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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낭만주의의 아들이다. 이러한 벤야민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그가 언어철학자라는 데에서 규정된다. 언어에 대한 그리고 언어를 통한 사유와 글쓰기가 벤야민의 전생애를 관통하는 활동이라는 사실에 근거하면, 그를 규정하는 많은 다른 레떼르들은 바로 그의 언어철학, 더 정확히는 언어형이상학과의 관계에 비추어 봄으로써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벤야민의 언어형이상학은 바로 전기낭만주의자들의 사유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것이 벤야민은 낭만주의의 아들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규정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벤야민의 다른 이름들-마르크스주의자, 유태신비주의자 등-을 단순히 언어형이상학의 파생물로 환원하는 것, 그리고 그의 언어형이상학을 전기낭만주의자들의 그것에로 남김없이 소급해 가는 것으로는 벤야민에 대한 서술이 형편없이 빈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벤야민 자신이 나이를 더해감에 따라 다채롭고 넓은 사유의 스펙트럼을 만들어 갔기 때문에 환원과 소급의 방법으로는 그에 대한 적절한 '언어'를 쓸 수가 없게 된다. 더구나 그러한 방법은 가장 反벤야민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그가 <<독일비극의 원천>> 중 <인식비판적 서문>에서 전개한 서술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인식은 일종의 소유함이다. ...소유함이란 이미 스스로 서술하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리는 바로 그 스스로 서술함에 통하는 것이다"

이념은 언어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올바른 서술을 통해 존재 속의 통일로 현현한다. 이 문장을,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완전히 명징한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벤야민은 "언어란 사물의 언어적 본질은 그것의 언어라는 사정을 갖는다"고 보았고, "언어 이론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문장을 동어반복의 기미까지 완전히 없앤 명징한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문장'이 이 연구의 출발점을 이룬다. 다시 말해 이 연구는 벤야민의 텍스트에 대한 분석을 통해 언어 이론에 대한 명징한 이해에 도달함을 목표로 삼는다. 아마 이 글은 벤야민이 의도한 서술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환원과 소급의 위험으로터 안전하지도 못할 뿐더러, 무엇보다 벤야민 사상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카발라에 대해서 전혀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은 아마도 벤야민이 이야기한 의미에서 하나의 '번역'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벤야민의 언어를 우리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벤야민에게서 "번역은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연속적으로 변주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추상적 동일성이나 유사성의 영역들이 아니라, 변주의 지속 그 자체가 바로 번역을 관통한다."

'변주의 지속', 이제 이것을 우리는 벤야민이라는 연구대상 안에서 추적해 볼 것이다. 추적의 궤도는 전기낭만주의자들의 언어철학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해서, 보들레르와 프루스트를 거쳐 카프카에 대한 벤야민의 비평적 에세이에 대한 분석으로 끝난다. 전기낭만주의자들에 대한 서술은 '어째서 벤야민이 낭만주의의 아들인가'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 줄 것이고, 벤야민의 비평에 대한 분석은 그 아들이 아버지(들)와는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서술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이 언어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 1부에서는 전기낭만주의자들, 즉 슐레겔과 노발리스의 언어철학과 이에 대한 벤야민의 관계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독일낭만주의에서의 비평의 개념>> 및 초기 언어관련 논문들을 중심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이 고찰에 있어서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전기낭만주의자들이 독일관념론에 대해 가지는 관계이다. 관념론과 낭만주의는 칸트가 제기한 근대적 문제틀 속에서 논쟁적으로 대립해 온 두 개의 주요한 흐름이며, 서로 간에 본질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관념론 가운데 특히 중요하게 다루어질 사상가는, 벤야민도 그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피히테이다. 물론 이에 앞서 18세기말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독일의 상황에 대해서 주요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나마 고찰해 봄이 필요할 것이다. 이때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인물이 있는데, 그는 바로 칸트와 동시대를 살았고 또한 칸트와 논쟁적인 입지에 섰던 신비주의자 요한 게오르크 하만이다. 하만의 언어에 대한 사유가 벤야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제 2부에서는 보들레르와 프루스트에 대한 벤야민의 비평적 에세이에 대한 분석이 시도된다. 모더니티의 수도로 형성되어 가던 19세기 중엽의 파리에 살았던 보들레르에 대한 벤야민의 비평은 많은 시사점-후기 저작인 파사젠베르크와의 관련에서 보면 특히 그러한데-을 주고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이 연구와 관련해 중요하게 다루어질 개념은 군중과 경험이다. 전기낭만주의에서의 예술과 언어에 대한 사유가 보들레르에 이르러 어떻게 변주되고 있으며, 벤야민이 이를 어떻게 간파해 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어렵고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이어서 보들레르보다 한 세대 뒤 역시-이제는 완성된 수도였던 도시-파리의 젊은 소설가 프루스테 대한 비평이 다루어진다. 이 비평에 있어서도 역시 변주는 연속되고 있는데, 이때 핵샘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은 '기억'이다. 기억의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철학자인 베르그송을 또한 벤야민은 다루고 있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베르그송과 프루스트의 기억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다르며, 또 벤야민은 이를 어떻게 전유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제 3부에서는 다른 누구보다 난해한 작가인 카프카에 대한 에세이를 살펴본다. 카프카는 "인간들 상호간의 소외감이 최고조에 이른 시대, 불투명해진 관계가 인간의 유일한 관계가 되어 버린 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가 자신에게 "공부를 하도록 지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벤야민에 의한 카프카와 그의 시대에 대한 이러한 규정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는 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다. 이러한 해명의 작업에 있어서 길잡이가 될 개념은 '가치'이다. 이 지점에서 벤야민과 마르크스의 관계가 중요한 테마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 테마는 물론 벤야민의 언어형이상학과 관련해서만 중요성을 지닌다. 벤야민의 카프카 비평은 카프카 자신의 작품만큼이나 날카롭고 깊은 시대통찰을 보여준다. 카프카의 세계는 낭만주의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어둡고 음습하다. 이러한 카프카의 세계에 공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벤야민을 단순히 낭만주의자(의 아들)로 규정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벤야민이 카프카를 읽는 방식의 그 깊이를 이 연구의 서술이 조금이나 간취해 낼 수 있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그의 언어형이상학이 확장되어 나가는 양상을 그려낼 수 있다면 이 연구의 목표는 성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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