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z Kafka

곰팡내가 나고 낡고 어두운 관방의 세계, 관료들과 서류함의 세계는 카프카의 세계이다.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빈손으로 남게 되는 충직한 슈발킨은 카프카의 작품에 나오는 K이다. 그리고 출입이 금지된 격리된 방에서 반수상태로 또 단정치 못한 모습을 하고 사위어 가고 있는 빠촘킨은 카프카의 경우 다락방 속의 판사나 아니면 성안에 거주하는 서기관과 같은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선조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할지라도 이미 전락해 버렸거나 아니면 전락하고 있는 자들이다. (S. 63)

다만 일상적인 것들이 지구와 같은 무게를 갖고 있을 따름이다. (S. 64)

부친은 형벌을 내리는 자다. 법원관리들의 경우처럼 죄가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 많은 부문이 관리들의 세계와 부친들의 세계가 카프카에게는 동일한 세계라는 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들의 유사성은 명예스러운 것이 못 된다. 둔감, 타락, 더러움이 이 유사성의 내용이다. 부친의 제복은 얼룩투성이다. 그의 내의는 더럽다. 더러움은 관리들의 생활의 일부이다. (S. 65)

일찌기 헤르만 코헨은 고대의 운명관을 잠깐 고찰하는 가운데 운명을 <어떤 불가피한 통찰, 즉 운명의 법칙들을 어기고 파괴시키는 것을 유발하고 야기시키는 듯이 보이는> 운명의 법칙 그 자체라고 불렀다.  K를 심판하고 있는 재판권도 이와 같다. (S. 66)

소송이란 비록 그들이 무죄판결을 받을 희망이 있다고 할지라도 절망적이다. 독특한 카프카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에게서 아름다움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무희망성인지도 모른다. (S. 67)

즉 카프카는 신화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대판 오딧세이로서의 카프카는 <먼 곳을 응시한는 그의 시선>에 의해 사이렌들의 유혹을 뿌리쳤던 것이다. <사이렌들은 이를테면 그의 결심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는 더이상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고대세계에서 카프카가 가지고 있는 선조들, 즉 우리가 나중에 만나게 될 유태인과 중국인의 선조들 가운데에서도 이 희랍의 선조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선조다. <<오딧세이>>는 그야말로 신화와 동화를 갈라놓는 문턱에 서 있다. 이성과 간계는 신화 속에 술책을 집어넣었다. 이로써 신화는 그 무적의 힘을 상실하게 된 셈이다. 동화는 바로 이러한 신화의 위력들을 이겨낸 승리에 관한 전래된 이야기이다. 그리고 카프카가 전설에 관해 쓰려고 했을 때 그가 썼던 것은 변증가들을 위한 동화였다. 그는 그 전설들 속에 조그만 트릭(책략)을 삽입하였다. (S. 69)

카프카의 사이렌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카프카의 경우 음악과 노래는 탈출의 표현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탈출의 보증, 다시 말해 조수들이 자기집처럼 살고 있는, 저 미숙하면서도 일상적이고, 또 위안을 주면서도 어리석은 중간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희망에 대한 보증을 뜻하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두려움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길을 떠나는 소년과 같다. (S. 70)

이러한 자연극장의 가장 중요한 기능들 가운데 하나는 사건을 제스쳐적인 것으로 해체시키는 데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해도 좋을 것이다. 즉 상당한 수효에 달하는 카프카의 소고와 이야기들은, 그것들을 이를테면 오클러호머의 자연극장 위에서 벌어지는 연기동작들로 옮겨놓고 보아야만 그 전모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카프카의 전 작품이 제스쳐들의 암호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들 제스쳐들은 처음부터 작가에게 어떤 확실한 상징적 의미를 지녔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자가 이들 제스쳐로부터 끊임없이 연관관계들을 변화시키고 실험적인 배치를 하면서 그러한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 극장은 그러한 실험적인 배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주어진 장소이다. (S. 72f)

도어벨 소리치고는 너무 큰 이 종소리가 하늘에까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카프카적인 인물들의 제스쳐는 일상적 주위세계에 대해서는 너무 강력하며 보다 넓은 어떤 세계로 뚫고 나가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대가다운 노련한 면모가 드러날수록 그만큼 그는 그러한 동작들을 일상적인 상황에 적응시키거나 아니면 그 동작들을 설명하는 일을 더 자주 피하고 있는 것이다. (S. 73)

어쨌든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인간사회에 있어서 삶과 노동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카프카는 그 조직이 그에게 불투명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한층 더 끈질기게 그것에 몰두하였다. 에르푸르트에서 있었던 괴테와의 유명한 대화에서 나폴레옹이 운명이라는 자리에 정치를 대신 설정하였다면, 이 말을 변형시켜 보자면 카프카는 조직이라는 것을 운명으로 정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S. 75f)

카프카는 자기자신을 위한 비유를 창작해내는 보기 드물 정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비유들은 설명이 가능한 것에 의해서 완전히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와는 반대로 그의 작품해석에 반대가 되는,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예비조치를 강구하였다. 우리는 그의 작품의 내부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또 의심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한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카프카가 이미 언급한 우화를 해석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카프카 특유의 읽는 방식을 유념해야만 한다. 그의 유언은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는 또 다른 하나의 예이다. 자신의 유고들을 소각시켜 달라고 한 카프카의 지시는 전후사정을 두고 보더라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법 앞에 서 있는 문지기의 답변들처럼 조심스럽게 따져보아야만 한다. 매일매일의 삶이 가져다 주는 풀기 어려운 행동방식과 해명하기 힘든 발언 앞에 서 있었던 카프카는 어쩌면 죽음을 통하여 적어도 자신의 동시대인들도 그와 동일한 어려움을 맛보도록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S. 77)

카프카의 세계는 세계라는 하나의 극장이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무대 위에 서 있는 자연존재이다. ... 구원이라는 것은 현존재에 덧붙여지는 프리미엄이 아니라 오히려 카프카가 말하고 있듯이 <그 자신의 앞이마의 뼈에 의해 길이 차단되고 있는> 어떤 한 인간의 마지막 출구인 것이다. (S. 78)

탈무드에 나오는 이 마을과 함께 우리는 바로 카프카의 세계의 한가운데에 있는 셈인데, 왜냐하면 마치 K가 성이 있는 산기슭의 마을에 살고 있듯이 현대인은 자신의 육신 속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그 육체는 현대인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또 현대인에 대해 적대적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갑충으로 변신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타향-그것은 그의 타향이다-이 그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마을의 공기가 카프카를 감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떤 종교의 창시자가 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있다. ... 이 마을의 공기 속에는 완성되지 않은 것들과 너무 익어버린 것들이 뒤섞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S. 80)

카프카의 저작을 근본적으로 잘못 해석해 버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자연적인 해석방법이 그 하나요, 초자연적인 해석방법이 다른 하나다. 두 가지 해석방법, 즉 심리분석적 방법과 신학적 방법은 모두 똑같이 본질적인 면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S. 81)

카프카의 단편과 장편소설에 나타나는 여러 모티브들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철저히 규명하는 일보다는 그의 유고인 비망록에서 사변적인 결론을 추론해 내는 일이 더 쉽기는 하다. 그러나 작품에 나타나는 모티브들만이 카프카의 창작을 지배하였던 전세적vorweltlich 힘들을 이해하는 관건을 제공한다. 이들 전세적 힘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 시대의 세속적인 힘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 힘들이 카프카 자신에게 어떠한 이름을 가지고서 나타났는지를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즉 그는 그 힘들의 정체를 몰랐고 또 그러한 힘들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랐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전세Vorwelt가 죄라는 형태로 그에 내미는 거울 속에서만 재판의 형태로 나타나는 미래를 보았을 뿐이다. ...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이야기들 속에서 서사성이 그 의미를 다시 획득하는 것은 미래를 연기시킨다는 세헤라자데의 입을 통해서이다. <<소송>>에서 연기한다는 것은, 만약 심리가 점차 판결로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피고의 희망이다. ... 카프카는 사물을 항상 제스쳐라는 형식을 통해서만 우화들의 모호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카프카의 작품은 그러한 제스쳐로부터 나오고 있다. (S. 82f)

문학을 교리로 전환시키고 또 우화로서의 문학에 견고성과 꾸밈없는 성격-그는 이러한 성격을 이성에 적합한 문학의 유일한 속성이라고 생각하였다-을 되돌려 주려고 한 그의 웅대한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 어떤 작가도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그보다 더 엄격하게 지키지는 못했다. (S. 83f)

카프카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인류 태초의 시간을 넘어서는 진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의 소설들이 움직이고 있는 곳은 늪의 세계이다. (S. 84)

<나는 경험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내가 탄탄한 육지에서 배멀미를 느낀 경험이라고 말할 때에도 그것은 농담으로 그러는 게 아니다.><<관찰>>의 첫부분이 그네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그나름의 까닭이 있다. 그리고 카프카는 경험들이 지니는 흔들림의 본성을 끊임없이 표현하고 있다. 개개의 경험은 모두 해이해져서는 그와 반대되는 경험과 뒤섞인다. ... 카프카적인 여인들이 나타나는 곳은 바로 그러한 경험의 늪에서이다. (S. 85)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이 K에게 무엇인가를 얘기할 것이 있을 경우 그 인물들은 그 얘기가 지극히 중요하거나 놀라운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며, 마치 그가 그것을 오래 전부터 줄곧 알고 있어야 했던 것처럼 얘기한다. 그리고 마치 새로운 내용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또 잊어버렸던 것을 기억해 내도록 주인공에게 슬쩍 요구하는 것처럼 얘기한다. 빌리 하스가 <<소송>>의 과정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하고자 했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정당하다. <소송의 대상, 즉 이 믿기 어려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망각이다. ... 자기자신을 망각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특성이다. ... 그 망각이 여기서는 피고라는 인물을 통해 말이 없는 형상이 되고 있다. 그것도 가장 강렬한 내적 심도를 가진 인물로.> <이 신비스러운 중심이 ... 유태교에서> 나왔다는 가능성은 좀처럼 부인하기가 힘들 것이다. 여기서 기억은 경건성으로서 매우 신비스러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호와가 회상한다는 사실, 정확한 기억을 <제 삼대, 제 사대까지>, 심지어 <제 백대>까지 간직한다는 사실은 그의 가장 심오한 특성이다. 儀式이라는 가장 성스러운 행위는 기억이라는 책으로부터 죄를 지워버리는 일인 것이다.
망각된 것은-이것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카프카의 작품의 문턱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결코 단지 개인적으로 망각된 것만은 아니다. 망각된 일체의 것은 전세에서 망각된 것과 혼합되고 또 그것은 불확실하며 변하기도 하는 수많은 결합물을 형성하면서 항상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낸다. 망각은 카프카에 있어서 하나의 저장창고이다. 바로 이 창고로부터 그의 이야기들 속에 등장하는 무진장한 중간세계가 밝은 바깥세게로 다투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S. 86)

어쨌든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생물들 가운데 동물들이 가장 사색을 많이 하고 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법 속에 부패가 있듯이 이들 동물들의 사고 속에는 불안이 있다. 불안이 상황을 망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그러한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S. 87)

이러한 카프카의 인물들은, 일련의 형상들을 길게 늘여 놓으면 결국 그러한 기형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꼽추와 연결된다. 카프카의 단편들에 나오는 제스쳐들 가운데 머리를 가슴 깊숙이 파묻고 있는 남자의 제스쳐만큼 자주 나타나는 것은 없다. (S. 88)

이 꼽추는 일그러진 생활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이다. 그는 메사아가 오면 사라질 것이다. 어느 위대한 랍비가 말했던 것처럼, 폭력으로서 세계를 변경시키려 하지 않고, 다만 세계를 조금 바로 잡게 될 그런 메시아가 오면 꼽추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S. 89)

실로 그들에게는 <망치질은 실제의 망치질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무이기도 한 것이다.>... 한 사람은 모든 것에 경악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 것에도 놀라지 않는 것이다. 인간들 상호간의 소외감이 최고조에 이른 시대, 불투명해진 관계가 인간의 유일한 관계가 되어버린 시대에 영화와 축음기가 발명되었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움직임을 알아보지 못하며, 축음기 속에서는 자신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것은 실험이 증명하고 있는 바다. 이러한 실험들 속에서 실험 대상이 되고 있는 인간의 상황이 카프카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그로 하여금 공부를 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S. 93f)

그는 자신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인가! 망각의 땅으로부터 불어오느 것은 폭풍이고, 공부라는 것은 그 폭풍을 막아내려는 기병의 전진이다. ... 하나의 인생에 비해 너무나 긴, 이 말타고 가는 행위는, 말을 타고 가기에는 너무나 짧은 인생과 서로 상응한다. (S. 94)

단지 연구되기만 하고 더 이상 실행되지 않은 법, 바로 이 법이 정의로 나아가는 문이다.
정의로 나아가는 문이 공부이다. (S.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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