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1465-1536)

네덜란드의 이 인문주의자는 1469년에서 1536년까지 살았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교육을 Deventer에서 받았다. 그 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Chorherren의 슈타인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파리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영국에서 여러 해를 보냈으며 여기서 토마스 모어와 John Colet를 알게 되었다. 그런 후에 더 오랜 시간을 Loewen과 이탈리아에서 연구하며 지냈다. 철학적 저술가로서 수많은 시대비판적 글들과 풍자적인 글들을 썼다. 루터가 제국의 교회와 싸울 때 그는 중재를 하고자 했다. 생애 말년에는 바젤에 살았으며, 여기서 숨을 거두었고 시신이 안치되었다.

그는 그리스어로 된 신약을 편집했으며, 교부들의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전체 기독교 문화는 개방적이고 학습가능한 것이라는 인문주의적 사유를 통해 번역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오직 이성적 비판을 통해서만 우리는 널리 퍼진 미신과 도덕적 타락상을 줄여갈 수 있다. 우리에게는 보편적 인류의 문화가 가능해질 것인데, 이 문화는 두 개의 기둥, 즉 고대 철학의 윤리학이라는 기둥과 신약성서의 윤리학이라는 기둥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인간을 위한 "복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종교는 비판적인 철학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보편적 인간성의 복음은 우리 인간을 위해 신이 내려준 영감이다. 우리는 종교와 철학이 밀접하게 함께 작동하는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한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종교가 미신과 맹목적 열광, 그리고 도덕적 교만함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종교가 정직한 이성의 비판에 종속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성은 모든 종교의 학설과 교리들을 시험해 보아야 하며, 스콜라 철학의 오래된 껍질은 깨어지게 된다. 종교에게도 절대적 진리를 요구할 권리와 신앙에 대한 독점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또한 낯선 종교를 이해하고 관용해야 한다.

종교의 쇄신은 한편으로는 성서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 철학으로부터 유래한다. 이로써 에라스무스는 오직 성서에 의하여 종교를 쇄신하려 한 마르틴 루터와 결정적인 대립각을 세우는 적대자가 된다.  르네상스의 낙관적이고 감각적인 인간상으로써 육체를 억압하는 금욕적인 교리를 벗어버리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원죄에 대한 교설은 신의 창조의 아름다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인문주의의 새로운 인간성의 문화는 철학자 키케로에게서 배우고자 하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복음에 정향되어진 채로 머무르고자 한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고대의 문화와 철학의 정신에 의해 종교를 개혁하고자 한다. 마르틴 루터가 철학을 거부하고 논증에 있어서 속된 문체를 쓰는 것을 에라스무스는 유감스러워 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를 위장한 "이교도"요, 성서를 거역하는 자로 간주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인문주의가 계몽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전했을 것으로 보았다. 에라스무스가 더 나은 종교개혁가였고, 루터는 이 발전과정을 백년 정도 후퇴시켰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동시대 신학자들과 강단철학자들의 교만한 어리석음을 비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학설의 부족함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본질적인 것, 영원한 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근본통찰로 되돌아가야 했다. 배움의 과정이란 늘 본래적인 어리석음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다(어리석음에 대한 찬양).

철학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웃도록 자극해야 한다. 그는 군주의 지배를 "관리"로 보았다. 그들은 본성상 자유로운 인간들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았을 뿐이다. 민중은 군주로부터 다시 권력을 빼앗아 올 수 있다. 국가는 민중의 복지에 신경써야 한다. 군주는 국가를 관리하는 것이며, 민중은 지배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군주가 지혜와 덕으로 이끈다면 군주제는 가장 인간적인 국가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군주가 민중에 의해서 선출된 경우에만 민중은 이 선택을 철회할 수 있다.

온건한 군주제는 분배적 정의에 주의를 기울인다. 모든 인간은 국가 안에서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받아야 한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정당한 전쟁"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모든 전쟁은 인간성에 반하는 무거운 악이요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전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재에 앉아있는 이들만이 전쟁을 찬양한다. 어떤 종교라도 자기들의 근원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전쟁을 요구할 수 없다.

철학은 인간을 "세계시민"으로 만들어준다. 철학만이 민족적 우월감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받은 자들은 전세계를 자신의 조국으로 바라본다. 민족들이 서로 싸우는 데에는 어떤 이성적인 의미도 있을 수 없다. 학문에 대한 경멸은 수도사와 개혁가들의 어리석음이다. 루터에 반하여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했다. 철학을 경시하고 천박한 언어를 썼던 까닭에 종교개혁은 에라스무스에게 재앙이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안목과 객관적 논증으로써 종교와 문화의 개혁을 추구했다. 이성이 인간을 만들고, 교육은 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기꺼운 마음으로 배운다. 그러므로 교육자는 젊은이들에게 도덕적 모범이 되어야 한다. 경건한 인간은 경의심을 가지고 신의 창조물을 바라보며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고 삶을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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