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들-논문을 위한

Die Sache oder der Sachverhalt ist immer vielseitig und sich bewegend.

번역은 교통이다.
원래부터 안정된 두 체계가 존재했고, 그 체계들 간에 교통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즉 교통이 먼저 시작되어, 체계를 점차 안정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다.
원래부터 안정된 언어체계, 가령 한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의 민족어 체계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낱낱의 언어사용들이 서로 '교통'(번역)되어감에 따라 언어의 체계가 안정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건축에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건축은 언제나 어떤 우연성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다. 건축이 건축가 또는 설계자의 구상(아이디어)를 충실히 구현해 낸 것처럼 보일 때조차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연의 토대 위에서 건축된 것이다. 건축가는 자신의 구상을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낸 것이란 말인가. 그것은 그가 배운 이런저런 (건축학적) 지식에 어떤 우연적이고 가변적인 착상들이 조합되어 생성된 것에 불과하다. '한국어'라는 체계가 안정된 건축물과 같다라는 일상적 의식은 이러한 망각과 본질적 관련이 있다. 그것은 후설이 말하는 저 종교보다도 강력한 믿음, 즉 세계가 있다는 믿음 실재가 존재한다는 믿음의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문법'이라는 단어는 건축설계와 유비되어 사용될 수 있다. 문법이야말로  안정된 구축물로서의 한국어라는 체계를 지탱하는 중추 구조물인 것이다. 이러한 안정화의 흐름은 화폐가 생성해내는 등가 교환의 믿음에 부합한다. 본래 안정된 '등가' 따위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경제흐름에 메타 층위에 존재해야 할 언어, 즉 화폐가 개입함으로써 교환이 등가라는 믿음이 구축되어 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화폐 역시 하나의 상품이라는 사실은 은폐되고, 화폐는 '등가의 척도'로 신앙된다. 이러한 과정은 언어 사용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은데, 번역이 단순히 '옮기는 일'로 인식되는 과정은 등가 번역이 가능하다는 믿음, 원문을 읽고 있다는 믿음의 구축에 필수적이다. 텍스트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때 사건이라는 말에 대해 가령 살인 사건, 뺑소니 사건, 테러 사건 따위의 일상적인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 좋은데, 그것은 말뜻 그대로 텍스트가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용의자를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에 대해 이런 저런 추측과 가설이 갖가지 방향에서 세워지고 정립되면서 사건의 '해결'이 시도되는데, 실제로 사건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종결'되는 것이다. 즉 진범을 잡았다는 확신 하에 사건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확신은 그저 수사 관계자들과 그 사건을 지켜본 사람들 간에 손쉽게 이루어지는 '합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합의의 저변에는 실증과학과 실재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저 사람이 확실히 범인이야'. 우리는 그러나 하나의 살인이 발생했다는 실재에 대한 믿음과 살인을 저지른 범인에 대한 실재론적 믿음을 구별해야 한다. 범인에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의 층위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즉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 외에는 없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지식도 -확실하지만- 부분적인 지식일 뿐이다. 그러나 사건을 '종결'짓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일이며, 따라서 우리는 '확신'을 '사실'로 확정한다. 확신이란 그저 믿음에 불과한 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번역에 있어서도 카프카를 읽는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다 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원문을 읽고 있다는 믿음의 구축을 위해서는 번역가의 이름은 삭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다른 방향에서의 수사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한 채 단 한 가지-그것도 불확실하고 미심쩍은- 증거만을 가지고 섣불리 범인을 확증하려는 것과 같다. 수사가 가능한 한 모든 방향에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역 또한 그러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터무니없다는 반론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30년 동안의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이 뒤늦게 밝혀진 진범에 의해 풀려나는 사례를 우리는 그저 '실수'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생각 뒤에는 언제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구성하는 현실의 범위가 제한적으로 확정되어 있다. 물론 그 구성은 믿음에 근거한다. 번역가의 번역이 결코 원문과 같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인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번역은 언제나 '번역들'로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카프카는 언제나 카프카들로, 아니 더 정확히는 (수많은 판본의) 성(들), 심판(들)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된 체계로서의 한국어에 대한 (누구도 입증할 수 없는) 막연한 믿음을 깨트리는 일이다. 이러한 믿음을 깨트리고 나면 그 다음 단계는 한국어의 형식의 확장이다. '한국어 어법에 맞지 않다'라는 진부한 번역비판은 그 중요성에 비해 그 폐해가 너무 크다. 한국어의 통사 구조와 형식, 구두법 등이 다른 언어들과의 교통을 위해 확장되지 못하면, 낡고 허물어져가는 건축물을 어떻게든 지탱해 보려는 애처로운 시도는 허망한 결말을 보게 될 것이다. 게다가 한국어는 애시당초 잘 지어진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부실하고 허술한 건축물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모든 방향과 가능성을 고려하여 그것의 형식을 확장해야만 한다. 서사학의 통찰이 말해주듯, 언어는 항상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가?', 즉 일인칭과 이인칭 사이에서 발생하는 게임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심지어 이 세계조차도 삼인칭이다. 삼인칭이라는 것은 동시에 일인칭과 이인칭 '사이'다. 이 '사이'가 일인칭과 이인칭에 앞선다. 번역자의 인칭이 삭제되는 것은 일인칭에 대한 고집과 이인칭에 대한 숭배가 서로 다툼을 벌이는 것에 의해서다. 번역자의 인칭을 되살리는 것, 번역자의 인칭을 복수plural로 세우는 것, 이것이 오늘날 절실한 과제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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