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노발리스 - 독백 -franz72님
- 생활정보
- 2007. 7. 17. 16:20
텍스트 설명 :
이 텍스트는 슐레겔의 "이해불가능성에 대하여"와 더불어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언어관을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 텍스트인 노발리스의 독백에 대한 번역이다. 이 텍스트는 "문학은 문학이다Poesie ist
Poesie"로 표현될 수 있는 그들의 언어 철학이 어떻게 말라르메 이후의 현대 "문학"의 언어를
선취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초기 낭만주의의 언어
이해 간의 연관성을 해명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즉 청년 시절부터 유럽의
아방가르드 문학에 심취했던 벤야민은 현대 문학의 언어에 훈련된 예리한 시선을 통해 독일의 문학
전통을 재해석하고 있으며, 그러한 해석적 관점 하에서 독일 초기 낭만주의와 아방가르드 문학 간의
"비감각적 유사성"을 발견해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전통과 현대의 매개 문제야말로 벤야민의 철학적
관심을 형성하고 있는 문제들 중 하나이며, 이때 이러한 매개를 통해 생성된 역사는 순차적인 특성을
띠고 있지 않고 오히려 가역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즉 프로이트의
사후성Nachtraeglichkeit 개념처럼 벤야민에게 있어 역사와 전통은 감추어졌던 사실들이 인식되는
"인식 가능성의 순간"인 "지금"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벤야민의 사유를
이해하고 그의 텍스트를 해독하는 작업을 할 때 요청되는 태도는 몸은 미래를 향해 있으면서도
시선은 과거를 향하고 있는 "역사의 천사"와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이 텍스트를 번역하며 사용되고 있는 각주는 전적으로 번역자가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를
하며 붙여놓은 것으로 번역자와는 상이한 텍스트 이해나 번역 또한 가능함을 밝혀두고자 한다.
독백Monolog*
노발리스Novalis
진정한 대화는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말하기와 글쓰기에 대한 참으로 터무니 없는
견해이다. 사물 때문에 사람들이 말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우스꽝스러운 착각은 놀라울 따름이다.
언어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걱정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언어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것을 아무도 알고
있지 않다.1) 따라서 언어는 매우 경이롭고 생산적인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데, 즉 만일 어떤 이가
단순히 말을 하기 위해 말을 할 경우, 그는 바로 가장 장중하고 가장 독창적인 진리들을 말하게 된다.2)
하지만 그가 어떤 특정한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그 변덕스러운 언어는 그로 하여금 가장
우스꽝스럽고 정신 나간 하찮은 말을 하게 한다. 또한 그러한 사실로부터 상당히 많은 진지한 사람들이
언어에 대해 지니고 있는 증오가 생겨난다. 그들은 언어가 지닌 악의를 알아채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경멸적인 수다가 언어의 무한히 진지한 측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는 못하다.3) 그러한 사람들이
언어는 수학적 공식들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만들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즉 수학적
공식들을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며, 오로지 자신하고만 작용하며, 자신의 놀라운 본성만을
표현하며,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수학적 공식들은 매우 표현이 풍부하며, 바로 그러한 까닭에
자신들 안에서 사물들의 기묘한 관계 작용을 반영하게 된다. 수학적 공식들은 오로지 자신이 지닌 자유
때문에 자연의 부분들이 되고, 그들의 자유로운 운동을 통해서만 세계 영혼(Weltseele)은 스스로를
드러내고 수학적 공식들을 사물들의 부드러운 척도와 개요로 삼는다.4) 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언어의 사용(Applikatur), 언어의 박자(Takt), 언어의 정신에 대한 섬세한 감정을 소유한 자, 즉 자신
안에서 언어의 내적 본성의 섬세한 작용을 감지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혀나 자신의 손을 움직이는 자는
예언자가 될 것이다. 그와 반대로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언어의 내적 본성을 감지하기에
충분한 귀와 감각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자는 이와 같은 진리들을 글로 쓰게 되겠지만, 언어에 의해서는
최고로 간주되고 사람들에 의해서는, 마치 카산드라Cassandra가 트로이 사람들에 의해 그랬던
것처럼,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이로써 나는 시문학의 본질과 직무를 매우 명확하게 제시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러한 사실을 이해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며, 내가 그러한 사실을 말하고자
했었기 때문에 내가 흰소리밖에 말하지 못했고, 그래서 시문학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만약 내가 말해야만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이러한 언어 충동이 내
안에 있는 언어의 영감, 언어의 작용력의 표지란 말인가? 그리고 만약 나의 의지가 내가 말해야만 하는
것만을 말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것이 종국에는 나의 지식과 믿음이 배제된 시문학일 수 있으며 언어의
비밀을 이해하도록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소명받은 작가인가? 왜냐하면 작가란
아마도 언어의 영감을 받은자이기 때문이다.
* 노발리스의 이 단편은 슐레겔Schlegel의 "이해불가능성에 관하여(Ueber die Unverstaendlichkeit)"
와 더불어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언어철학을 살펴볼 수 있는 핵심적 텍스트이다.
1) "언어 자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보다도 더욱 자신을 잘 이해한다"는 슐레겔의 언어관과 더불어 노발리스의 이러한 언어관은 언어의 자기 준거적 특성을 강조하는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언어관을 대변하고 있다.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언어는 고전주의적, 지시관계적, 이데올로기적인 기호언어를 비지시적 관계인, 애매한 현대적인 메타포로 전이시켜놓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칼 하인츠 보러/최문규 역, 절대적 현존, 문학동네 1998를 참조할 것.
2) 독일 초기 낭만주의의 언어관은 이처럼 "이해 불가능성"과 예언, 아이러니와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는 양가적 특성을 띠고 있다.
3) 노발리스는 말과 실상이 불일치하는 언어의 특성을 "경멸적인 수다"로 지칭하고 있지만, 이러한 언어 상황을 비판하고 다시 말과 사물이 일치하는 언어를 구상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언어에서 언어의 "생산적"이고 "진지한" 특성을 발견한다. 발터 벤야민 역시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1916)에서 바벨탑 사건 이후의 타락한 언어를 부정적 현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여기에서 새로운 생산성과 긍정성을 발견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노발리스와 슐레겔의 언어철학적 전통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인식은 신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절대적 기표의 상실과 그로 인한 언어의 혼란을 오히려 해방과 다양성의 분출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적인 세계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노발리스는 수학의 공식과 언어 간의 유사성을 통해 자기준거적인 언어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교가 성립하는 까닭은 수학의 공식들이 개별적이고 감각적인 외적 대상을 모사하지 않고, 내적인 결합 원리에 의해 독자적인 영역을 형성하면서도 경험 전체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 그 이유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준거적인 언어는 더 이상 외적 사물의 재현 도구가 아니며, 언어와 사물 간에는 어떠한 "자연적인" 유사성의 관계도 성립하지 않으며, 언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관을 통해 노발리스는 "자연언어"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있으며, 동시에 "문학은 문학이다Poesie ist Poesie"라는 문학의 자율성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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