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근대 이후 2장 1절 (10. 01. 08)

 

그들의 비판적 기획은 계몽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를 쇄신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계몽에 대한 비판은 그것에 대한 긍정적인 개념, 계몽이 맹목적 지배 의지로 빠져드는 것을 막는 개념을 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1)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합리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원리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사유를 기획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유는 동시에, 개인과 대상을 다만 교환가능하고 지배가능한 객체로만 여기는 시장법칙과 교환가치에 의한 매개에 저항하는 사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유에 의해 막스 베버, 뒤르켐, 짐멜이 언급한, 해방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예속상태에 묶어두는 근대의 양가성이 폭로되는 것이다: "교환하는 자는 출생을 묻지 않는 시장의 친절에 대해 그가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상품의 생산가능성을 주조하도록 함으로써 값을 지불한다."2)

  여기서 암시된 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콘체른 경제 및 노동조합 권력의 전개와 함께 단언한 주체의 소멸은 객체와 자연의 지배 과정과 평행하게 진행되었다. 이에 대해 계몽의 변증법은 "주체와 객체 모두 무화되고 있다"고 간결하게 언급하고 있다. 주체와 객체가 무화된 것은 자기지배와 자기권력화로서의 객체 지배가 마침내 주체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지배는 계몽주의적 합리주의 속에 내재해 있었다: "사물에 대한 계몽의 관계는 독재자가 인류에 대해 가지는 관계와 같다. 독재자는 인간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을 꿰뚫어 안다."3) 덧붙이자면, 과학자의 인식적 관심이 사물에 대해 갖는 관계도 이와 같다. 그는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종하기 위해서 사물에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마련한 계몽주의에서의 긍정적인 개념이란 어떤 것인가? 그들은 하나의 이론을 기획하는데, 이 이론은 한편으로 계몽주의의 사회비판적인 목표를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학문의 모범"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쉘링의 테제를 따라 대상과의 예술적 동화라는 미메시스적 계기를 개념적 이론 속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것이다. 계몽의 변증법으로부터 약 20년 후 발터 벤야민의 미메시스 개념에 정초되어4)-이는 계몽의 변증법도 마찬가지이지만- 씌어진 미학이론에서 아도르노는 "미메시스 없는 이성은 스스로를 부정한다."5)고 썼다.

  3장에서 보게 되겠지만, 하버마스는 이론을 미메시스로, 미메시스적 예술로 만들려는 이러한 계몽의 자기비판적 기획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이러한 기획은 개념과 학문에 적대적이고 따라서 너무나 특수주의적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만 이러한 비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전후 시대에 들어와 아도르노의 이론이 에세이, 병렬체, 미메시스에 경도됨으로써 사회과학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을 너무나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6)

  그러나 하버마스의 비판은 다른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게몽의 변증법 안에 흐르는 특수주의 경향에 경도되고 이를 더욱 급진화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가령, 알렝 투렌은 근대성 비판의 여러 곳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초기 저작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계속해서 그곳으로 회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다른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은,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에 대해 회의의 눈초리를 거두지는 않지만 동시에 그 가능성을 열어두는 울리히 베크의 위험사회 이론과 합치하고 있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에서 시작된 특수주의 경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은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적 입장이다. 페미니즘은 보편적 개념을 결여하고는 성립될 수 없는-하버마스 역시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이론적 비판의 가능성에 물음표를 던졌다. 전체적으로 보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 비판은 다음에서 언급될 이론들의 출발점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어느 인터뷰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을 신봉한다고 말하면서 하버마스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나는 하버마스는 좋아하지 않습니다."7) 왜 좋아하지 않을까? 곧 보게 되겠지만, 그것은 하버마스가 계몽의 변증법이 내비치는 특수주의의 경향을 단호히 거부하기 때문이다(이로써 그는 페미니즘의 비판을 자초하기도 한다). 이에 반해 바우만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급진적으로 이어가며, 이로부터 극단적으로 특수주의를 지향하는 후근대적 사회학과 윤리학을 끌어낸다.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의 근대 비판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계승하여 자연 지배와 굳건히 결속된 합리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존재자를 논리적 형식주의에 종속시키려 하는 시도"8)와 교환가치를 통한 추상적인 수량화에 대한 이들의 논박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바우만이 보기에 개념의 보편주의와 보편적 지배는 후근대적 특수주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가진 두 측면이다: "그렇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에 중심적인 가치, 획일성과 보편주의와 같은 가치의 기호를 뒤집는다. 삶의 형식의 다양성은 환원불가능한 것이며 하나로 수렴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다양성은 저항적인 것으로 수용될 뿐 아니라 가치의 위계질서 속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가치는 보편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삶의 형식 속에 매몰되거나 보편적 지배를 꿈꾸는 형식에 의해 퇴락하지 않을 것이다."9)

  바우만이 이렇게 (근세적 계몽으로서의) 근대에 대하여 반보편주의적 비판을 가하는 것은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그의 독서에서뿐 아니라 20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유태인 학살에 대한 경악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바우만이 보기에 근대의 유태인은 부적응자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요, 근대의 지배적 사유, 합리주의와 보편주의에 의해 획일적으로 통제되어야 할 존재였다.  획일적 통제는 "양가성을 극복하고 자아의 투명성을 촉진하려는 근대의 충동"에 부합하는 것이었다.10) 바우만은 더 나아가 나치즘은 무엇보다도 계몽의 부정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지 않은 채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만행에 대한 책임은 그러한 근대의 충동에 있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이른다.11)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그가 거듭해서 특수한 것과 일회적인 것, 급진적이고 통제불가능한 문화적 다원주의를 옹호하며, 이에 대한 개념적 수용은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해도 놀랄 이유는 없다. 그에게는 모든 보편화 경향, 가령 특정한 가치나 개념을 보편타당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지배원리의 결과로서, 거부해야 마땅한 문화적 서열화의 발로로서 나타난다. 바우만은 말한다. 엄격히 보자면, "후근대적 문화"라는 표현은 모순어법이며, 그 속에 모순을 담고 있다. 후근대적 세계는 급진적이며 지양불가능한 다원성이자 다양성인 데 반해, 문화라는 개념은 항상 어떤 서열화와 획일화의 성향을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볼프강 벨쉬와 마찬가지로(5절 참조.) 그에게도 후근대적 세계는 "교정불가능한 다원적"12) 세계, "의미를 산출하는 무한히 많은 행위자들이 엮이어 있는"13) 세계, "다층적 실재의 과잉이자 의미들의 우주"14)로서 출현한 것이다. 특수한 것, 잡다한 것 들은 다스리기가 아주 까다롭다. 유럽("서구") 문화가 구제될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자신의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특수성-비구속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을 인정하는 것뿐이라고 바우만은 주장한다.

  시장이 다양성과 개체성을 촉진할 것이라는 바우만의 주장은 명료하게 사유된 것이 아니다. 그는 "시장은 획일성의 최대의 적으로서 등장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시장은 다양성을 살아간다."고 덧붙인다.15) 시장이 이를테면 소비에트 식의 계획 경제와는 반대로 갖가지 상품들과 더불어 문화를 풍요롭게 한다는 점에서 그는 옳지만, 파솔리니의 다음과 같은 반박을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즉 시장은 무엇보다도 상업화된 매체에 의해 언어적, 지역적, 문화적 차이들이 한 가지 잣대로 뭉뚱그려 넣는 것이며, 수많은 개인들을 하나같이 청바지, 콜라, 햄버거 소비자로 만들어 놓을 뿐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시장 사회 안에서의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을 더욱 세밀히 탐구하는 것일 게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