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모제스 멘델스존(1729-1783)

이 계몽주의 사상가는 1729년 데사우에서 태어났고 베를린에서 교육받았다. 탈무드와 수학을 공부했다.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마지막에는 직물회사의 주주로 일했다. 레싱과의 안면을 통해 베를린 계몽주의자 서클에 받아들여졌다. 레싱은 자신의 희곡<<현자 나탄>>에서 그를 기리기도 했다.

레싱처럼 멘델스존도 그 신봉자들이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더 큰 관용을 베풀도록 가르치는 종교의 이성적인 형식을 원했다. <<패돈 혹은 영혼의 불멸성>>과 <<새벽녘 혹은 신의 존재에 대한 강의들>>에서 그는 모제스 벤 마이몬의 이론을 계승하고 있다. 유태 종교도 유럽 계몽주의의 원리와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신의 기적에 대한 소박한 믿음은 포기되어야 한다.

인격적인 신의 활동에 대한 표상과 영혼의 불멸 및 죽음 이후 내세에서의 심판에 대한 믿음은 전적으로 비판적 사유에 완전히 부합된다. 1763년에 그는 <<형이상학에서의 명증성에 대한 논고>>로 칸트를 누르고 베를린 학술원의 상을 받는다. 유태신앙에 대한 확신 속에서 살았으며, 도덕에서의 온유, 인내, 부드러운 용기와 관용을 옹호했다.

그래서 그는 독일 계몽주의의 이념을 유태교에 접근시키려 했다. 모제스 벤 마이몬의 책 다섯 권을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문자로 출간했다. 랍비들은 이를 신성문자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다. 복음주의 신학자 J. K. 라바터는 그와 격렬히 대립했다. 멘델스존은 <<예루살렘 혹은 종교 권력과 유태교에 대하여>>(1783)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그가 보기에 유태교는 비판적 사유의 결과들과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시내산에서 계시된 율법과 이에 결부된 신앙의 진리는 철저히 이성적이며, 모든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이 영원한 진리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보편적 계명과 율법, 그리고 생활규범들이 계시되었다. 그러나 조물주는 이 통찰들을 자연의 언어로 모든 인간에게 계시한다. 유태인들에게 이것은 말과 문자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오직 유태민족만이 실제 삶에서 이른바 "제사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유태 신앙의 본질은 이론적으로 정초될 수 없는 실제 삶 속에서 존립하는 것이다.

이성종교는 유태적 제사종교를 따라야 하는 데 대한 이론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오랫동안 종교와 문화의 보편적인 선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결코 아버지들의 교리로부터 벗어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유태교의 율법은 인간의 오성을 신의 진리로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삶과 교리, 관찰과 행동을 결합시킨다.

후에 멘델스존은 이성을 통해 정초된 자신의 낙관주의를 다소간 상대화해야 했다. 칸트는 기독교도 유사한 길을 갈것이며 신자들에게 완전한 양심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멘델스존은 근대에 있어서의 유태교의 본질에 대해 성찰했으며 여기에 이성적 토대를 부여했다. 이와 함께 유태교가 교회의 이성을 향해 정향되어 있는 한에서 유태교의 시민사회로의 통합에 대한 지지는 궤도를 벗어난다. 중부유럽에서의 이른바 "신정통주의"가 이러한 단초를 따르지만, "구정통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길을 철저히 거부한다.

이리하여 멘델스존은 계몽된 유태교의 선구적 사상가가 되었다. 그는 민중의 계몽에 기여하고자 했으며, 따라서 낡은 삶의 형식은 조금씩 변화되어야 했다. 모두가 자신의 직업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의복과 일상의 외적인 형식은 각각의 문화에 맞게 적용되어야 한다. 유태교는 특수한 방식으로 조물주에 의해 보호받아 왔고, 그래서 문화의 소멸과 몰락을 넘어 살아남은 것이다. 계몽된 유태교는 비이성적 전통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여자는 더 많은 권리를 가져야 한다.

이로써 유태 문화와 기독교 문화 사이에 새로운 공생이 가능해졌다. 둘 다 이성적 계몽의 통찰에 의해 정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서로 싸우지 않으며, 인간 예수와 메시아를 둘러싼 공방은 끝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계몽된 유태교는 유럽의 정신생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여러 믿음들 가운데 특수한 하나의 형식으로 보았다.

그래서 신정통파 유태인들은 고유한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유럽문화에 적응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정통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럽의 언어를 배웠고, 자연과학과 비판적 철학을 공부했다. 동시에 유태적 교양을 경시하지도 않았다. 또한 모든 인간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프랑스 혁명의 근본사상을 받아들였다.

서부와 중부 유럽의 유태인들은 조금씩 시민적 법 앞에서 완전한 평등권을 부여받았으며, 문화의 장벽은 더 낮아졌다. 유태인들도 국가와 공공 조직을 위한 의무를 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종교형태와 특수한 의식에 대한 권리는 지키고 있었다. 외적 표지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유태신앙의 가치들은 더 강력히 내면화되어야 했다. 그래서 유태교는 계몽적인 흐름과 보수적인 입장으로 나뉘어졌다.

이러한 분리는 오늘날에도 유태교 내부에 존속한다. 멘델스존은 이러한 이념을 유태문화 안으로 들여오고 이로써 강력한 혁신을 일으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근본적으로 인지적 배움의 과정을 강제하는 비판철학은 모든 종교와 문화를 위한 것이다. 멘델스존은 이러한 배움의 과정을 용감하게 진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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