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Rorty <<Contingency, Irony, and Solidarity>> 제 2장 자아의 우연성 요약
- 생활정보
- 2008. 1. 14. 00:41
라르킨의 시는 내 이야기의 정수를 담고 있다.
당신의 마음 끝까지 걸어보았다면
구사(驅使)하는 바가 화물 목록처럼 투명하고
다른 것들이 당신에겐
존재한다고 생각되지도 않을텐데
그래서 무얼 얻나요? 단지 잠시만
모든 우리 행동을 담고 있는 눈먼 각인을
반쯤은 집처럼 여길거요
그러나 고백건대
우리 죽음이 시작되는 풀빛 저녁에
그건 조금도 만족이 아니지요
누구에게나 단 한번만 오는 것 탓일텐데
사람은 죽어가지요
라르킨은 이 시가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구체적인 잃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뿐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특이한 화물 목록, 즉 그에게 가능하며 중요한 것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센스가 사라질 거라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나"를 다른 모든 "나"와 다르게 해주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을 담고 있는" "눈먼 각인"을 집처럼 여기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아마도 누구든지 자신에게 특유한 것-다른 사람의 화물 목록과는 다른 자신만의 화물 목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의 특유성을 드러내기 위한 특유한 낱말이나 형식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의 복사품이나 복제물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 내게> 될 것이다.
낭만주의자들 이래로 그리고 헤겔과 더불어 우리가 자기 의식을 자아창조로 생각하기 시작한 이후로, 특이성을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반론으로 진지하게 간주한 시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시에서 라르키은, 우리들을 다른 사람의 복사품이나 복제물이 아닌 각자의 "나"로 형성시키는 개별적 우연성인 눈먼 각인이라 것이, 정말로 관건이 아닌 척하고 있다. 그는 단지 한때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어떤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만족한 채로 죽을 수 없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는 철학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불연속성보다는 연속성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라르킨의 시가 담고 있는 흥미과 강점은 시와 철학 간의 싸움, 즉 한편으로 우연성을 인식하여 자아창조를 이루려는 노력과 다른 한편으로 우연성을 초월함으로써 보편성을 성취하려는 노력 간의 싸움을 연상시켜 준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긴장은 헤겔 이래로, 특히 니체 이후의 철학에 널리 퍼져왔다. 우리 시대의 중요한 철학자들은 낭만주의 시인들을 추종함으로써 플라톤과 결별하고자 하였으며, 자유를 우연성에 대한 인식으로 간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역사성에 대한 헤겔의 고집을 그의 범신론적인 관념론에서 떼어내려 한 철학자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이나 하이데거와 같은 니체 이후의 철학자들은 개별성과 우연성이 갖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드러내기 위해 철학을 한다. 두 철학자는 플라톤이 시작한 철학자와 시인의 싸움에 말려들게 되었으며, 두 철학자 모두 철학이 시학에 항복할 거라는 점에 대해 찬사를 보내려 애쓰며 끝을 맺었다.
라르킨이 말하는,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눈먼 각인"을 발견하는 것은 인간 조건의 보편성, 곧 위대한 연속성-영원하며 초역사적인 인간 삶의 맥락-을 발견하는 것이라 간주해 두자. 이는 오랜 옛날에는 성직자들이, 그 다음에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그리고 경험주의 과학자들이, 가까이는 독일 관념론자들이 주장했던 바다. 그들은 힘의 궁극적인 소재, 실재의 본성,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 등을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우리가 정말로 어떤 존재이며, 우리 것이 아닌 힘에 의해 강요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알려주고자 하였다.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 찍혀져 있는 각인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 각인은 기회의 문제에 해당되는 단순한 우연성이 아니기 때문에 눈먼 것일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이 되기 위한 필연적이고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구성 요소에 해당될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목표, 유일하게 가능한 목표, 필연성에 대한 충분한 인식, 우리의 본질에 대한 자기 의식을 제공해줄 것이었다.
한편, 이처럼 보편적 각인에 대한 강조 대신 개별적 우연성에 대한 폄훼의 흐름도 이어져 왔다. 시인의 오류는 특유성과 우연성 때문에 낱말들을 허비하는 일, 즉 본질적 실재보다는 부수적인 현상을 말하는 데 있다. 단순히 시공간적인 위치, 단순히 우연적인 상황이 관건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를 한낱 죽어가는 동물의 차원으로 환원시키게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삶의 필연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 자체의 목록을 복사한 화물 목록을 갖게 해줄 것이다. 이 목록을 복사하고 나면, 인간성에 부과된 유일한 과업인 <진리를 아는 것>, 즉 "저 바깥에" 있는 것과 접하는 일을 성취하여 만족하며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라져버리는 것은 단지 특유한 동물성에 불과하다. 시인은 진리에 관심이 없기에, 우리를 그렇듯 전형적인 인간적 과업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진리를 안다"는 관념 자체를 몽땅 내던져버리자고 공공연히 제안한 최초의 인물은 니체였다. 진리를 "메타포의 기동하는 군대"라고 본 그의 정의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실재를 표상"한다는 관념 자체, 모든 인간의 삶을 위한 유일한 맥락을 발견한다는 관념이 포기되어야 한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의 관점주의perspectivism는 알려져야 할 어떤 화물 목록도, 어떠한 확정적 길이도 우주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자신의 동물적 조건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용어로 스스로를 서술함으로써 자신을 창안하는 동물의 독특한 죽음을 맞는 데서 위안을 찾기를 니체는 희망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구성함으로써 자신에게 소중한 유일한 부분을 간직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창안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언어를 창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우리의 존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든 원인을 찾는다는 생각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한 개인이 자신의 모든 행동을 담고 있는 눈먼 각인을 추적할 수 있다는 관념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거부한 것은 다만 그러한 추적이 하나의 발견과정이라는 관념이었다. 그는 자기인식을 자아창조라고 보았다.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과정, 자신의 우연성과 대면하는 과정, 자신의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새로운 언어를 창안하는 과정, 즉 무언가 참신한 메타포를 생각해 내는 과정과 동일시된다. 시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따라서 니체에게 있어서는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다른 어떤 이의 서술을 수용하는 것이며, 이전에 준비된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이요, 기껏해야 이전에 씌어진 시를 우아하게 변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원인을 추적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원인에 관한 이야기를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역설적인 것으로 보일 텐데, 왜냐하면 <원인>은 창안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과적> 이야기를 언어의 <문자적> 쓰임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심지어 과학에서도 메타포적 재서술은 천재성과 혁명적 전진의 도약을 드러내는 징표이다. 쿤이 세운 논점을 따라 문자/메타포의 구분을 세계와 부합된 낱말과 그렇지 못한 낱말 간의 구분이 아니라, 데이비슨처럼 낡은 언어와 새로운 언어 간의 구분으로 생각한다면, 문제의 역설은 사라질 것이다. 데이비슨을 따라 언어가 세계에 부합된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우리는 블룸이나 니체의 주장, 즉 예전에 사용된 적이 없는 방식으로 낱말들을 사용하는 대담한 창안자야말로 자신의 우연성을 가장 잘 음미할 수 있을 거라는 주장의 요지를 간파하게 될 것이다. 연속성을 찾는 역사가, 비평가, 철학자보다 더 분명하게 자신의 <언어>도 우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같은 논점을 달리 표현하자면, 서구의 지적 전통은 시간과 현상의 특수한 의견의 세게를 타파하고 피안의 세계, 즉 영속적인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니체는 건너야 할 중요한 경계선은 영원한 진리와 시간 사이가 아니라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그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니체적인 견해에서는, 생각하고 탐구하며 스스로를 철저하게 다시 직조하려는 충동은 경이가 아니라 공포이다. 부연하자면 그것은 블룸이 말한 "자신이 단지 복사물이나 복제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전율"이다. 시인의 희망은 과거가 자신에게 행하고자 하였던 바를 과거에게 성공적으로 베푸는 것, 즉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눈먼 각인이었던 제반의 인과적 과정들도 포함하여 과거 자체가 <자신의> 각인을 담도록 하는 일이다. 프로이트가 중요한 것은 어엿한 인간 존재에 대한 이러한 니체적이며 블룸적인 의미를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도와주고 또 그것이 작동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양심을 추적하여 그 근원을 어린 시절 교육의 우연성에서 찾음으로써 프로이트를 자아로부터 신적인 것을 탈각시키도록 도와준 도덕가로 파악해야만 우리는 그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칸트에 대한 생각을 배경에 깔고 있다. 양심에 대한 칸트의 관념을 자아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칸트는 별들이 떠 있는 저 위의 하늘을 마음 속에 있는 도덕률의 <상징>이 되게 하고자 갈망했는데, 이것은 현상계에 속하지 않으며, 시간과 기회의 산물이 아니고, 자연적이거나 시공간적인 원인의 결과도 아닌, 도덕적 자아의 무제약성, 숭고함, 무조건성 등을 나타내기 위해 현상계에서 취한 임의적인 은유다.
프로이트의 새로운 점은 양심의 형성 과정에 있어 <세세한 내용들>, 즉 매우 구체적인 특정 상황과, 참을 수 없는 죄의식, 내적 불안,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설명에 있다. 그의 설명은, 연민의 느낌이란 인류의 다른 구성원들과 우리가 공유한 인간성의 공통된 핵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특정한 사람들과 매우 구체화된 변화를 향해 특유한 방식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 우리가 한 친구를 도울 때 끝없는 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끔찍하게 사랑한다고 여기는 사람의 더 큰 고통을 깡그리 망각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이 부드러운 어머니이자 동시에 무자비한 강제수용소의 간수가 될 수 있으며, 혹은 공정하고도 절제심있는 판사이자 동시에 냉정히 거절하는 아버지일 수 있는가를 설명하게 해준다. 그는 고상한 것과 저급한 것,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 간의 모든 전통적 구별들을 파괴했다.
프로이트는, 합리성이란 우연성을 다른 우연성들과 부합시키는 메커니즘이라 여긴다. 이로써 그는 과학과 시학, 천재성과 정신병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도덕성과 사려분별을 상이한 정신 능력의 산물이 아니라 적응의 상이한 양태로 보게 해준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일반 원칙이 아니라 개별적 행위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즉 개별적인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고 또 과거의 개별적인 행위나 사건과 유사하거나 상이한 대안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이 논점을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다. 프로이트는 공적 영여과 사적 영역, 국가와 영혼, 사회정의의 추구와 개인의 완성의 추구 등을 함께 다루려는 플라톤적 시도를 포기하였다. 프로이트는 도덕주의에 대한 호소와 낭만주의에 대한 호소를 존중하였지만, 그중 어느 것이 다른 것에 우선한다는 생각이나 양자를 종합하려는 발상은 거절했다. 그는 보편적으로 공유된 신념이나 욕구, 즉 우리가 인간이기에 그것이 우리 것이며 <단순히 인간이라는> 이유로 우리와 동료 인간들을 결합하게 해주는 신념과 욕구에 의해 제공되는 양자간의 다리는 없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그는 대담한 시인을 인간 존재의 원형으로 보고자 하는 니체와 블룸의 시도에 부합되는 도덕심리학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프로이트를 읽고 나면 우리는 블룸의 대담한 시인도, 칸트의 보편적 의무에 대한 충직한 이행자도 인간 존재의 모형이 아니라고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인간 존재의 모형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를 피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시인을 경외하지만, 동시에 유아적이라고 서술한다. 도덕적이기만 한 사람을 그는 권태롭게 여기지만, 그런 사람은 성숙하다고 쓴다.
프로이트를 니체보다 더 유용하고 신빙성 있게 해주는 것은, 프로이트는 인간성의 거의 대부분을 죽어가는 동물의 처지로 폄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모든 삶은 제나름의 메타포로써 맵시를 뽐내려는 시도라고 본다. 각각의 인간 존재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특이한 공상에 의해 행위하는 자로 보면, 개인의 삶에서 동물과 대비되는 인간적 부분이란 훗날 조우하게 되는 개별적 인물, 대상, 상황, 사건, 낱말을 상징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성인이란 단지 특별한 하나의 경우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들이 배우자와 아이들, 동료 작업자들, 거래의 수단들, 사업자금들, 집에 쌓아둔 소유물들, 감상하는 음악, 직접 하거나 관람하는 스포츠, 일터로 갈 때 지나치는 나무들 등을 가지고 행하는 바를 지성인은 문자와 소리로 행할 따름이다.
달리 말하자면, 메타포를 문자화하는 사회적 과정이 한 개인의 공상의 삶 속에서 복제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없는 메타포, 즉 다른 사람들이 그 쓰임새를 찾아낼 수 없는 말하기 방식이나 행위 방식의 주변을 어떤 것이 맴돌 때, 우리는 그것을 "시학"이나 "철학"이 아니라 "공상"이라고 부른다. 천재성과 공상의 차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단지 우연히 인기를 얻게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일 뿐이다. 요컨대 시, 예술, 철학, 과학, 정치에서의 진보란 사적 강박관념이 공적인 필요에 딱 맞게 된 우연의 일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 말엽부터 새로운 어휘란 다른 모든 어휘들을 대체시켜는 것, 혹은 실재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또다른 어휘, 또다른 인간의 기획, 어떤 개인이 선택한 메타포에 불과하다고 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대담한 시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미완성에 대한 두려움인데, 이것은 세계와 과거를 재서술하는 어떤 기획도, 또 각자의 특수한 메타포를 제시함으로써 자아창조를 하려는 어떤 기획도, 주변적이며 기생적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과 함수 관계에 놓여 있다. 메타포들은 낡은 용어를 낯설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용법은 이미 친숙한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낡은 낡말들을 배경으로 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전적으로 메타포"인 언어는 아무 쓸모가 없는 언어이며, 따라서 언어가 아니라 단지 웅얼거림에 불과하다. 언어란 표상이나 표현의 매개물이 아니라는 데 우리가 동의한다 해도, 언어란 의사소통의 매개물, 사회적 교섭의 도구, 한 인간을 다른 인간 존재와 묶어주는 방식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대담한 시인이라도 선행자들에게 기생적이며, 자신의 작은 일부만을 새로이 창조할 수 있듯이, 미래의 모든 낯선 이들이 베푸는 친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사적 언어란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논점, 즉 한 낱말이나 시를 비언어적인 어떤 의미-이미 사용된 낱말이나 이미 씌어진 시들이 아닌 어떤 것-와 대치시켜서는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논변을 상기시킨다. 아무리 기발한 메타포라도 수많은 딱딱한 문자적 이야기들을 그 토양으로 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모든 시들은 수많은 문화적 배경들을 전제로 한다. 니체의 전도된 플라톤주의를 피한다면, 바꿔 말해 관조의 삶에 대해 플라톤이 생각했듯이 자아창조의 삶이 완성될 수 있으며 자율적일 수 있다는 니체의 제안을 피한다면, 우리는 각 개인의 삶이 항상 미완성이지만 때때로 영웅적인, 항상 다시 엮어가는 그물이라는 생각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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