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고 배우는/팔고 사는 비대칭 관계

 고진은 가르치고 배우는/팔고 사는 비대칭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가르치거나 파는 쪽이 아니라 배우고 사는 쪽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권력관계가 번역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대로 유지되는가? 번역자는 가르치는 자/파는 자인가, 배우는/사는 자인가? 수많은 네이션 언어들 가운데 영어(와 몇 몇 강대국들의 언어, 예컨대 불어, 중국어, 일본어)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번역행위는 '이미 항상 존재하는' 역학관계의 추이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관계의 대칭성과 비대칭성은 '우리끼리의' 대화와 '낯선 타자와의' 대화에 대응한다. 그러나 '낯선 타자와의 대화'에 해당할 번역의 경우, 거기서 번역자는 인칭을 얻지 못한다. 사카이는 이를 두고 '환승 중인 주체'라 일컫지만, 그 경우에도 그 주체가 어디서 어디로 환승하는지, 그 환승으로 어느 쪽이 우위를 점하는지는 불분명한 채로 남는다. 그러나 일단, 고진과 비트겐슈타인, 사카이의 입장에서 지마와 남경희, 하버마스를 비판하며 번역의 문제로 이끌어 가볼 것.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