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근대이후 번역3

 

계몽주의적 근대 시기 동안에는 이러한 네 요소들이 도구적 이성에 의해 하나로 묶여 있었고, 특히 국가는 근대화의 수레바퀴이자 개인의 발전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던 반면, 투렌이 "후근대적"이라 칭하는1) 시기에 들어서는 도구적 사상과 행위가 스스로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 단계에 이르자 섹슈얼리티, 소비지향성, 경제적 이권다툼, 그리고 민족들 간의 분열과 같은 파괴적인 힘들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와해된 근대의 네 영역에 대하여 대칭적으로 네 가지 파괴적 요인 혹은 원심적이고 반사회적인 힘을 투렌은 대응시키는데, 욕망의 추구, 사회적 지위, 이윤과 권력이 그것이다.2)

  이 지점에서 다니엘 벨이나 아미타이 에치오니의 후기산업 사회 혹은 후근대적 사회의 다소 보수적인 기획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이 기획에 대해서는 3절에서 상세히 논구될 터이지만 미리 언급해 두어야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윤, 권력, 욕망이라는 세 요소가 가치에 대한 시장의 무차별성이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는 점이다. 이 요소들은 모두 종교적, 윤리적, 미학적, 정치적 가치의 문화 영역 너머에 있고,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한 인식적 가치도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윤의 상승이나 권력의 확장, 혹은 욕망에 봉사하는 행위나 언명은 경건하지도 선하지도 않고, 아름답거나 민주적이지도, 또 참되지도 않은 것이다. 따라서 왜 사회학자들이 사회적 행위에 새로운 종교적(벨), 윤리적(에치오니), 정치적(투렌) 가치방향을 설정해 주려고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사회적 행위를 새로이 정초하려는 그들의 시도가 애초부터 실패할 운명에 처해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다. 사회의 상업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을 찾아내고 있고, 문화적 가치의 실현은 갈수록 요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투렌의 논지가 사회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전체를 대변할 정도로 특징적인 까닭에 후기 산업사회 혹은 후근대적 위기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울리히 베크나 하버마스, 그리고 몇 몇 페미니스트와 마찬가지로 투렌도 생활세계(하버마스)의 영역에 새로운 집단적 주체가 등장함으로써 정치-, 환경-, 문화적인 이유로 동기화된 행위를 통해 도구적 이성의 저편에 놓여 있는 근대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 지금껏 진보사상, 합리화, 자연지배에만 매몰되어 왔던 반쪽짜리 근대는 이제 "합리화와 주체화 사이의 긴장"을 견디어야 한다.3)

  구체적으로 투렌이 생각하는 새로운 사회적 주체란 무엇인가? 그는 사회적 운동이라는 핵심 개념에 의거해 여성운동, 환경운동, Solidarność(폴란드의 노동운동) 등의 사례를 제시한다. 덧붙여 그는 주체를 사회적 운동으로 규정한다: "주체는 전적으로 사회적 운동으로서,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서 존재한다. 실용주의적 형식을 취하는지 아니면 사회 통합을 지향하는지 하는 것은 상관없다."4) 투렌의 주체는 마르크스-헤겔적 의미에서의 계급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이성을 구제하라는 과제 따위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계몽적이고 합리주의적 근대의 와해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후근대적 상황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는 것, 내가 근대의 합리주의적 모델이 극단적으로 와해된 형태라 부르는 그것에 대해 주체는 반발한다."5) 운동으로서의 주체에게 부여되는 과제는 에로스, 소비, 민족주의, 경제 기획의 영역들을 다시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라 이 영역들 사이에서 도구적 이성의 피안으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집단주체는 정치적이고 매개적 행위를 통해 하버마스도 분석한 바 있는 권력과 화폐라는 요소에 대한 저항을 수행해야 하며, 개인적 주체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주체는 조직에 대항하는 투쟁 속에서, 그리고 주체로서의 타자에 대한 존중을 통해 비로소 성립한다. 사회 운동은 상품, 경제정책, 국가의 권력에 맞서 주체를 옹호하는 집단적 행위이다."6) 이어서 그는 첨언한다. "사회 참여 없이는 주체도 있을 수 없다.(...)"7) 여기서 우리는 많은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드레 고르즈, 세르쥬 말레, 뤼시앙 골드만 등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획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은 전후 시대에 상업화, 사물화, 관료주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주체-새로운 노동자 계급la nouvelle classe ouvrière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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