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근대이후 번역4

 

여기서 우리는, 계급투쟁에 의해 생겨난 자본주의적 산업사회 너머에 존재하는 울리히 베크의 위험사회를 생각하게 된다. 위험사회는 더 이상 도구적 이성, 자연정복, 경제 성장, 진보의 이데올로기 따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원리들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진행된다. 바우만, 투렌과 마찬가지로 울리히 베크에게서도 근대는 그것 자체가 주제로 다루어져 반성된다: "따라서 이제 중요한 것은 자연을 이용가능한 것으로 만든다거나 전통적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거나 하는 것 뿐 아니라, 더 본질적으로는 기술적이고 경제적인 발전 자체의 결과가 가져오는 문제점들이라 하겠다."1) 사회학의 창시자들이 들여온 반성적으로 된 근대라는 개념은 기든스에게서도 역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이에 대해 살펴보자.

  울리히 베크는 스스로를 결코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라 여기며, 위험사회에 대해서도 포스트모던적이라기보다는 후근대적이고 후기 산업사회적인 것이라 생각하지만, 프랑크 페히너가 올바로 지적하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생태-, 기술적 위험에 빠짐으로써 데카르트적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서구 사유의 내부를 파헤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울리히 베크의 <위험사회>는 위기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진단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2) 그렇다면 이러한 진단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

  바우만이나 투렌처럼 베크도 계몽적 보편주의, 과학-, 도구적 이성의 보편타당성을 철저히 의심에 부친다: "나의 테제는 이러하다: 과학-, 기술비판과 이에 대한 회의는 비판가의 <비합리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문명이 점점 증대하는 위험에 빠지는 사태에 직면한 과학-기술적 하리성의 실패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3)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근대 자체뿐 아니라 근대의 내부에 위치한 과학 자체도 반성적으로 된다는 것인데, 이는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저항"에 직면하여 근대화의 위험에 대한 인식이 관철되었기 때문이다.4)

  과학적 이성(Ratio)과 과학자의 탈신비화를 동반하는 과학의 반성화(Reflexivwerden)는,  생태-, 평화주의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의 대표자들이 과학자들의 논변을 지지대로 삼아 이미 확고히 자리잡은 과학들에 저항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베크는 "과학에 대한 항의를 과학화하는 형식들"에 대하여 언급한다.5) 이로써 과학성이라는 개념은 둘로 쪼개지며, 보편이 되기를 원하는 데카르트적 욕망을 떨쳐내게 된다. 과학의 이름으로 발언하는 사람은 자신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사람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반대자도 과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과학은 경쟁하는 과학적 이론들 사이에서 자신을 반박하는 논증과 겨루어야 한다.

  과학과 진보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가족, 성역할, 노동조합, 계급개념과 같은 전통적 가치나 제도에 대한 믿음도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계속되는 시장의 확대, 급격한 개인주의화, 그리고 계급을 불문하고 퍼져가는 위험 등에 의해 가족이 해체되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사회 계급도 소멸했다. 시장의 어떤 부문이 특정한 위험에 의해 이윤을 얻는 반면, 이로 인해 다른 부문은 위협을 받게 되는 까닭에 생태학적 혼란과 위험의 계급초월적 성격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선언했던 계급 연대를 약화시키는 동안, 경제적 경쟁의 장과 사회의 개인화는 남녀 성역할의 와해, 소가족의 해체, 개인의 고립 등을 몰고 왔다. 요컨대, "완성된 근대의 근본적인 모습은 -끝에서 생각하자면- 홀로서기이다."6)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토대를 둔 연대성의 형식이 경제적인 조건에 따른 개인-, 원자화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유는, 이미 US의 데이비드 리스먼이나 프랑스의 뤼시앙 골드만에 의해 발전된 생각인 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7) 여기서 구성된 맥락과 관련하여 이러한 사유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이러한 생각이 베크와 기든스에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베크와 기든스는 오늘날 다양한 사회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기실현의 새로운 윤리학이 천박한 이기주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방향의 가치들은 쉽사리 이기주의와 나르시시즘의 표현으로 이해(오해)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여기서 표출된 새로운 것의 핵심이 오해받게 된다."8) 기든스에게서는 이러한 핵심이 무엇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위험과 혼란을 통해 불확실해진 사회 속에서 고유한 자아를 찾아가는 반성적 기획(reflexive project of self-identity)9)이다.(아래 내용을 참조.)

  위험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베크의 답은 물론 개인의 자기발견이 아니라 민주화이다. 중요한 것은 경제, 학문, 정치의 영역에서의 결정과정을 "공개적이고 참여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나아가 근대의 사용설명서로 간주되는 규칙인 민주화에 의거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10) 더 많은 민주화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위험사회)에 대한 베크의 서술을 함께 고려할 때라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 지배와 부의 증대에 눈을 고정시킨 산업사회는 민주적 결정을 위한 방책이나 남녀 평등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후기 산업사회에서 이러한 약속들을 책임있게 이행토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지점에서 사회학자 베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근대적 민주화 기획의 실현으로 파악하는 철학자 볼프강 벨쉬와 만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를 반품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실현되는 장소이다."11) 그러나 거대 은행, 콘체른, 투기꾼들, 정당관료제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다원주의와 민주적 통제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이 물음에 대한 베크의 답은 투렌의 것과 비슷하다. 이 프랑스의 사회학자처럼 그도 사회 운동에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 운동(환경-, 평화-, 여성운동)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위험 상황과 돌출하는 남녀갈등의 표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을 벗어나 개인주의화된 생활세계에서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으로부터 이 운동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어갈 것인가라는 형식과 안정화(지속화)의 문제를 낳아놓는다."12)

  사회 운동에 대해 격찬하며 이를 새로운 사회질서의 성립과 연관지으려는 투렌과는 달리 베크에게서 우리는 회의적인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사회 운동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오고 감Kommen und Gehen을 뜻한다. 특히 그것은 간다는 걸 뜻한다. 자기 소멸은 그의 동반자이다."13) 수많은 운동들(68혁명에서부터 70년대의 평화운동에 이르기까지)의 급작스런 소멸이 확증해 주고 나아가 증폭시켜주는 의구심에 비춰보면 투렌의 테제는 부분적으로나마 신빙성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오늘의 사회를 늦은 모더니티, 다시 말해 늦어서 더 급진화된 근대로 이해하려는 기든스가 사회 운동을 통한 변화를 보려 하지 않는 까닭이 잘 설명될 수 있다. 그는 자아 실현을 향한 개인의 노력이 살아가고자 하는, 혹은 살아남고자 하는 사회의 정치적 욕구와 일치하는 데 초점을 둔 사회적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있다. 생활정치(life-politics)에 대해서 모더니티와 자기-동일성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것은 반성을 통해 질서지어진 환경 속에서의 자아실현의 정치학이다. 이 환경 안에서 반성성은 자아와 육체를 세계적 규모의 체계와 결합시킨다."14) 이것은 매우 모호한 주장인데, 문맥을 통해 해석해 보자면, 자아실현을 향한 집단과 개인의 노력은 도덕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하며 (morally justifiable forms of life)15), 다시 말해 사회와 개인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이렇다: 개인은 낭비와 환경파괴를 동시에 없애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계획해야 한다. 투렌, 베크와는 달리 기든스는 자아실현의 기획이 사회 문제의 해결하는 전반적인 전략과 결합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로크나 존 스튜어트 밀이 그러했듯이)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아주 막연한 희망이며, 명료한 비판과 분석보다는 동시대 사회과학의 무기력함에 탯줄을 대고 있는 희망이다.16)

  여기서 언급되고 서로 비교된 사회 이론들로부터 하나의 응축된 시대진단을 얻어낼 수 있는데, 이를 나누어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무질, 스베보, 브로흐, 피란델로, 프루스트의 자기반성-, 자기반어적인 소설과 평행하게 전개된 근대 사회학의 성립 이래로 사회학자들은 계몽적이고 합리주의적이며 또 합리화되어가는 근대에 대해 비판적으로 맞선다. 막스, 알프레트 베버, 게오르크 짐멜, 에밀 뒤르켐 등의 저자들에게서 이러한 비판은 이따금 회의주의와 문화염세주의로 이어지기도 한다.

  2. 오늘의 사회학에서는, 특수한 것, 유일한 것을 보편적인 것의 희생물로 삼으려는 계몽적 합리주의와 자연지배에 복무하는 근대적 사유를 거부하려는 경향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3. 동시에 자연 지배와 규율화에 의해 세워진 산업-, 계급사회를 위험사회나 후기 산업사회(투렌, 벨), 혹은 후근대적 사회(바우만, 벨쉬)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확고해지고 있다.

  4. 이러한 후근대적 사회는 특히 바우만에 의해 (료타르나 벨쉬도 그러하지만) 급진적 다원주의의 세계, 다문화적 다성악의 세계로 규정된다. 이러한 다원주의가 무차별성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은 투렌이 거듭해서 강조한 바 있다.

  5. 그것은 동시에 (베크에게나 기든스에게나 마찬가지로) 극단적 개인주의의 세계, 혼돈과 소외의 세계이기도 한다. 이 세계는 자아실현을 향한 노력과 나르시시즘적 경향으로 특징지어진다.

  6. 여기 언급된 사회학자들은 근대와 후근대의 문제들(합리화, 관료주의화, 단편화, 환경)이 여전히 급진적이고 포괄적인 민주화를 통해 가장 잘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바우만과 기든스가 다원주의와 개인의 자아실현에 더 강조점을 두는 반면, 베크와, 특히 투렌은 (집단 주체의) 사회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체개념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 터무니없으며, 푸코, 데리다, 료타르를 일면적으로 "받아먹는" 이들에게만 신봉될 수 있는 주장이라는 점이다.)

  다음 절에서는 다른 입장과 의견 들에 대해 서술하기보다는 페미니즘, 마르크시즘, 그리고 보수주의 이론 들이 여기서 그려진 문제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물음을 따라가 볼 것이다. "고전적" 사회학의 문제설정과 바우만, 투렌, 베크, 기든스 들의 사유 단초가 근대-포스트모더니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포괄한다는 주장이 맞다면,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페미니즘-, 보수주의-, 마르크스주의적이니 반응을 사회학적 맥락뿐 아니라 사회적 맥락 속에서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터이다. 이 절에서, 네 가지의 상이하지만 서로 보충적이기도 한 고찰방식에 의거하여 상세히 시대진단을 내린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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