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로 간 코미디언> 김연수

"나는 아무도 없는 편집실에 앉아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어. 처음에는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감정의 흐름을 지켜봐. 그럴 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되게 외로워져.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릴 테이프를 잘라내면 외로워진단 말인데.....어, 저게 뭐지?"
  그렇게 해서 편집이 다 끝나고 방송이 흘러나올 때면 그녀는 자신이 직접 만나서 들었던 바로 그 인생담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에 번번이 좌절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이야기>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 기침이나 한숨 소리, 혹은 침 삼키는 소리 같은 데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인생이 바뀌는 순간의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릴 테이프를 돌려가며 그녀가 가위로 오려낸 조각들과 함께 사라졌다. 어디로? 우주 저편으로. 마치 그 말을 하면서 호수의 윤곽을 따라 왼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던 붉은색 아스팔트 산책길의 모퉁이에서 그녀가 "저게 뭐지?"라고 말하며 달려가 바라본 부엉이처럼 말이다. (20)

"수전 손택이라고, 타인의 고통을 바라볼 때는 '우리'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여자인데, 소설가이고 비평가로 우리나라에도 책이 몇 건....."
"알아. 나도 좋아하는 사람이야. 계속 얘기해봐."
"그러니까 그 여자 말로는 고통과 '우리'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긴데, 소통하면 고통은 없는거야, 맞지? 이 왼손이 남자고 이 오른손이 여자야. 이 두 사람이 늘 함께 붙어 있다가 이렇게 떨어지면, 서로 소통이 안되니까 그게 고통이잖아."
나는 두 주먹을 쥐고 서로 붙였다가 뗐다가를 반복하면서 말했다.
"글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모양인데, 그런 뜻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계속 말해봐."
"암튼 붙으면 고통이 없고 떨어지면 고통이 생기고, 그런 거야. 그래서 네가 내 곁에 없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던 거야. 곁에 없으면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야.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처지가 되는 거지. 걔는 왜 그랬을까? 정말 이상한 애잖아? 이해할 수가 없어. 한때 나 자신보다 더 친했던 사람에게 느끼는 그런 의문 자체가 고통이라구.  여기 봐. 이렇게 바람이 불잖아. 여기 나무들 사이로. 그런데 네가 없으니까 이런 의문이 들더라. 왜 바람이 부는 거지? 이해가 안 돼.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고통스러워. 손뼉을 치잖아. 짝짝짝. 그러면 소리가 나잖아. 왜 소리가 나는 거지? 이런 소리 자체가 고통이었어. 세상 모든 게 고통이었어."(27-28)

그럼 할 말은 여기서 할게. 알래스카 코르도바에 마리 스미스라는 에야크 인디언이 살아. 이 지구상에서 에야크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인간이야. 사람들이 그 소감을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대. '그게 왜 나인지, 그리고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나는 몰라요. 분명한 건 마음이 아프다는 거죠. 정말 마음이 아파요.' 듣는 사람이 없으면 말하는 사람도 없어. 세계는 침묵이야. 암흑이고."(30)

그럼에도 그녀는 편지에다가 다음과 같이 썼다.
'옛날에 충주호에서 부엉이 볼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겠지? 사람들이 퇴근한 뒤 편집실에 혼자 앉아서 릴 테이프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한 사람의 일생을 편집할 때 그게 어떤 기분인지 내가 얘기한 적이 있었잖아. 밤이 늦도록 편집하다 보면 어느 틈에 이야기의 내용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목소리의 톤과 빠르기가 들리지. 그런 목소리에 오랫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빛과 어둠, 열기와 서늘함, 고독과 슬픔마저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아.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런 미세한 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 아, 이 사람은 지금 고생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그 목소리만은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었다고 말하고 있구나.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다 보면 그렇게 혼자 중얼거릴 때가 있어. 편집하면서 내가 제일 안타까웠던 순간은 목소리가 끊어질 때였어. 더 말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어느 순간 말을 멈춰.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고 릴 테이프는 혼자서 돌아가지. 침묵과 암흑. 내 귀에는 잡음만이 들려. 몇 번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쩌면 바로 그 순간이 내가 귀를 기울이는 순간일지도 몰라. 거기에 진실이 있을지도 몰라. 1초, 2초, 3초, 4초, 5초. 나는 목소리가 다시 나타나길 기다리면서 없어진 그 목소리의 감정을 읽어.'(37)

"재미있군요. 얼마 전에 녹음한 책에 보니까 아프리카에서는 노인이 하나 죽을 때마다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썼습디다. 그게 참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책을 읽을 수 없게 됐으니까 내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처럼 눈이 안 보이게 되면 읽을 수 있는 책이 한정돼 있거든요. 소설가는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으니까 소설가에 대한 책은 아직 읽어본 일이 없는 셈입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 법이죠. 그러니 몇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소설을 써서 먹고살 만합니까?"(45)

"이건 전적으로 제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우리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책 한 권을 오디오로 만들거나 점역하는 일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주로 장애인들의 자립을 도와주는 책이나 베스트셀러만 우리는 접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장애인이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많은 비장애인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들은 선생의 소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생각해본 일조차 없을지도 모릅니다. 안 팔리는 쪽이라면 말이죠."(46)

"그렇죠. 제가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이제하의 소설이었습니다. <초식>이라는 소설이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국문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지요. 선천성 백내장으로 왼쪽 눈이 이미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오른쪽 눈만으로 매일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는 요약이 불가능한 책만 골라서 읽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눈이 멀고 나면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하게 될 텐데, 실용서나 베스트셀러는 읽은 사람에게 내용을 요약해서 들어보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47)

"얼마 전에는 영국의 한 시각 장애인 교수가 쓴 책을 점자로 읽다가 메를로퐁티가 쓴 <<지각의 현상학>>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그는 그 책을 읽고 자신이 왜 가끔씩 유령이 된 것같이 느끼는지 이해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내가 왜 가끔씩 유령이 된 것처럼 느끼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독서의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는 최대한 노력할 때 상식적인 인간이 될 뿐입니다. 그 일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죠."(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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