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티온의 제논(기원전333-262)
- 생활정보
- 2007. 5. 9. 17:09
제논은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기원전 333년 키티온에 있는 키퍼른 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테네로 가서 퀴니코스 학파의 크라테스, 메가라 학파의 스틸포와 도이도로스 및 Akademiker 폴레몬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기원전 300년부터 그 자신이 직접 아테네의 시장 위쪽에 있던Bunten Saeulehalle(Stoa poikile)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랑식 홀 때문에 그의 학파가 스토아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위대한 스승은 우리에게 몇 몇 저작을 남겨주었다. 그는 기원전 262년 자살했다.
그의 제자들이 학파를 계속해서 이끌었고,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헬레니즘 세계 전체로 세력을 확장했다. 스토아학파는 퀴니코스 학파의 전통에서,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전통에서 사유했다. 그들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물었고, 삶의 행복이란 언제나 덕의 실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에 도달했다. 우리의 신적인 이성은 우리 삶의 비이성적 충동horme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덕에 알맞은 삶은 우리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이 없는 상태로 이끌어준다.
덕과 도덕적인 삶은 우리의 이성을 통찰함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조화로운homologoumenos'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삶에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무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그러한 목표만을 우리의 행위 속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의 능력에 합치해야 한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한 사람은 내적인 평화, 즉 균형과 조화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이다. 삶의 행복이란 지혜로운 자들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성취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얻고자 힘쓴다면 우리는 삶의 행복한 흐름과 조화로운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설정한 목적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깊은 불행을 느끼게 된다. 그는 모순되는 감정들에 의해 이리저리 찢기는 것이다. 감정pathos은 삶의 균형있는 흐름을 파괴하는 흥분상태를 유발한다. 그러므로 지고의 행복이란 우리의 이성을 통해 충동을 지배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따라서 충동들로부터의 자유apatheia를 추구한다.
우선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행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phantasia은 우리 안에 어떤 충동을 일깨운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성이 동의해야만 우리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내적 충동이 너무 강해지면 이성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충동은 영혼의 비이성적 운동으로 간주된다. 이 충동들에 속하는 것으로는 쾌락과 불쾌, 공포와 욕망이 있다. 모든 충동은 선과 악에 대한 상상 혹은 표상을 통해서 발생한다.
쾌락체험을 할 때 우리는 확대를 경험하고, 불쾌한 체험에 있어서는 영혼의 수축을 경험한다. 욕망을 할 때는 영혼이 앞으로 뻗어가며, 공포를 느끼면 축소된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모두 무시한다면, 현명한 사람은 완전한 지복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외부세계의 사물들이 거의 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현명한 이는 언제나 정직한(올바른) 이성 안에서 훈련한다. 삶에서 외부에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에 속하는 것으로는 부와 빈,곤 건강, 사회적 지위가 있다. 그러나 삶의 일에 대한 우리의 내적 태도에 고나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가 있다. 우리가 부자이건 가난하건 간에 상관없이. 그러므로 노예가 자신의 주인에게 복속되어 있다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참되고 가치있는 것을 우리는 오직 영혼 속에서만, 다시 말해 삶의 실제적인 가치관계에 대한 통찰phronesis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제 덕이 이러한 통찰 안에 존립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누구나 배울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된다. 삶의 최고 목적은 지복이다. 그리고 덕은 그 행복에 이르기 위한 최고의 도구이다. 삶의 행복은 내적인 평화와 영혼의 균형(상태) 안에 존재한다. 우리가 덕 그 자체를 위해서 덕을 얻으려 애쓴다면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해 이로운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그런데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삶이 흘러가는 그대로 둔다.
모든 인간의 충동은 생의 자기보존을, 특히 쾌락획득을 향한다. 각자가 스스로를 돌봄으로써 그로부터 올바른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다. 현명함에 이르는 길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사이에 더 이상 어떤 위계서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구별은 다만 삶의 일에 대한 내적인 태도에 있어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과 동료인간을 속이지 않는다. 그는 내적으로 풍요롭고 아름답고 자유로우므로 외부의 악이 그를 해칠 수 없다.
우리의 사유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지각으로부터 우리는 표상을 형성하,고 이 표상을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한다. 같은 종류의 수많은 기억들로부터 우리는, 기억에 있어서의 공통된 것들을 보존하고 있는 보편적 표상으로서의 개념을 형성한다. 우리는 개념들을 가지고서 미래의 감각적 경험들을 선취한다. prolepsis 그렇게 우리는 이성을 매개로 개념을 형성하고, 인식은 진보한다. 이성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요인이다.
전체세계는 질료적인 것hyle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용하고 작용받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 또한 가장 미세한 질료적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신체는 질료와 이성logos에 의해 규정된다. 질료는 작용을 수용하는 힘인 반면, 영혼은 작용을 가하는 힘으로 표현된다. 세계는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또한 소멸하는(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불에서 공기가, 공기에서 물이, 물에서 땅이 생겨났다. 종국에 세계는 거대한 근원불Urfeuer로 합쳐지게 된다.
인간의 영혼도 질료적인 것인데, 그것은 따뜻한 숨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혼은 세 가지 능력, 즉 표상, 충동, 이성의 능력을 갖는다. 이로써 영혼은 정재(현존재)의 최고의 목적이 된다. 그것은 신의 세계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전체세계는 신의 예정pronoia에 의해 다스려진다. 근본적으로 하나의 신만이 있고, 그는 모든 사물 속에서 작용하는 세계이성과 동일하다.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을 따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제한된다.
그의 제자들이 학파를 계속해서 이끌었고, [그래서] 스토아학파는 헬레니즘 세계 전체로 세력을 확장했다. 스토아학파는 퀴니코스 학파의 전통에서,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전통에서 사유했다. 그들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물었고, 삶의 행복이란 언제나 덕의 실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에 도달했다. 우리의 신적인 이성은 우리 삶의 비이성적 충동horme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덕에 알맞은 삶은 우리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이 없는 상태로 이끌어준다.
덕과 도덕적인 삶은 우리의 이성을 통찰함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조화로운homologoumenos'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삶에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무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그러한 목표만을 우리의 행위 속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의 능력에 합치해야 한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한 사람은 내적인 평화, 즉 균형과 조화 속에서 삶을 사는 것이다. 삶의 행복이란 지혜로운 자들에게 있어서는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성취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얻고자 힘쓴다면 우리는 삶의 행복한 흐름과 조화로운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설정한 목적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깊은 불행을 느끼게 된다. 그는 모순되는 감정들에 의해 이리저리 찢기는 것이다. 감정pathos은 삶의 균형있는 흐름을 파괴하는 흥분상태를 유발한다. 그러므로 지고의 행복이란 우리의 이성을 통해 충동을 지배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따라서 충동들로부터의 자유apatheia를 추구한다.
우선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행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phantasia은 우리 안에 어떤 충동을 일깨운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성이 동의해야만 우리는 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내적 충동이 너무 강해지면 이성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충동은 영혼의 비이성적 운동으로 간주된다. 이 충동들에 속하는 것으로는 쾌락과 불쾌, 공포와 욕망이 있다. 모든 충동은 선과 악에 대한 상상 혹은 표상을 통해서 발생한다.
쾌락체험을 할 때 우리는 확대를 경험하고, 불쾌한 체험에 있어서는 영혼의 수축을 경험한다. 욕망을 할 때는 영혼이 앞으로 뻗어가며, 공포를 느끼면 축소된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모두 무시한다면, 현명한 사람은 완전한 지복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외부세계의 사물들이 거의 혹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현명한 이는 언제나 정직한(올바른) 이성 안에서 훈련한다. 삶에서 외부에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에 속하는 것으로는 부와 빈,곤 건강, 사회적 지위가 있다. 그러나 삶의 일에 대한 우리의 내적 태도에 고나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가 있다. 우리가 부자이건 가난하건 간에 상관없이. 그러므로 노예가 자신의 주인에게 복속되어 있다 할지라도 내적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참되고 가치있는 것을 우리는 오직 영혼 속에서만, 다시 말해 삶의 실제적인 가치관계에 대한 통찰phronesis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제 덕이 이러한 통찰 안에 존립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누구나 배울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된다. 삶의 최고 목적은 지복이다. 그리고 덕은 그 행복에 이르기 위한 최고의 도구이다. 삶의 행복은 내적인 평화와 영혼의 균형(상태) 안에 존재한다. 우리가 덕 그 자체를 위해서 덕을 얻으려 애쓴다면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해 이로운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그런데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그런 까닭에 자신의 삶이 흘러가는 그대로 둔다.
모든 인간의 충동은 생의 자기보존을, 특히 쾌락획득을 향한다. 각자가 스스로를 돌봄으로써 그로부터 올바른 행위가 일어나는 것이다. 현명함에 이르는 길 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 사이에 더 이상 어떤 위계서열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구별은 다만 삶의 일에 대한 내적인 태도에 있어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과 동료인간을 속이지 않는다. 그는 내적으로 풍요롭고 아름답고 자유로우므로 외부의 악이 그를 해칠 수 없다.
우리의 사유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지각으로부터 우리는 표상을 형성하,고 이 표상을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한다. 같은 종류의 수많은 기억들로부터 우리는, 기억에 있어서의 공통된 것들을 보존하고 있는 보편적 표상으로서의 개념을 형성한다. 우리는 개념들을 가지고서 미래의 감각적 경험들을 선취한다. prolepsis 그렇게 우리는 이성을 매개로 개념을 형성하고, 인식은 진보한다. 이성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요인이다.
전체세계는 질료적인 것hyle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용하고 작용받는 것만이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 또한 가장 미세한 질료적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신체는 질료와 이성logos에 의해 규정된다. 질료는 작용을 수용하는 힘인 반면, 영혼은 작용을 가하는 힘으로 표현된다. 세계는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또한 소멸하는(덧없는) 것이기도 하다. 불에서 공기가, 공기에서 물이, 물에서 땅이 생겨났다. 종국에 세계는 거대한 근원불Urfeuer로 합쳐지게 된다.
인간의 영혼도 질료적인 것인데, 그것은 따뜻한 숨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혼은 세 가지 능력, 즉 표상, 충동, 이성의 능력을 갖는다. 이로써 영혼은 정재(현존재)의 최고의 목적이 된다. 그것은 신의 세계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전체세계는 신의 예정pronoia에 의해 다스려진다. 근본적으로 하나의 신만이 있고, 그는 모든 사물 속에서 작용하는 세계이성과 동일하다.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을 따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제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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