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슐레겔 - 신화에 대한 연설 -franz72님

텍스트 설명 :


벤야민의 박사학위 논문이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 비평 개념"이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벤야민과 독일 낭만주의간의 긴밀한 관계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벤야민은 이 논문에서 흔히 독일 관념론 전통에서 이해되어왔던 독일 초기 낭만주의를 피히테의 주관철학으로부터 구출해내고 있다. 즉 벤야민은 성찰의 중심을 자아(Ich)라고 이해한 피히테의 견해를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 있어 성찰의 중심은 예술이라고 이해함으로써 탈주관적이고, 탈관념론적인 예술이해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와 예술가 주체의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이러한 벤야민의 해석은 또한 이미 해체구성주의(Dekonstruktion)적 문제틀을 선취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여기에 번역해서 올려놓은 글은 슐레겔의 새로운 신화에 대한 텍스트로서, 독일 이상주의 체계 강령과

비교해서 읽어본다면 "현대"라는 문제에 접근하는 공통적이면서도 상이한 이해방식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공통체의 해체, 공동체를 구성하는 담론으로서의 신화의 부재를 시대의 문제로서 공유하고 있지만, "신화"에 대한 그들의 상이한 이해와 개념구성은 "현대성"을 이해하는 그들의 상반된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0년도 훨씬 전에 씌어진 까다로운 이 텍스트들이 소위 "Post-Modern"한 21세기를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까닭은 "Post-"란 접두사를 단절로 이해하건 연속으로 이해하건 우리는 여전히 "Modern"의 유령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살고 있기 때문이다.


* 학생 시절에 번역해두고 전혀 손을 보지 않았던 터라 간혹 눈에 거슬리는 번역어나 개념이 보이기도 하네요. 지적해주시면 고맙게 달게 받겠습니다. 혹 독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분들이나 전공하셨어도 제가 번역한 텍스트가 쉽지만은 않으셨다면, 먼저 쉴러의 "소박문학과 성찰문학"이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을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 글들은 이후 전개되는 독일의 미학적 논의들의 중요한 핵심적 구분들이 섬세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쉴러는 "소박Naiv"과 "성찰Sentimental"이란 개념쌍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때, "소박"하다는 개념은 선/악의 분별 이전의 것, 이성의 사용 이전의 것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성찰"이란 단어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뜻인 "감상적인, 우수에 젖은"의 의미가 아니라 "이성을 통한 분별력을 지닌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반된 개념은 동시에 역사적인 범주로도 기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소박"이란 범주가 근대 이전의 시대, 고대 등을 지칭하고 있다면, "성찰"이란 범주는 계몽주의 이후의 현대를 지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쉴러는 더 나아가 이 대립적인 두 범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미적인 것aesthetisch"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 범주는 또한 미래의 유토피아적 범주로 기능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를 역사철학적으로 간단히 도식화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박"(분열 이전의 상태, 과거) ---> "성찰"(분열된 상태, 현재) --> "미적 상태"(다시 찾은 조화, 미래). 이때 다시 찾은 조화의 상태는 과거의 상태로의 단순한 회귀를 통해 얻게 된 것이 아니라 그것과 구분되는 질적으로 새로운 계기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조화의 추구를 퇴행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독일 낭만주의는 흔히 헤겔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반헤겔적인, 포스트모던적인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즉 독일 초기 낭만주의를 해체구성주의의 선구로 파악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해석의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 해석자는 에른스트 벨러Ernst  Behler라 할 수 있는데, 그는 과거에 철저한 헤겔주의적 해석에서 해체구성적 해석으로 극적인 전환을 이룬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이 단순히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연구 끝에 도달한 방향 전환이기에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그의 텍스트 "니체-데리다, 데리다-니체"는 이미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페터 지마의 "해체구성주의"란 텍스트 역시 독일 문학 전통과 현대의 이론이 어떻게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칠기는 하지만 볼프강 벨쉬Wolfgang Welsch의 견해 또한 현대성의 개요를 작성하는데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하시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신화에 대한 연설1)2)


프리드리히 슐레겔


[201] 친구들이여, 저는 여러분들이 예술을 숭배하는 그 만큼의 진지함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자문하라고 권고하고 싶습니다. 즉 감격의 힘이 시문학에서도 계속 조각조각 흩어지고 거슬리는 요소에 대항한 싸움으로 인해 지쳐가다가, 결국에는 고독하게 침묵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최고의 신성은 여전히 이름도 형태도 없는 채로 머물고, 어둠 속에서 우연에 내맡겨져야 하는 것입니까? 사랑은 진정 정복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술이 주문으로 사랑의 정신을 사로잡아 사랑의 정신을 자신에게 복종시키고, 예술 자신의 지시와 필수적인 자유(Willkür)3)에 따라 사랑이 아름다운 형성(Bildungen)4)에 혼을 불어넣게 하는 힘이 없다면, 예술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 예술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그 누구보다 저의 말뜻을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가 시작을 해왔으며 그래서 종종 시작을 하며 여러분들의 활동(Wirken)을 위한 확고한 지반이나 어머니와 같은 땅, 하늘, 생생하게 살아 있는 대기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의 내부로부터 그 모든 것을 현대 시인은 끌어내야만 하고, 그래서 많은 이들이 훌륭히 해냈지만, 지금까지는 각자가 혼자서 무(Nichts)에서 처음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창조물과 같은 개별적인 작품만을 생산해냈습니다.


저는 곧장 제 연설의 궁극적인 목적을 말하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고대인들의 문학에는 신화(Mythologie)5)가 있었지만 우리의 시문학(Poesie)에는 그런 중심점6)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점이 현대의 시예술이 고대의 문학에 뒤쳐지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에겐 신화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머지 않아 신화을 가질 수 있으며,  혹은 이제 우리가 하나의 신화를 생산해 내기 위해 진지하게 합심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신화는 오래된 예전의 신화가 유년 시절의 환상이 피워낸 첫 꽃처럼 사방에서 피어나고, 감각적 세계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에 직접 연결되고 스스로를 형성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신화는 그와는 정반대로 정신의 가장 깊숙한 심연7)에서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예술작품들 중에서 가장 인공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을, 즉 시문학의 오래되고 영원한 새로운 침상이자 그릇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다른 모든 시들의 맹아를 감추고 있는 무한한 시 자체를 포함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02] 여러분들은 어쩌면 이 신비로운 시에 대해 비웃거나 문학작품들의 혼전과 충만함으로 인해 생겨날지도 모를 무질서에 대해 비웃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미, 즉 최고의 질서는 오로지 혼돈의 질서8), 다시 말해 조화로운 세계로 전개되기 위해 사랑의 접촉만을 기다리는 혼돈의 질서, 고대의 신화와 시문학이 그랬던 것과 같은 혼돈의 질서입니다. 왜냐하면 신화와 시문학 양자는 하나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모든 시들은 서로서로 이어져서, 마침내 더욱 거대한 작품군과 부분들로 이루어진 전체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도처에서 하나의 동일한 정신이 단지 다르게만 표현됩니다. 따라서 고대의 문학은 유일하며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문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로 공허한 상만은 아닐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것이 다시 새로 생성될 수 없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예전과는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아름답고 보다 위대한 방식이 왜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건대 새로운 신화의 가능성을 불신하지는 말아주십시오. 물론 모든 측면에서 그리고 모든 방향으로 의구심을 갖는 것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럴수록 연구는 더욱 자유롭고 풍부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추론을 주의깊게 들어주십시오! 추론 이상의 것을 저는 상황상 여러분들에게 전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추론들이 여러분들 자신을 통해 진리가 되길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추론들을 진리로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 시도를 위한 제안이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신화가 정신의 가장 깊숙한 심연으로부터 스스로 솟아 나올 수 있다면, 우리가 이 시대의 위대한 현상, 즉 이상주의 안에서 찾고 있는 것에 대한 매우 중대한 암시와 주목할 만한 확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주의는 무로부터 생겨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겨났고, 그것은 지금 정신 세계에서도 하나의 확고한 점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 지점으로부터 인간의 힘은 사방을 향해 점진적인 발전을 전개해나갈 수 있으며, 자신감에 차 있으며 또한 되돌아갈 길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학문과 예술은 혁명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들은 혁명이 물리학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리학 내에서 이상주의는 혁명이 철학이라는 마법 지팡이에 건드려지기도 훨씬 이전에 스스로의 힘으로 실제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놀랍고도 위대한 사실은 여러분들에게 동시에 시대의 비밀스러운 연관과 내적 통일성에 대한 암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상주의는 실천적 관점에서 볼 때 혁명의 정신에 다름 아니며, 우리가 자신의 힘과 자유에서 수행하고 확산시켜야 할 혁명의 위대한 금언이며,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정신이 여기에서도 비록 아무리 위대하게 나타날지라도 모든 현상들의 현상에 대한 하나의 부분, 한 가지 분야, 한 가지 표현법일 뿐이며, 따라서 인류는 온 힘을 다해 그러한 현상들의 중심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9) 인류는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살아가고, 몰락하고, 회춘하는 게 틀림없습니다. 얼마나 그럴 듯 합니까? 그리고 왜 그러한 회춘의 시대로부터 무엇을 바래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잿빛 노년기는 다시 생생한 활기를 되찾게 될 것이고, 형성의 머나먼 미래는 이미 전조를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가 여기에서 우선 다루고자 하는 바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무 것도 빼먹지 않고 여러분들을 한걸음 한걸음 가장 신성한 신비들을 확신하도록 인도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즉 만약 자기 스스로를 규정하고 자기 자신 밖으로 빠져나왔다가 다시 자기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는 영원한 변천(Wechsel) 속에 있는 것이 정신의 본질이라면. 만약 모든 사상이 그러한 활동성의 요청에 다름 아니라면. 그러한 과정은 또한 바로 그 자체가 그러한 자기 법칙의 인정일 뿐인 이상주의의 모든 형식 전체 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10)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203] 새로운 발명의 무제한적 충만함을 통하여 그와 같은 비밀스러운 힘을 드러내는 배가된 삶의 인정을 통하여, 보편적인 전달가능성과 생생한 작용력을 통하여 새로운 자기 법칙을 가장 탁월하게 계시합니다. 물론 그 현상은 각각의 개인(Individium) 안에서 다른 형태를 취하는데, 종종 그 성취는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전체의 과정을 위한 필연적인 법칙들이 기대하도록 만드는 것에 있어서 우리의 기대는 결코 기만당할 수 없습니다. 모든 형태의 이상주의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기 자신 밖으로 빠져나와야 하며, 다시 자신 안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며 원래 있었던 대로 머물러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상주의의 품 밖으로 하나의 새롭고 무제한적인 사실주의11)가 솟아나와야 하며 솟아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주의는 자신의 발생 방식에 있어서만 새로운 신화의 예가 될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방법 자체로도 새로운 신화의 원천이 됩니다. 유사한 경향의 흔적들을 이미 여러분들은 도처에서 지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물리학에서 그러한데, 물리학은 자연에 대한 신화적 전망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러한 사실주의의 이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껏 전달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제가 그것에 적합한 기관(Organ)을 아직도 찾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문학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철학 혹은 하나의 체계의 형태 안에서 사실주의는 결코 다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전통 자체를 따르자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러한 새로운 사실주의는, 그것이 이상주의의 원천에서 생겨나야 하며 그리고 동시에 이상주의의 근거와 토대 위에서 부유하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의 조화에 근거를 두어야만 하는 시문학으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스피노자(Spinosa)는 제 생각에 우화 속의 그 선한 늙은 사투르누스(Saturn)12)와 유사한 운명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그 새로운 신들은 그 지배자를 학문의 고귀한 왕좌에서 끌어내렸습니다. 환상의 성스러운 어두움 속으로 그는 퇴각해서, 그곳에서 그는 명예롭게 추방당한 다른 티탄들(Titan)13)과 기거했습니다. 그를 이곳에 붙들어 두어라! 뮤즈들의 노래에서 옛날의 지배에 대한 그의 기억은 조용한 동경 속으로 녹아들어갔습니다. 그는 체계라는 호전적 장식을 벗어던지고, 그런 다음 새로운 시문학의 신전에서 호머(Homer)와 단테(Dante)와 함께 거주하며 신에 도취된 모든 시인들이라는 집의 수호신들(Laren)이자 가식들과 교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스피노자를 존경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지 않고 완전히 그와 같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시인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개별적인 발명에 있어서 여러분 자신의 환상은 충분합니다. 그러나 환상을 격앙시키고, 활동하도록 자극하고, 그것에 양분을 공급하는데는 다른 예술가들의 문학작품들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게서 여러분은 모든 환상의 처음과 끝, 보편적인 근거와 토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위에 여러분 각자는 쉬고 있으며 환상의 근원적인 것, 영원한 것을 모든 개별적인 것과 특수한 것으로부터 바로 이렇게 분리해내는 것을 여러분은 매우 환영해야 합니다. 기회를 잡고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시문학의 가장 내적인 작업장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여러분에게 베풀어질 것입니다. 이런저런 것에 대한 자극도 아니며 부풀어올랐다 다시 가라앉는 열정도 아닙니다. 하지만 맑은 향기가 보이듯 보이지 않듯 전체 위에 떠돌게 되며, 사방에서 영원한 동경은 조용한 위대함(in stille Größe)14) 속에서 근원적인 사랑의 정신을 숨쉬는 단순한 작품의 심연으로부터 솟아나온 울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의 이러한 부드러운 반영이 모든 시문학의 타오르는 불꽃인 고유한 영혼이 아닐까요? 인간, 즉 열정과 행동에 대한 단순한 서술로는 인위적 형식들이 그러하듯 그것을 진실로 해내지 못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낡은 잡동사니를 수만번 [204]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여기저기를 뒤적여 본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단지 가시적인 외적 육체일 따름이며, 만약 영혼이 사라져버렸다면, 그것은 시문학의 죽은 시체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만약 열정의 그 불꽃이 작품 안에서 타오른다면,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생생하고 빛과 사랑의 아름다운 영광 속에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아름다운 신화란 환상과 사랑의 이러한 변용 속에서 주위를 감싸고 있는 자연의 상형문자적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화는 하나의 커다란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평소에 의식이 영원히 멀리하는 것이 이곳에서는 감각적이고 정신적으로 보여질 수 있으며, 그리고 마치 감싸안고 있는 육체 안에 들어 있는 영혼처럼 확고하게 존재하며, 영혼은 육체를 통해 우리의 눈에 희미하게 빛을 비추고, 우리의 귀에 말을 걸어옵니다.

우리가 지고의 것 때문에 완전히 우리의 심정에만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본래의 취지입니다. 하지만 심정이 결여된 자에게 지고의 것은 그 어디에서도 솟아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적어도 저항하려고 하는 익히 알려진 진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방에서 인공물과 연관되어야 하며 그리고 지고의 것도 그와 동일한 것이나 유사한 것과 접촉시키거나 혹은 동일한 품위를 갖추어 적대적인 것을 발전시키고, 불붙이고, 영양분을 공급하고, 즉 한마디로 형성(bilden)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고의 것이 실제로 의도적으로 형성될 수 없다면, 그와 동시에 자유로운 이념예술(Ideenkunst)에 대한 모든 요청을 우리는 포기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단지 공허한 이름으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신화는 자연의 그러한 예술작품입니다. 자연의 직조 안에서 지고의 것은 실제로 형성됩니다. 중요한 것은 연관과 변화, 형성된 것과 변형시킨 것이며, 그래서 이러한 형성과 변형은 바로, 제가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자연의 고유한 방식이자  내적 삶이며, 자연의 방법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지금 낭만적 시문학의 그 위대한 위트와 매우 커다란 유사성을 발견했는데, 위트는 개인들의 기발한 착상에서가 아니라 전체의 구성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을 우리의 친구는 이미 종종 세르반테스(Cervantes)와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작품들을 통해 발전시켰습니다. 바로 이러한 인위적으로 정돈된 혼란, 모순들의 이러한 매력적인 대칭, 열정과 전체의 가장 사소한 부분들에서조차 살아있는 아이러니의 이 놀라운 영원한 변천은 저에게 이미 직접적 신화 자체가 되는 듯이 보입니다. 유기체(Organisation)는 이러한 신화이며 틀림없이 아라베스크(Arabeske)는 인간 환상의 가장 오래되고 근원적인 형식일 것입니다. 이러한 위트도 하나의 신화도 최초의 근원적인 것과 모방할 수 없는 것 없이는, 즉 절대적으로 해체할 수 없는 것, 모든 변형 뒤에도 여전히 오래된 자연과 힘이 빛을 투과하도록 하는 것, 그곳에서 소박한 성찰이 변모된 자나  미친자의 모습으로 혹은 우직한자나 어리석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위트도 신화도:번역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시문학의 처음으로,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이성의 진행과정과 법칙이 해체되고, 우리를 다시금 환상의 아름다운 혼란 속으로, 즉 인간적 자연의 근원적 혼돈 속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인데, 근원적 혼돈에 대해 저는 옛 신들의 다채로운 혼잡보다 더 아름다운 상징을 지금껏 알지 못합니다.


어째서 여러분들은 위대한 고대의 이러한 훌륭한 형상들에 새로이 생명을 불어넣으려 하지 않으십니까? 단지 한번이라도 스피노자와 현재의 물리학이 모든 성찰하는자들에게서 진작시켜야만 하는 그 다양한 견해들로 충만한 오래된 신화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모든 것들이 새로운 광채와 생명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신화들 또한 새로운 신화의 발생을 가속화시키기 위해 다시금 성찰과 아름다움과 형성의 척도에 따라 [205] 일깨워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고대의 보물들 뿐만 아니라 동양의 보물들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감각의 보편성과 깊이를 지닌, 번역의 천재(Genie)를 지닌 몇몇의 독일 예술가가 더욱 무뎌지고 야만스러워지는 어떤 나라를 이해할 필요가 없을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시문학의 그 새로운 원천은 인도로부터 우리에게로 흘러들었을 것입니다. 동양에서 우리는 지고의 낭만적인 것을 찾아내야 하며, 만약 우리가 비로소 그 원천에서 창조해낼 수 있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아마도 지금 스페인 시문학에서 그토록 우리를 매혹하는 남방의 열정도 다시금 오로지 서양적이고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한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각자는 전체적으로 즐거운 기대에 차서 가장 개인적인 방법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그러면 그 어디에서도 심지어 지고의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곳에서조차도 개성의 법칙들은 통용되지 않습니다. 만약 개성이라는 것이 단지 그 단어가 표현하는 바 대로라면, 즉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 생생하게 살아있는 내적 연관이라면 말입니다. 제가 주저하지 않고 말하고 싶은 점은 인간의 고유한 가치, 바로 인간의 덕성은 독창성15)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스피노자에게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주관적인 선호(그러한 대상들로부터 저는 오히려 분명하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에서나 혹은 그를 새로운 독재의 대가로 고양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예를 통해 매우 분명하게 신비주의(Mystik)의 가치와 품위 그리고 그것의 시문학에 대한 관계에 관한 저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지닌 객관성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기타 다른 사람들의 대표자로 그를 선택한 것입니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학문론이 이상주의의 무한성과 변함없는 충만함에 대해 주목하지 못하신 분들의 견해에 따라 최소한 어떤 완결된 형식으로, 즉 모든 학문들에 대한 보편적 도식(Schema)으로 남아 있다면, 스피노자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신비주의(Mystizismus)의 모든 개인적 관점을 위한 일반적인 근거와 지주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점을 제 생각에는 신비주의도 스피노자에 관해서도 특별히 많이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 또한 기꺼이 인정하게 될 겁니다.


저는 한번 더 물리학의 연구를 요청하지 않은 채 끝낼 수 없는데, 물리학의 역동적인 역설들에서 지금 자연의 가장 신성한 계시들이 사방에서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빛과 생명 가까이 가도록 합시다! 망설이지 말고 각자는 자신의 감각에 따라 우리가 소명받은 그 위대한 발전을 가속화시키도록 합시다. 이 시대의 위대함을 존경하시오. 그러면 안개는 여러분들의 눈에서 걷히고 눈 앞이 밝아지게 될 겁니다. 모든 사고는 하나의 예언이지만, 인간은 이제 막 비로소 자신의 예언적 힘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16) 그 힘은 아직 그 무한한 기대들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시대를, 즉 보편적인 회춘의 그 위대한 과정이자 영원한 혁명의 원리들을 이해하는 자에게는 인류의 양극을 파악하고 최초의 인간들의 행동17)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황금시대18)의 특성을 인식하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수다19)는 중지될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대지를 이해하게 되고 태양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새로운 신화에 대해 생각한 것입니다.


안토니오(Antonio) : 당신의 강의를 듣는 동안 제가 종종 들어왔던 두가지 견해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이제 그 견해들이 전보다 훨씬 더 분명해졌습니다. [206] 이상주의자들은 도처에서, 스피노자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는 정말로 훌륭하다는 사실을 제게 확신시켰습니다. 그에 반해 비판서들에서 저는 그 천재의 모든 작품이 눈에는 분명하지만 오성에는 영원히 비밀로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의견들이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군요. 그 견해들의 무의도적인 대칭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로타리오(Lothario) : 저는 우리의 친구에게 물리학을 유일한 것으로 언급하는 듯했던 이유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물리학 뿐만 아니라 아마도 자신의 신화의 진정한 원천이 되어도 좋을 역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위해 옛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이 시대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제 생각으로는 역사적인 견해라고 불릴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루도비코(Ludovico) : 사람들은 삶의 첫 흔적들을 지각하는 곳에서 우선 시작합니다. 그것은 지금 물리학에서이지요.

마르쿠스(Marcus) : 당신의 진행은 약간 빨랐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종종 세부적으로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부탁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당신의 이론은 저에게 교훈적인 장르, 또는 우리의 문헌학자들의 명명하는 것처럼 해설 장르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주었습니다. 이제 저는 지금까지의 모든 구분들의 이러한 교차가 어떻게 필연적으로 시문학에 속하는지 알았습니다. 왜나하면 분명히 시문학의 본질은 바로 사물들, 즉 인간 뿐 아니라 외적인 자연의 이러한 보다 높은 이상적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형성 속에 있는 전체의 이러한 본질적인 부분을 격리시키는 것이 좋을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갑니다.     


안토니오 : 저는 교훈적인 시문학을 낭만주의 시문학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장르로 여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시작품은 원래 낭만적이어야 하고, 심오하고 무한한 의미를 향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그 단어의 포괄적인 의미에서 볼 때 교훈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도처에서 바로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채 이러한 요구를 합니다. 예를 들어 연극과 같은 매우 대중적인 양식에서조차 우리는 아이러니를 요구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건들, 사람들, 간단히 말해 삶의 모든 활동(Spiel)이 실제로 또한 활동으로 받아들여지고 묘사되어질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거기에 모든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전체의 의미만을 고집합니다. 감각, 가슴, 오성, 상상을 일일이 매료시키고 감동시키고 몰두시키고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 전체에 올라서는 순간에 단지 전체를 직관하기 위한 기호이자 수단으로 여겨집니다.


로타리오 : 예술의 모든 신성한 활동들은 세계의 무한한 활동, 즉 영원히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예술작품에 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모사품들입니다.


루도비코 : 다른 말로 하자면, 모든 아름다움은 알레고리입니다. 가장 지고한 것은 그것이 표현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알레고리적으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로타리오 : 그 때문에 모든 예술 작품들과 학문들의 가장 내적인 신비들(Mysterien)은 시문학의 소유물입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출발했고, 그래서 모든 것은 그곳으로 되흘러가야 합니다. 인류의 이상적인 상태에는 단지 시문학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즉 예술들과 학문들은 그리하여 여전히 하나로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의 상황에서는 진정한 시인만이 이상적인 인간이고 보편적인 예술가일 것입니다.


안토니오 : 또는 모든 예술들과 모든 학문들의 전달과 묘사는 시문학의 구성요소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루도비코 : 저는 모든 예술들과 학문들의 힘이 하나의 중심점에서 만난다는 로타리오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신들에게 바라건데, 심지어 수학에서도 여러분의 열광을 위한 자양분을 창조해 주시고, [207] 신들의 기적을 통해 여러분의 정신이 불타오르길 희망합니다. 그러나 저는 물리학 또한 선호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전체와의:번역자) 접촉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물리학은 가설 없이는 실험을 할 수 없습니다. 물리학은 전체에 대한 가설들로 나아가며, 물리학은 자신이 사용하는 가설들에 대한 의식이 없다고 할지라도 원래부터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사실 놀라운 것은 물리학에 기술적인 목적들이 아니라 보편적인 결과들을 다루자마자, 어떻게 물리학이 천지 창조론(Kosmogonie)에 빠지고, 점성술, 신지학 혹은 당신이 평소에 언급하고자 했던 바처럼, 간단히 말해 전체에 관한 신비적 학문으로 빠져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르쿠스 : 플라톤은 이러한 전체에 관한 신비적 학문에 대해서 스피노자만큼 알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의 야만적인 형식 때문에 결코 유쾌하지 못합니다.


안토니오 : 그러나 플라톤이 또한 원래 그렇지 않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스피노자만큼 객관적이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의 친구가 우리에게 사실주의의 신비들 안에 있는 시문학의 원천을 보여주기 위해서 스피노자를 선택한 것은 훨씬 더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는 형식의 시문학을 전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플라톤에게는 묘사와 그것의 완전함과 아름다움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입니다. 그 때문에 이미 그의 형식은 엄격히 말해서 철저히 시문학적입니다.


루도비코 : 저는 연설 자체에서 스피노자를 단지 대표자로서만 인용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좀더 상세하게 하려고 했다면 위대한 야콥 뵈메(Jakob Böhme)에 대해 언급했을 것입니다.


안토니오: 그랬다면 당신은 우주에 대한 이념들이 기독교적 형상 속에서 당신이 다시 불러들이려는 옛 이념들보다 더 나쁘게 나타나는지 아닌지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안드레아: 저는 옛 신들을 존중해 주길 부탁드립니다.


로타리오: 그리고 저는 엘레우시우스(Eleusinischen)의 비교의식을 상기해주길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제가 그것에 대한 제 생각을 종이에 옮겨 적어서 그것을 대상의 품위와 중요성을 요구하시는 여러분들에게 질서정연하고 상세하게 제시할 수 있길 바랬습니다. 오로지 비교 의식의 흔적들을 통해서만 저는 옛 신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저는 그때 지배했던 자연의 관점이 지금의 연구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이미 그것을 받아들일 정도로 성숙되어 있다면, 위대한 빛을 점화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대담하고 가장 강력한, 물론 저는 거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은데, 즉 사실주의의 매우 야생적이고 맹렬한 묘사가 최고의 묘사입니다. 루도비코, 당신은 제게 최소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주셨습니다. 즉 기회가 되면 제가 당신에게 제우스(Zeus)의 양성성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오르페우스의 단편을 소개해드리도록 상기시켜 주십시오.


마르쿠스: 저는 빙켈만(Winckelmann)의 어떤 암시가 생각나는데, 그도 당신처럼 이 단편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카밀라(Camilla) : 루도비코, 당신이 스피노자의 정신을 아름다운 형식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아니면 당신 자신의 견해, 즉 당신이 사실주의라고 부른 것이 더 나은 것입니까?

마르쿠스 : 저는 후자를 선호하고 싶습니다.


루도비코 : 누군가 어떤 그와 같은 것(사실주의:번역자)을 마음먹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단테(Dante)와 같은 방식으로만 가능할 것이며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단테는 정신과 마음에 단 하나의 시만를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으며, 그래서 종종 그것 전체가 묘사될 수 없을지 모른다고 낙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공하기만 했더라면, 그는 충분히 해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안드레아 : 당신은 매우 귀중한 모범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확실히 단테는 몇몇의 축복받은 상황과 말할 수 없이 수많은 어려운 상황들 [208] 속에서도 자신의 거인과 같은 힘을 통해, 그 스스로 완전히 홀로, 그 당시에 가능했었던 정도의 일종의 신화를 발명하고 만들어 낸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로타리오 : 정말로 모든 작품은 자연의 새로운 계시일 것입니다. 작품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Eins und Alles)20)이라는 사실을 통해만 작품은 작품이 됩니다. 오로지 그와 같은 사실을 통해서만 작품은  연구(Studium)21)와 구별됩니다.


안토니오 : 하지만 저는 당신이 말하는 의미에서 동시에 작품들이 되는 연구들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마르쿠스 : 외부로 영향을 미치도록 염두에 두어진 시들은, 예를 들어 신비하지도 포괄적이지도 않으면서 뛰어난 연극의 경우처럼, 이미 그 객관성으로 인해, 우선 오로지 예술가의 내적 형성에 관계되고 그 마지막 목표, 즉 외부를 향한 객관적 작용을 겨우 준비하는 연구들과 구분되지 않습니까?


로타리오 : 단순히 좋기만 한 연극들이라면, 그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에는 독립성, 자기 완결성22)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러한 것에 대해 저는 지금 작품들의 독립성이라고 밖에는 어떤 다른 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이러한 사용을 위해 남겨두고자 합니다. 드라마는 루도비코가 의미하는 것과 비교할 때 단지 응용된 시문학입니다. 그러나 저의 의미에서 작품이라 함은 각각의 경우 당신이 말하는 의미에서는 객관적이고 드라마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안드레아 : 그러한 방식으로는 옛 장르들 가운데 단지 서사적인 장르에서만 당신이 말한 훌륭한 의미의 작품이 가능할 것입니다.


로타리오 : 서사적인 것에서 그 하나의 작품이 또한 유일한 작품이 되곤 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옳은 견해입니다. 고대의 비극과 희극은 그와 반대로 하나의 동일한 이상의 변형이자 다양한 표현일 뿐입니다. 체계적인 결합구조, 즉 구성(Konstruktion)과 조직화(Organisation)을 위해 고대의 비극과 희극은 최고의 모범으로 남아있으며, 제가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들은 작품들 중에 작품입니다.


안토니오 : 제가 향연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약간의 가벼운 음식뿐이군요. 아말리아가 저를 벌써 양해해주어 음식 전체에 대해 제가 각별한 충고를 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1) 원제는 Rede über die Mythologie(1800)이며, 번역은 다음 책을 참고로 하였다. Friedrich Schlegel, Kritische Schriften und Fragmente, hrsg. v. E.Behler u. H.Eichner, Paderbon 1988.


2) 슐레겔의 새로운 신화에 대한 요청은 슐라이어마하의 "새로운 교회" 강령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하와는 달리 슐레겔은 종교적 차원이 아닌 문학 예술적 차원에서 새로운 신화를 요청하고 있다. K.H.Bohrer, Friedrich Schlegels Rede  über die Mythologie, in: K.H.Bohrer(hrsg.), Mythos und Modernität F/M 1983.


3) Willkür란 단어는 보통 "자의"로 번역되는데 여기서는 "자유"로 번역하였다. 슈나이더-코르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 단어는 18세기 당시에는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즉 자의적이고 기분 내키는 대로의 자기 관장이란 의미가 아니라 자유롭고 필연적인 자기 규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참고. 최문규, 독일 낭만주의와 아이러니 개념, 실린곳: 문학이론과 현실인식, 문학동네 2001, 71쪽.


4) 독일어 "Bildung"은 흔히 교양으로 번역된다. 이는 "Bildung"이란 말을 개인의 교양 습득을 통한 전인의 완성이란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는 문화의 축적을 통한 인류의 진보라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교양"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형성"이란 번역어를 선택하였다.


5) Mythologie란 말은 Mythos와 Logos란 단어를 합친 것으로 원래는 "신화론"으로 번역해야겠지만, 우리말 어감상 "신화"로 번역하였다.


6) 슐레겔의 새로운 신화에 대한 요청을 예술의 자율성에 바탕한 새로운 문학론의 선언으로 읽을 경우, "중심점"이란 "상상력의 정수로서 최고의 모범적인 예술작품"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7) "정신의 가장 깊숙한 심연"이란 프로이트적 용어로 "무의식"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프로이트 이전에 "무의식" 테제를 이미 선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의식에 예술 창작의 원천을 두었다는 사실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예술 창작의 과정을 선험적 주체의 수행으로 파악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즉 이들은 의심중심적 담론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8) "신화적인 문학의 본래 근본 형식은 절대적인 카오스이다."(슐레겔, Literary Note Nr.1897)


9) "프랑스 혁명과 피히테의 지식학과 괴테의 마이스터는 시대의 가장 위대한 경향들이다. 이러한 개관에 기분이 상한 사람은 소란스럽지 않고 물질적이지 않은 어떤 혁명도 중요한 것으로 파악할 수 없는 자이며, 인류 역사의 보다 높은 지점에 올라서지 못한 자이다. 대개 풍부한 코멘트를 수반한 변형물들의 집적에 비유되고 그 때문에 고전 텍스트가 사라져가는 우리의 초라한 문화사에서 소란스러운 대중들이 당시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많은 작은 책이 이러한 대중들이 했던 것보다 더 큰 역할을 하였다."(슐레겔, 아테네움 단장 216번)


10) 이 부분은 슐레겔과 동시대 철학자였던 피히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슐레겔은 절대주체에 대한 피히테의 철학을 문학의 자율성을 위해 차용할 뿐 주체에 대한 관심에서 피히테를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피히테식의 주관철학으로부터 독일 초기 낭만주의를 구분하려는 모범적 시도는 이미 벤야민의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 개념"(1920)에서 보여지고 있다.


11) "이상주의적 사실주의"에서 "이상주의적"이란 수식어는 현실을 초월함을 표시하는 기표이고, 그런 맥락에서 "Sur-"란 접두사와 대체되어 사용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낭만주의자들이 요청한 "이상주의적 사실주의"란 일종의 "초현실주의"(Sur-realismus)이다. 68년 학생 운동 당시 독일 낭만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친화성이 거론된 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12) 고대 이탈리아의 농경신으로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크로노스와 동일시 된다. 그러나 사투르누스는 라티움의 초기 왕으로 간주되고, 그의 치세는 풍요롭고 행복한 황금기였다는 점에서 크로노스와는 다르다. 그는 사람들에게 들을 경작하고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로마 사람들은 그가 이탈리아 태생이 아니라, 유피테르 신(제우스)으로부터 도망하여 라티움에 피난한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13) 우라노스(하늘)과 가이아(땅) 사이에서 태어난 신족. 그리스인은 그들을 원시시대에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거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로노스와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티탄 신족이라 부르지 않고, 티탄 신족을 대신하여 우주의 지배자가 된 새로운 신들이다. 이 새로운 신들의 우두머리인 제우스는 자신의 아버지 크로노스와 싸워 이겨 우주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 싸움으로 제우스를 비롯한 다른 신들과 티탄 신족은 서로를 적대시하게 되었는데, 10년 간 계속된 이들 간의 싸움에서 결국 제우스가 승리를 거두게 되고 제우스는 티탄 신족들을 저승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타르타로스에 유폐시켰다. 여기에서는 계몽주의의 이성중심적 담론 내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시인과 사상가들인 야콥 뵈메, 호머, 단테 등을 지칭하고 있다.


14)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 예술의 특징을 "조용한 위대함과 고귀한 단순함"으로 특징지웠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빙켈만의 정식이 인용되고 있는 듯하다.


15) 이러한 "독창성"에 대한 요청이 단순히 창조주에 버금가는 절대적 주체가 "무"에서 창조해내는 행위는 아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예술 창작을 위해 기존에 있었던 예술작품들을 알고 그것들을 상대화시키고 충동시키는 데서도 "독창성"은 발휘될 수 있는 것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16) "Divination"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글 참조. Manfred Frank, Schleiermachers hermeneutische Sprachtheorie und das Problem der Divination, in: Richard Brinkmann(hrsg.), Romantik in Deutschland, Stuttgart 1978. 만프레드 프랑크는 슐라이어마하의 해석학을 종교적 담론으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에 의해서 이미 구조주의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M.Frank, Das individuelle Allgemeine, F/M 1985


17) 성경에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한 최초의 행위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었다.


18) "황금시대"는 네달란드의 신 플라톤학파 계열의 철학자 헴스터후이스(Hemsterhuis)의 이념으로 슐레겔과 노발리스를 비롯한 낭만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 원죄로 인해 인간이 타락한 이후 그리고 바벨탑 사건 이후 인간의 언어는 대상과 일치를 이루던 관계가 파괴되고 공허한 언어, 즉 수다로 전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원래의 언어였던 아담의 언어로 회귀하는 유일한 방법은 수다와 반대되는 부정적 방식인 침묵일 수밖에 없다. 키에르케고르나 니체 또한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수다"와 "침묵"에 대한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20) "하나이면서 전체"(eins und alles)는 헤라클레이토스(Heraklit)의 "hen kai pan"의 독일어 번역이다.


21) "연구"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글을 참조할 것. Norbert Bolz, Der Geist und die Buchstaben, in: Ulrich Nassen(hrsg.), Texthermeneutik, Paderborn 1979.


22) 이 부분에서 슐레겔의 예술의 자율성 테제를 읽어낼 수 있다. "문학의 철학은 그러나 아름다움의 독립성과, 그것이 진실한 것과 윤리적인 것과는 분리되어야 하며, 이러한 것들과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명제와 함께 시작할 것이다."(슐레겔, 아테네움 단장 252번) 즉 예술은 진리나 선함과 구분되는 독자적 영역을 형성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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