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한나 아렌트(1906-1975)
- 생활정보
- 2007. 8. 21. 01:38
이 정치참여적인 여류 사상가는 이른바 히틀러의 제 3 제국의 집단학살의 충격을 표현했다. 마르부르크, 프라이부르크,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녀의 스승은 하이데거, 야스퍼스, 후설, 그리고 불트만이었다. 1928년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에 있어서 사랑의 개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33년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이후 다시 미국으로 갔다. 거기서 그녀는 독일어권 이민자의 신문인 <<건설>>의 공동작업자로 일했고, 이후에는 출판사와 유태 문화 재건협회에서 활동했다. 끝으로 프린스턴, 하버드, 시카고, 그리고 뉴욕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1951년에는 그녀의 주저 <<전체주의 지배의 요소와 원천>>이 출간되는데, 이 책에서 그녀는 2차대전과 계획된 대량학살, 그리고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경험들을 철학적으로 서술했다. 그녀는 국민국가의 성립과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확장에서 이미 근대의 반유태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유태인에 대한 혐오는 정치적 행위에 대한 점증하는 불투명성과 행정, 의회, 그리고 자유 자본 간의 애매한 관계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유태인들의 증가하는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부를 통해 유태인들은 정치적 적개심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유태인들이 시민적 문화에 동화되어 갔고, 유럽적이고 기독교적인 생활형식에 대한 이제까지의 경계선을 버렸다. 정치적 권력에 대한 자발적 거리두기에 의해 반유태주의를 이해하고 이에 대해 답할 능력을 잃게 되었다. 정치적 결함으로서 그들은 고유한 대표자도 없이 사회적 역할을 하도록 떠밀렸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으로 살았으며 국가와 사회 간에 존재하는 긴장을 너무 늦게 인식하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정치적 권력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수많은 유태계 교양시민들이 이 시기에 보편적 휴머니즘으로 피해갔다.
서유럽의 시오니즘에서 이른바 유태인문제의 실체는 부인할 수 없게 되었고, 이 운동은 약화되면서 반유태주의에 작용했다. 그렇지만 국민의 권리 상실은 대부분의 유태인들에게는 인간의 권리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를 의미했다.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을 통해서 비로소 유태민족의 국민적 권리가 회복되었다. 물론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유태인들은 앵글로 색슨족들의 제국주의와 협정을 맺어야 했다. 그들은 정복하고 식민지로 만든 영토로 이주했고, 그리하여 이 땅에서는 80만 아랍인들이 쫓겨나야 했다. 이제 이 쫓겨난 자들은 권리도 국가도 없는 자들이 되었다.
처음에 아렌트는 다른 유태인 사상가들(부버, 숄렘, 콘)과 함께 1948년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비판했는데, 그녀는 보편주의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태인들이 여러 국가들에서 집을 두고 살며 보호받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녀는 이스라엘 국가가 전세계에서 박해받은 유태인들에게 고향과 보호를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인정했다. 전체주의에 대한 저작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스탈린주의적 체계를 분석한다. 그녀는 자신의 역사적 분석을 통해 러시아에서 볼세비키의 정치적 봉기가 어떻게 성공했으며 부농들이 왜 박해받았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이를 독일에서의 나치 확산에 비교시킨다.
전체주의적 지배 하에 문화적으로 동화된 유태인들은 신속히 희생자의 역할을 맡게 되지만, 그들은 이 역할에 대해 너무 늦게 인지하였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국가 건설은 유태인들의 자기보호에 결부되는 것이다. 그러나 희생자의 박해 속에서 그녀는 일반적으로 전체주의적 정치권력과 반대되는 개인의 무기력을 보았다. <<활동적 삶>>이라는 저작에서 정치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철학을 전개시킨다. 삶의 근본조건들에 대해 섬세하게 숙고하는 철학자는 공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는 결코 정치의 영역을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으로 사유하는 동료인간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그녀의 철학적 구상은 개인에게 자유와 자기전개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적 결정론과 분명히 구별된다. 그렇지만 그녀는 인간의 죽음에 의한 소멸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극적 이론을 따르지는 않는다. 이 이론에서는 무책임한 일반화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녀는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전쟁과 싸움, 죽음의 신화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펼쳐가고 싶어한다고 확신했다. 이 점에서 그녀는 삶에 가까운 실존주의를 택한다. 야스퍼스의 이론은 나치주의자 하이데거의 사변보다 그녀에게 더 친근한 것이었다.
아렌트는 자신의 사유로써는 결코 유태문화의 무거운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운명에 대한 강력한 관련이 자기규정적인 인간의 자율성을 심하게 제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렌트는 유태 역사의 무게에 의해 돌아오게 될 경우 그녀의 현존이 위험하게도 뿌리뽑혀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녀는 홀로코스트와 전쟁 후에도 살아남은 자로서 수많은 유태인들과 함께 내버려지고 고향을 잃어버린 상태를 표현하기를 원했고 종교 안에서 성급한 위로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저작에서는 유태인 위원회가 홀로코스트의 집단학살에 능동적으로 동조했다고 주장했고, 이는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적 이론으로 사유했던 까닭에 그녀는 이 세계 안에서 악에는 고유한 존재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악의 야만성"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그녀에게 홀로코스트를 과소평가한다는 비난을 초래했다. 그녀는 선한 의지와 행위 속에서 삶을 원하는 인류의 목소리를 들었고, 악한 의지와 행위 속에서는 인간의 공동체가 깨어진다고 보았다. 신플라톤주의적 사유모델로써는 대량학살의 문화충격이 파악될 수 없고, 그래서 아렌트는 모순적 사상가로 남게 되는 것이다.
1951년에는 그녀의 주저 <<전체주의 지배의 요소와 원천>>이 출간되는데, 이 책에서 그녀는 2차대전과 계획된 대량학살, 그리고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경험들을 철학적으로 서술했다. 그녀는 국민국가의 성립과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의 확장에서 이미 근대의 반유태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유태인에 대한 혐오는 정치적 행위에 대한 점증하는 불투명성과 행정, 의회, 그리고 자유 자본 간의 애매한 관계를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유태인들의 증가하는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부를 통해 유태인들은 정치적 적개심의 표적이 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유태인들이 시민적 문화에 동화되어 갔고, 유럽적이고 기독교적인 생활형식에 대한 이제까지의 경계선을 버렸다. 정치적 권력에 대한 자발적 거리두기에 의해 반유태주의를 이해하고 이에 대해 답할 능력을 잃게 되었다. 정치적 결함으로서 그들은 고유한 대표자도 없이 사회적 역할을 하도록 떠밀렸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으로 살았으며 국가와 사회 간에 존재하는 긴장을 너무 늦게 인식하게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정치적 권력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수많은 유태계 교양시민들이 이 시기에 보편적 휴머니즘으로 피해갔다.
서유럽의 시오니즘에서 이른바 유태인문제의 실체는 부인할 수 없게 되었고, 이 운동은 약화되면서 반유태주의에 작용했다. 그렇지만 국민의 권리 상실은 대부분의 유태인들에게는 인간의 권리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를 의미했다.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을 통해서 비로소 유태민족의 국민적 권리가 회복되었다. 물론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유태인들은 앵글로 색슨족들의 제국주의와 협정을 맺어야 했다. 그들은 정복하고 식민지로 만든 영토로 이주했고, 그리하여 이 땅에서는 80만 아랍인들이 쫓겨나야 했다. 이제 이 쫓겨난 자들은 권리도 국가도 없는 자들이 되었다.
처음에 아렌트는 다른 유태인 사상가들(부버, 숄렘, 콘)과 함께 1948년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비판했는데, 그녀는 보편주의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태인들이 여러 국가들에서 집을 두고 살며 보호받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그녀는 이스라엘 국가가 전세계에서 박해받은 유태인들에게 고향과 보호를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인정했다. 전체주의에 대한 저작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스탈린주의적 체계를 분석한다. 그녀는 자신의 역사적 분석을 통해 러시아에서 볼세비키의 정치적 봉기가 어떻게 성공했으며 부농들이 왜 박해받았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이를 독일에서의 나치 확산에 비교시킨다.
전체주의적 지배 하에 문화적으로 동화된 유태인들은 신속히 희생자의 역할을 맡게 되지만, 그들은 이 역할에 대해 너무 늦게 인지하였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국가 건설은 유태인들의 자기보호에 결부되는 것이다. 그러나 희생자의 박해 속에서 그녀는 일반적으로 전체주의적 정치권력과 반대되는 개인의 무기력을 보았다. <<활동적 삶>>이라는 저작에서 정치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철학을 전개시킨다. 삶의 근본조건들에 대해 섬세하게 숙고하는 철학자는 공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는 결코 정치의 영역을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으로 사유하는 동료인간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그녀의 철학적 구상은 개인에게 자유와 자기전개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적 결정론과 분명히 구별된다. 그렇지만 그녀는 인간의 죽음에 의한 소멸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극적 이론을 따르지는 않는다. 이 이론에서는 무책임한 일반화가 보인다는 것이다. 그녀는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전쟁과 싸움, 죽음의 신화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펼쳐가고 싶어한다고 확신했다. 이 점에서 그녀는 삶에 가까운 실존주의를 택한다. 야스퍼스의 이론은 나치주의자 하이데거의 사변보다 그녀에게 더 친근한 것이었다.
아렌트는 자신의 사유로써는 결코 유태문화의 무거운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운명에 대한 강력한 관련이 자기규정적인 인간의 자율성을 심하게 제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렌트는 유태 역사의 무게에 의해 돌아오게 될 경우 그녀의 현존이 위험하게도 뿌리뽑혀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녀는 홀로코스트와 전쟁 후에도 살아남은 자로서 수많은 유태인들과 함께 내버려지고 고향을 잃어버린 상태를 표현하기를 원했고 종교 안에서 성급한 위로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저작에서는 유태인 위원회가 홀로코스트의 집단학살에 능동적으로 동조했다고 주장했고, 이는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적 이론으로 사유했던 까닭에 그녀는 이 세계 안에서 악에는 고유한 존재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악의 야만성"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그녀에게 홀로코스트를 과소평가한다는 비난을 초래했다. 그녀는 선한 의지와 행위 속에서 삶을 원하는 인류의 목소리를 들었고, 악한 의지와 행위 속에서는 인간의 공동체가 깨어진다고 보았다. 신플라톤주의적 사유모델로써는 대량학살의 문화충격이 파악될 수 없고, 그래서 아렌트는 모순적 사상가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을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