적인 전문가도 사회적 지위도 아니고 번역이라는 행위에 관여하는 행위체나 인간을 가리킨다면 그 대답은 항상 이중적인 수밖에 없다. yes, 번역자는 약속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누군가를 대신해서이다. 그런 점에서 말한다면 no. 그 '자신'은 실제로는 약속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번역자는 번역에, 단어 하나하나에 책임져야 하지만 그가 한 말 속에서 서약된 것에 책임질 수는 없다. 번역 속에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번역자는 의미하지 않고 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울러 번역자는 자신이 말하는 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책임져야 하며 그 임무는 원래 말하는이가 말하려는 것을 말한다는 서약으로부터 시작된다. 번역자의 책임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철회한다는 약속에 있다. 설령 그가 우선 말하는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찾고 해석해야 할지라도. 그래서 번역자는 해석자이기도 하다. (...)

번역자는 말하는이의 발화를 듣거나 읽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틀림없이 듣는이다. 하지만 말하는이가 그를 향해 말하거나 쓴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말하는이의 발화행위에 대한 듣는이는 번역자가 있는 장소에 위치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듣는이는 항상 번역행위와는 관계없는 다른 곳에 있다. 번역자는 동시에 듣는이이자 듣는이가 아닌 것이다. 즉 말하는이가 번역자에게 말하거나 쓰는 일은 있어도 번역자에게 '당신'이라고 말을 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또는 만약에 번역자에게 '당신'이라고 말을 걸었다면 번역자가 통역해주어야 할 상상의 청중은 말하는이의 발화행위를 직접 듣는 자가 될 수 없다. 그때 청중들은 제3자, 즉 '그들'로 다시 지시될 것이다. 비슷한 선언적(選言的) 분리(disjunktion)는 번역자의 번역이라는 발화행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번역자는 청중을 향해 말하거나 쓰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그는 틀림없이 말하는이다. 하지만 번역 속에서 듣는이를 향해 말하거나 쓰는 사람은 번역자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번역자에 의해 발화되는 '나'는 번역자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원래의 발화행위 주체인 원래의 말하는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만약 '나'가 이차적인 번역의 발화행위 주체를 지시하는 경우 원래의 말하는이를 '그'라고 지시해야 될 것이다. (59,60)

"나는 그날 날씨가 좋았다고 그가 말했다고 말한다."(I say that he said that it was fine that day.) 이렇듯 번역의 발화행위에서 모든 발화는 " ' "......"라고 원래의 말하는이가 말했다'라고 나는 말한다"라는 식의 이중의 틀짜기를 통한 인칭지시를 수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번역자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해야 하며 그의 발화행위는 필연적으로 모방이라는 발화행위가 된다. 나아가 번역자는 발화행위를 통한 주어/주제/주관/주체(subjectivity)의 구성과정에서 작동하는 틀짜기를 눈에 보이게 한다.
번역이라는 발화행위에서는 발화행위의 주체와 발화된 말의 주어가 일치할 거라고 예상하지 않는다. 번역의 발화행위에서 번역자의 욕망은 완전히 분산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치환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번역자는 직설적으로 '나'나 '당신'으로 명시될 수 없다. 그는 말하는이와 듣는이의 관계를 1인칭과 2인칭이 마주보는 관계로 만들려는 시도를 방해하는 것이다. 에밀 뱅베니스트가 신봉한 '인격'(인칭)의 정의, 즉 그가 '이야기' 또는 '역사'와 구별해서 '담론'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자와 그것을 듣는 자만이 인격(인칭)으로 불릴 수 잇으며 이야기/역사 속에서 '그' 또는 '그들' 이라는 자격으로 언급되거나 이야기되는 자들은 '인격'(인칭)일 수 없다는 정의에 따르면, 말하는이와 번역자와 듣는이가 동시에 인격(인칭)일 수는 없다. 번역자는 인칭체계를 혼란시키지 않고서는 1인칭일 수도 2인칭일 수도 없으며 심지어는 3인칭일 수도 없는 것이다. 번역자는 푸코가 말하는 '담론'에서는 존재할 수 있지만(나는 푸코의 담론을 분명히 반(反)인격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뱅베니스트의 '담론'처럼 인격주의적 담론 이해에서는 번역자의 위치가 과도기적이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발화위치가 처음부터 탈인격화되어 있는 푸코에 의한 담론의 정식화 덕분에 우리는 이해의 지평이라는 해석학적 문제틀을 생략할 수 있다.) 불가피하게 번역은 말하기.쓰기.듣기.읽기의 행위체들 사이에 상정된 인격(인칭)적 관계 속에 이접적 불안정성을 도입하는 것이다. 말하는이/듣는이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인격(인칭)적 관계에 대해서도 번역자는 내적으로 분열되고 복수화되어 있으며 안정적 위치를 결여하고 있다. 기껏해야 그는 환승 중인 주체일 수 있을텐데 그도 그럴 것이 첫째로 번역자는 번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비분할체(individuum)라는 의미에서의 '개인'(individual)일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로 번역은 비연속적인 단독점에서 연속성을 만드는 실천이지만 번역자는 사회적인 것 속에서 포착하기 어려운 비연속적인 점을 표시하는 단독자이기 때문이다. 번역이란 비연속의 연속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약분불가능성의 장소에서 관계를 만드는 제작적(poietic) 사회실천이다. 우리가 번역을 전달의 한 형태로 규정하려 할 대 번역에 내재하는 비연속성이라는 측면이 완전히 은폐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 나는 번역에서의 인격(인칭)의 진동 또는 비한정성이라고 언급해왔다. (61,2)

번역에서의 인격(인칭)의 진동 또는 비한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나는 생각한다'의 아포리아적인 시간성과의 유비(analogy)로 생각할 수 있는 번역의 시간성을 지워버림으로써 우리는 번역을 번역의 표상으로 치환해버리고 만다. 번역의 표상 안에서만 우리는 마치 대화가 소통 모델을 따라서 일어나야 하는 것처럼 어떤 메시지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또는 한 사람과 또 다른 사람 사이나 한 집단과 또 다른 집단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로 번역의 과정을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의 표상은 민족이라는 주체 또는 국민이라는 주체의 표상을 가능하게 하며, 늘 사이에 있는 번역자의 현전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이제 차이나 반복이 아니라 표상으로서 하나의 언어통일체를 다른 언어통일체와 (그리고 하나의 '문화'통일체를 다른 문화통일체와) 대립시켜서 정립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번역의 표상은 반복에서의 차이를 두 가지 종(種)적 동일성 사이의 종적 차이(diaphora)로 변환하고 국어라는 상정된 통일체를 구성할 수 있게 하며 그럼으로써 처음에 존재한 차이와 약분불가능성을 종적인, 즉 약분가능하고 개념적인, 언어 일반의 연속성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특수한 언어 사이의 차이로서 다시 기입하는 것이다. 이 치환의 결과 번역은 두 개의 완전히 형성된, 다르지만 비교할 수 있는 언어공동체 사이의 전달의 한 형식으로 표상된다. (64)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