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폐허-미로와 기민한 언어- 이덕형 선생님 과제 최종본

 

 

들어가며

마샬 버만은 현대성에 관한 자신의 저서의 제목을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라고 달았다. 견고한 모든 것이 사라진 시대. 하지만 인간은 정말 견고한 것이 없는 세계를 살아갈 수 있을까? 견고한 것은 무엇일까? 견고한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한 것일까? 근대를 둘러싸고 발생한 수많은 논의들은 이러한 의문들을 품고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말 그대로 먼지처럼 대기 속으로 무성히 흩날리고 있어서 좀처럼 파악把握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21세기에 들어서는 컴퓨터와 각종 매체를 통한 사이버 세계의 경험이 실제 경험의 영역으로 침입해 들어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도대체 '현실'이란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해진 상황이다. '견고한 것'이라는 말조차도 전혀 견고하지 않고, 허물어져 가고 있다. 실재와 허구가 뒤섞인 세계가 그 자체로 다시 실재가 되어서 사람들은 견고한 것과 녹아 사라지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 채 어떤 흐름에 떠밀려 살고 있다. 그런데 다시 이 흐름 또한 제각각이어서 그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초월자와의 접속이 끊어졌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추구해야 할 미래가 '지나간 미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심점으로서의 신이 더 이상 응집력을 갖지 못한 채 무기력한 절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종교적 근본주의는 역설적으로 성스러움의 가치가 바닥으로 추락했음을 증명해 준다. 성스러움의 추락은 절대적 정의를 주장하면서 '성스러운 테러'를 감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문명의 역사를 지배해온 '건축에의 의지'가 그 수명을 다했음을 말해주는 징표와도 같다. 건축에의 의지는 리오타르가 거대 서사라고 부른 것의 핵심이다. 이러한 의지의 정체가 폭로되고 그 타당성이 재판에 회부되는 과정은, 19세기 말부터 구축되어온 (제도로서의) 학문이 대중의 일상이 흘러가는 방향을 뒤쫓지 못하고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제자리걸음하게 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즉, 학문성(과학성Wissenschaftlichkeit)과 일상성이 분리되기에 이른 것이다. 대중의 일상은 도시라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도시 공간은 여러 차원의 구조적 힘과 효과들이 각축을 벌이도록 짜여 있는 하나의 움직이는 체계이다. 이 체계의 기본 원리는 누구나 알다시피 자본주의다. 그러나 헤겔이 말했듯이 '알려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으로 파악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자본주의란,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무 많이 써서 그 표면이 닳아버린 동전과 같은 비유에 불과하다. 자본주의를 운영체제로 삼아 작동하는 도시체계의 가장 분명한 상징은 광고다. 이제 광고는 실제 그것이 표현하고 대신하는 상품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세계에 대해서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압축적인 표현을 통해서 진단과 처방을 동시에 제시해 주고 있다.

 

<지금 삶의 구성은 확신(Ueberzeugung)보다는 훨씬 더 사실들의 권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거의 한 번도, 단 한 번도 확신의 토대가 되어보지 못한 사실들에 의해. 이러한 상황에서 참된 문학 활동이 문학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길 바라서는 안 된다 - 그러한 표현 자체가 오히려 문학 활동의 불모성을 보여주는 낡아빠진 말이기도 하다. 문학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행동과 글쓰기가 엄격하게 교대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하려면 괜히 젠 체하기만 하며 일반적인 제스처만 취하고 마는 저서보다 현재 활동 중인 공동체들에 영향을 미치기에 훨씬 더 적합한, 언뜻 싸구려처럼 보이는 형식들, 즉 전단지, 팸플릿, 신문 기사와 플래카드 등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처럼 기민한 언어만이 순간순간을 능동적으로 감당할 수 있다. 온갖 의견이 사회적 삶이라는 거대한 장치에 대해 갖는 관계는 기름과 기계의 관계와 동일하다. 아마 터빈 위에 서서 위에다 기계유를 쏟아부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감추어져 있는 축이나 이음매에 기름을 조금 쳐주는 것이 다일 텐데, 그러자면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의 목표는 견고한 것이 용해되고 있는 세계, 파편화되고 있는 세계의 축과 이음매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름을 쳐주어야 하는 기계가 너무나 크고, 또 그것의 축들과 이음매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 알아내기에는 이 글의 형식과 언어가 기민하기는커녕 둔하고 헐겁기 짝이 없을 것이므로 단 한 걸음의 전진이라도 이루어내기를 바랄 뿐이다.

 

1. 빛과 성스러움

니체가 그리스 문화를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로 나누었을 때, 이러한 이분법의 기저에는 빛과 어두움이 있었다. 서구의 역사는 빛의 은유가 확장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서구 문명의 두 뿌리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교의 성경 속에서 신의 아들 예수는 자신을 길이요 빛이요 진리라 칭한다. 또 다른 뿌리인 헬레니즘의 시작을 연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빛은 곧 진리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리스도교와 플라톤의 철학을 결합시킨 플로티노스의 '유출적 우주관'에 의해 빛은 서구 문명을 지배하는 핵심적인 은유가 된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큰 영향을 르네상스 문화에 끼친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와 예술은 이를 잘 보여준다. 동로마제국은 성스러운 제국이었고, 이 성스러움은 공적인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성스러움은 비잔티움의 문화를 형성하는 연역적 원리 혹은 에피스테메였다. 그리고 성스러움이라는 연역적 원리는 히브리 세계의 절대적 초월성이라는 개념을 내포한 것이었으며, 이것이 그리스 세계의 비례 원리와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 르네상스 문화이다.

 

빛은 또한 우주의 중심인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플로티누스는 일자the one를 태양에 비유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은 당시 세계의 핵심적인 건축물이었던 교회 예술과 장식에 잘 반영되어 있다. 교회는 신의 집domus Dei이며, 따라서 그것은 세계의 중심축이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 건축에는 특히 빛의 효과가 중요했는데, 이를 위해서 고안된 양식이 모자이크와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이콘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른바 거룩한 장소를 정하여 그곳에 신의 집을 건축하고 '빛의 모자이크'로 신과의 소통을 염원했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빛이 가지는 의미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지각하는 빛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전기를 통한 인공의 빛으로 둘러싸인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빛이란 거의 공기와도 같은 평범한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특별한 빛이 있긴 하다. 예컨대 갖가지 색깔과 모양의 전구들로 이루어진 루미나리에 축제의 경우, 거기서의 빛은 의식의 차원으로 떠오른 '새삼스런' 빛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빛은 스테인드글라스나 사원의 높은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신의 빛' 속에서 기도를 올렸던 사람들이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사원에서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특별한 시간을 제외하면, 일할 시간을 알려주는 햇빛 속에서 밭을 일구고 예기치 못한 비를 맞으며 돌아와 어두침침하고 음습한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일상을 반복했을 것이다. 요컨대 그들에게는 빛보다 어둠이 훨씬 익숙했을 것이며, 어둠 속에서의 생활이 그들의 일생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둠이 무섭거나 싫을 때 켤 수 있는 전등스위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원에 들어가는 일은, 그것이 비록 일생에 걸쳐 반복되는 것이었다 해도, 아주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 시간은 어두운 일상에서 벗어나 밝은 기쁨과 황홀경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스위치를 켜고 끄는 일을 아무데서나 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는 현대인의 신체적 무의식은 결코 그런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을 수용하지 못한다. 빛은 어디에나 있고, 하늘이 어두워진다 해도 여전히 세상은 밝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밝음은 사실 언제라도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한 도시의 발전시설에 이상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밝음에 억눌려 있던 어둠은 몇 배나 더 강력한 기세로 몰려와 사람들을 짓누른다. 정전사태를 경험하는 지역의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는 뉴스를 우리는 종종 보고 듣는다.

 

빛이 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관념은 빛이 비추는 자연의 모든 대상이 신의 임재와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신의 성스러운 빛이 이 세계를 비추므로 사람들은 자연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신의 징표로 혹은 초월자의 현현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실은 ‘신의 성스러운 빛’이라는 관념이 생기기 전에 먼저 자연을 외경과 공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원시인들의 감성이 자연에 깃들어 있는 성스러움을 간취해 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연을 두려워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 두려움은 어째서 성스러움에 대한 관념으로 응축되었을까? 그것은 죽음 때문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고 또 그가 보았던 것을 넘어서는 것을 갈망하게 되었던 것은 아마도 죽음을 본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죽음은 최초의 수수께끼였고, 죽음은 인간을 또 다른 신비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 죽음은 인간의 사고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끌어 올리며, 지나치는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인간적인 것에서 신적인 것으로 끌어올린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자연의 여러 장소에서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 반복됨으로 인하여 인간은 그 말할 수 없는 신비에서 초월자를 상상해내게 된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신비였고, 인간의 삶 속에 내재하는 신비였다. 이 신비는 인간의 주거 공간으로부터 죽음의 흔적이 소거된 근대 세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죽음의 흔적이 소거되는 현상은 성스러운 것의 추락과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수세기 이래 우리는 인간의 일반의식 속에서 죽음의 생각이 얼마나 그 편재적 성격과 생동적 힘을 상실해 가고 있는가를 추적할 수 있다. (...) 한때 죽는다는 것은 각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공적 과정이자 또 가장 대표적인 공적 과정이기도 하였다. 임종시의 침대가 왕좌로 변하는-사람들은 활짝 열려진 죽은 사람 집의 대문을 통해 이 왕좌로 몰려들었다-중세의 그림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이러한 죽음이 갖는 공적 과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세가 경과하면서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지각의 세계로부터 점점 더 멀리 밀려나게 되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어나간 적이 없는 집이나 방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 오늘날의 시민들은 한 번도 죽음에 접하지 않았던 공간, 즉 영원성이 사라진 메마른 주거공간에서 살고 있고, 또 만약 그들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게 되면 그들은 그들의 상속자들에 의해 요양소나 병원에 옮겨져 차곡차곡 안치된다.>

 

죽음의 흔적, 다시 말해 시체를 안치하여 보관하고 의식을 치르는 전통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독교 문화는 유해를 신성한 공간에 들여놓은 최초의 문화이다. 이 일은 먼저 성자들과 순교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이어서 고위 성직자들과 군주들에 의해 이어졌다.> 장례를 치르며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올리는 행위는 영원성에 대한 지향이고, 초월자에게로 다가가는 접근 통로 중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영원성에 대한 갈망과 초월자와의 합일에 대한 소망으로 탈바꿈시켜주는 공간은 다름 아닌 교회였다. 교회 건축은 이러한 두려움과 소망이 복잡하게 얽혀서 만들어낸 온갖 상징과 장식으로 가득 차게 된다. 앞에서도 언급한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 이콘이 대표적인 장식이지만, 교회가 자리하는 위치와 건축공법, 자재 선택에도 그러한 상징적인 의미는 충만하게 들어있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의 변화와 지리기후적 요건들에 대한 고려가 결합되는 양상의 변화가 바로 우리가 예술 양식의 변화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예컨대, 바실리카 양식에서 돔 양식으로의 변화, 혹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 양식으로의 변화 등은, 각 지방에서 그때그때의 역사적 변화와 정치적 국면들이 접합되면서 상징적 의미의 재해석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건축 양식과 공법의 변화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통합적 원리는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인 권력으로 작동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성스러움이 공적인 개념이자 연역적 원리로서 국가를 지배했다는 사실은 교회 건축에 힘입은 바가 크다. 교회의 위치는 세계의 중심을 의미하고, 그 내부의 공간구획은 어두움과 악의 세계로부터 인간의 세계를 거쳐 신의 세계로 올라간다는 의미를 현동화한다. 또 천장과 벽면에 새겨지거나 그려지는 그리스도와 성모, 성인들의 상과 이미지는 ‘탈현실’적 형상으로 신의 위엄과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교회에 들어가 신께 예배를 드리는 인간은 이 우주의 질서 속에서 중간자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플로티노스의 유출론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 피치노인데, <피치노는 플라톤적 우주를 설명하는데 플로티노스의 위계질서를 수정하여 다섯 가지 위계질서의 범주를 마련하고 인간을 그 플라톤적 우주의 대연쇄 속의 한 가운데에 위치시켰다.> 전우주를 관장하는 신의 의지에 은총을 입은 인간은 소우주이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피치노와 동시대에 살았던 피코는 <인간은 우주에서의 중간적 위치로 인해 상하 단계의 피조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므로 어느 곳을 택하든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며, 선택 여하에 따라서 인간은 감각적 세계 혹은 영적 세계에 머물 수 있다고 언급한다.> 근대적 주체의 탄생을 예고하는 듯한 그의 텍스트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크나큰 힘을 부여하고 있다.

 

<오, 신의 위대한 관대함이여! 오, 인간의 놀라운 커다란 행복이여! 인간은 그가 선택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그가 의지하는 대로 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그대는 모두 신과 같은 존재요, 위대한 신의 아들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는 그보다 앞서 이슬람으로부터 들어온 기하학과 원근법에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원근법은 인간의 시선이 신의 시선을 대체한 것이며, 원근법과 함께 인간의 시선은 자연에서 초월자와 그의 섭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과 그 내면이 투사된 풍경을 발견한다. 이것은 레지스 드브레가 말하는 "시선의 세 시대" 가운데 "예술의 시대"에 해당된다. <우리는 우상과 더불어 '주체 없는' 시선(우상이 우리를 본다)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제 영상적 시각과 더불어 '시선 없는 비전'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술의 시대는 '시선의 배후에 주체' 즉 인간을 놓는다. 이 혁명은 유클리드 원근법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르네상스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한 비잔티움 제국의 예술에서는 주체 없는 시선이 존재했으며, 이러한 원리를 역원근법이라 부른다. <하지만 원근법 이전의 이콘은 우선 시선의 주체를 단 하나로 고정시키지 않고, 그것을 화면 외부에 위치시키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 주체의 시선을 중심으로 축소되는 비례와 구도를 채택하지 않고, 입체파처럼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을 상징적으로 텅 비우거나 크게 부각시키는 '데포르마시옹'의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역원근법과 주체 없는 시선은 서구 라틴 문화의 기하학주의, 즉 '건축에의 의지'에 밀려 소멸되고 말았다.

 

2. 건축에의 의지

가라타니 고진은 생성, 변화, 발전하는 유기적 세계관을 가진 진화론자들이 다수였던 그리스 철학에서 세계를 계획된 작품으로 보는 소수 제작론자들(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 존속하고 나아가 주도권을 잡게 된 사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소수파의 관점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관념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건축가로서의 신'이라는 관념이다.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과학을 지탱하는 것은 수학이나 확실하고 엄밀한 토대가 아니라 하나의 신념, 즉 위대한 건축가인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세계는 질서 잡혀 있으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인식 가능하다는 신념이라고 주장했다.>

 

건축에의 의지는 플라톤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플라톤은 사실 비례와 조화라는 관념을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전해 받았다. 그리고 이에 더해 이집트에서 수학을 배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건축에의 의지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수학 때문이었다. 플라톤의 철학과 그리스도교가 결합되면서 절대적 초월자라는 히브리적 관념이 체계의 중심에 자리하게 되었고, 모든 문화와 예술, 그리고 신학적 논쟁까지도 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그 저변에는 항상 비례와 조화를 근간으로 삼는 수학적 태도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표면 위로 거세게 분출된 계기가 발생했다. 바로 이슬람으로부터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하학이 그것이다. 이 유입이 일어난 시기는 르네상스가 융성하기 2-3세기 전이다. 이 시기부터 서구 라틴 세계에는 이른바 '수량화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원근법으로 상징되는 건축에의 의지는 사실 그보다 훨씬 더 큰 혁명을 몰고 왔다. 기하학주의에 기반하여 초월자의 편재적 시선을 차단하고 인간의 시선을 열어젖힌 르네상스 시대에는 시계의 발명으로 상징되는 균질적 시간관이 자리를 잡게 되었고, 복식부기로 상징되는 본격 화폐경제가 세계 무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은 간단없이 가속화되어 19세기의 산업혁명과 리얼리즘 문학으로 이어지게 된다. 단일한 하나의 시선을 상정하는 기하학주의의 원근법은 이제 자연으로부터 성스러움의 흔적을 말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와 평행하게 수량화에 기초한 상업무역, 즉 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거대한 흐름에 직면하여 초월자의 시선은 더 이상 대상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말하자면 통합적ㆍ연역적 세계관이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성스러움 대신 내면이 투사되는 '풍경'을 발견하게 한 원근법은 이러한 파괴의 첨병이었다. <자기 주변의, 바로 여기를 본다는 것, 가장 가까운 것, 특권과 기적과 광기에 시선을 맞춘다는 것은 반사 작용이 아니라 정복이다. 구체적인 것이 추상적인 것을, 또는 특수성이 일반성을 정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믿어지는 것이 보이는 것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히 본다는 것은 그렇게 사람이 말하는 것들, 집단적 기억의 형편없이 잘못된 지식, 전설과 옛날이야기와 금언의 토양, 수 천 년 동안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으로만 말하게 했던 태고적부터 전해져온 소문으로서는 가슴을 찢는 괴로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내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가슴을 찢는 괴로움을 '효율'로 대체하는 과정에 적응하게 되었다. 수학은 확실한 학문이었고, 그 확실성은 실제 생활에서 확인되는 것이었다. 화폐로 거래되고 부기로 계산되고 장부로 기록되는 무역과정은 지중해의 상인들을 세계 최고의 부자들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평화롭고 조용하지 않았다. 기하학에 기반한 여러 응용적 과학 지식들이 이슬람세계로부터 들어와 르네상스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고, 이것은 곧장 상인들과 군주들의 이해관계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유럽 각국의 군주들과 교황은 앞다투어 과학-기술자들을 고용하거나 자체 양성하여 무기 개발에 열을 올렸고, 이 열기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의 변화에는 근본적으로 초월자의 추락이라는 사태가 자리 잡고 있다. 전유럽적(당시에는 전세계였을 것이다) 응집력을 발휘하며 규제적 원리로 작용하던 초월자의 자리가 텅 빈 제로기호가 되어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초월자의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는 '확실성', 더 정확히는 기하학적-수학적 확실성이라는 유사초월자(the pseudo-transcental)가 사람들을 추동했다. 이것은 경제 영역에서는 등가 교환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화폐로, 예술 영역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반영한다고 믿게 만든 원근법으로, 철학과 학문의 영역에서는 객관성과 합리성이라는 정언명법으로 실현되었다.

 

이제 모든 신비적인 것, 설명되지 않는 것, 비합리적인 것, 주관적인 것들이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흥미롭게도 세계어로서의 라틴어가 해체되고 민족어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제 신앙의 문제는 더 이상 제도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난제가 되어버렸다. 이 두 과정을 함께 추동시킨 인물이 바로 마르틴 루터이다. 이와 함께 정치와 종교가 더 이상 봉합 불가능할 정도로 분리되었고, 잔존해 있는 신앙과 내세에의 두려움을 무기 삼은 교황과, 화폐와 무기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황제/군주들 간의 권력 다툼은 수 백 년간의 역사를 피로 물들였다. 초월자의 원리가 공백화되자 누구라도 힘이 있으면 초월자의 위치를 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향방은 더 이상 초월자의 대리인에게로 되돌려질 수 없었다. 점점 더 강고해지고 정교해지기 시작한 건축에의 의지는 객관성과 합리성, 그리고 효율성을 독점하면서 유일한 원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연역적 통합적 원리로서, 다시 말해 제일 공리로서의 초월자를 지워버린 수학의 체계는 결코 안정적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초월자의 빈 자리가 여전히 그 체계 안에서 어떤 작용을 가하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구 사상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지식의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위기 때마다 새로워지는 건축에의 의지다. 이 의지는 혼돈스럽고 다양한 생성 속에서 구조와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하나의 비합리적인 선택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 이는 단지 많은 것들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기실 원급법이나 복식부기, 그리고 수학과 기하학 등은 모두 넓게 보아 '형식주의'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들이다. 형식주의의 기원은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플라톤에게서 찾을 수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발현되고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레지스 드브레가 '예술기'라 부른 시기부터였다. 드브레는 이 시기를 정리하기를, 그라포스페르(인쇄술 이후)라는 이미지 원리를 가지며, 재현적이고 물리적이며, 사실적인 것을 결정적 지시물로 갖는다. 그리고 광원(光源)은 외부로부터의 물리적인 빛이며, 종교에서 역사로 이행하는 역사적 맥락 속에 있다고 하였다. 종교에서 역사로의 이행은 곧 예술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비잔티움 시대나 혹은 그 이전 시대에 '예술'이라는 근대적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러한 행위와 작품이 모두 종교적인 의미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고 탄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의 탄생기는 따라서 형식주의의 발흥기와 겹친다. 형식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예술은 삶과 분리되어 이루어지는 독특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되었지만, 그 시작 단계에서는 형식주의와 잔존하는 종교적 의미의 영향을 모두 받고 있었다. 이 문제를 소설, 즉 근대문학과 결부시킨 가라타니 고진도 비슷한 견해를 내어놓는다.

 

<소설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근대소설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리얼리즘에 있습니다. 즉 이야기(허구)이지만 그것이 리얼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것이 근대소설이 씨름했던 문제였습니다. 파노프스키는 회화의 리얼리즘을 가능하게 한 것을 대상과 그것을 파악하는 형식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대상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평범한 인간이나 풍경을 주제로 삼게 된 것입니다. 형식(상징형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기하학적인 원근법의 채용입니다. 이것은 고정된 한 점에서 투시하는 도법에 의해 2차원 공간에 깊이가 있는 모양새를 부여하는 고안입니다. 실은 소설의 리얼리즘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형식주의는 르네상스 이후 근대 세계의 틀을 조직했을 뿐 아니라 구체적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입법하고 판결하는 원리로 군림했다. 형식주의는 공공연하게 드러난 채 활동하지 않았고, 언제나 저변에서 드러나지 않게 작용했다.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에게서 건축의 은유가 텍스트의 구성 및 내용에 있어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형식주의는 '바닥없음'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의 첫 번째 공리가 자의적인 것이므로. 초월자를 지우고 난 뒤 남은 빈 자리가 체계 안에서 무리 없이 작동할 때에는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이 항상 제대로 작동하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주의의 체계, 근대세계의 체계가 '잘못' 운영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예컨대 형식주의의 일종으로서 화폐에 의한 등가교환을 원리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공황이 발생하는 것은 어떤 외부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그 체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메커니즘에서 귀결되는 필연적인 단계로서 그러한 것이다. <역사적인 이야기도 얽히게 됩니다만, 「제로기호」를 메타 수준으로 설정해 두고 그 밑에서 시스템을 안정화시킨다는 것은, 전근대의 암흑 속에서 항상 이루어져 왔던 일입니다. 그것을 마르크스는 스스로 바로잡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비중심화된 구조]라든지 [중심 없는 관계의 체계] 등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사실은 [부재의 중심], 즉 [메타 수준으로 유보된 중심]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죠. "제로 기호론은 중심을 파괴한다"는 논의는 기본적으로 오류이며,「제로기호」야말로 형이상학인 것입니다.> <하지만 제로에 호소하는 것은 초월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드는 것은 주체가 아니라 空이고 심지어는 주체 자체도 그 공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담론은, 만드는 것은 신이라는 명제의 단순한 대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대의 파국이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기정사실화된 시기부터 사람들은 기저에 숨어있던 형식주의에 대하여 반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성은 담론들 간의 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고, 이 전쟁의 전선은 형식을 모조리 파괴하고 영원히 표류하는 삶을 살자고 외치는 쪽과 형식에서 어떤 구원의 표지를 찾아 세워보고자 하는 쪽으로 나뉘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어쩌면 일상이라는 거대한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3. 무너지지 않는 일상성

형식과 형식주의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체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해도 이미 존재해 왔고, 또 작동하고 있는 이 체계를 우리가 간단히 무효화하거나 해체해 버릴 수는 없다. 그것은 형식주의가 완전히 안정된 체계라고 믿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관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형식주의는 여전히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형식주의는 구체적인 세목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원리를 관철시켜 세계의 거시적 미시적 틀을 형성해 왔고, 이것이 가지는 효과는 아직도 압도적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은 형식주의를 빼버리면 붕괴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때 '일상'이라는 개념은 의식의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은 넓은 개념이다. 형식주의가 구현된 정도는 지역과 국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형식주의가 유일한 세계공통언어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형식주의 자체가 자리하고 있는 메타차원의 추상적 언어로 섣불리 그것을 무화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신에 형식주의가 만들어 놓은 일상성에 대한 미시적이고 기민한 탐구를 통해 그것들을 '게릴라전처럼' 공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 전략에는 버려진 초월자의 자리를 다시 고려해 보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어떤 실체를 대리하는 이미지가 재현을 넘어서서, 그 실체를 대신하다가 나중에는 그 실체와는 무관하게 기형적으로 증식하는 이미지의 분열을 중세의 이콘 파괴론자들은 이콘 속에서 이미 보고 있었던 것일까? 이콘 공경론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를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콘 파괴론자의 입장에 서서 오늘날과 같은 이미지의 복제와 자기 증식을 경계해야 하는 것일까? 이콘과 우상 이미지 사이의 차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매개하는 상징적 역할의 수용여부에 달려 있다고, 동시에 그것은 감각적인 신성과 물질적인 환영 사이의 머뭇거림이 아니겠는가라고, 어쩌면 바로 그것이 우리 시대의 종교가 처한 갈림길의 상황인지도 모르겠다고>

 

형식주의의 불안정성 내지는 폭력성 때문에 무조건 그로부터 '탈주'해야 한다는 생각도, 초월자에 대한 사상이나 철학은 현실을 떠나 있는 것이므로 거부해야 한다는 견해도 이미 어떤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 서구 문명이 제패한 세계의 현상황은 그 소소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건축에의 의지'에 의해 축조되고 가동되고 있으며, 또한 그 의지가 이루어 놓은 체계의 가장 중요한 자리는 '비어 있음'으로 인해 그 체계가 구조로서 기능하게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 '중심 없는 구조'등의 표현이 상정하는 제로기호는 부정신학의 입장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렇게 말했다. 신에 대해서 그가 어떤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오직 그가 아닌 것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 "신에 대해서, 그가 그 자신 속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 말을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있으며, 존재 그 자체를 초월하는 존재이므로 어떤 방법으로도 그에게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에카르트나 뵈메와 같은 신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신은 '순수한 무(네앙)'이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부정적 현상의 하나인 것인가. 신은 존재를 초월하는 자이고, 신은 무를 통해 존재의 뿌리를 만드는 자인가.>

 

그러나 신비를 신의 징표로 해석할 수 있는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던 고대, 중세인들에 비해 근대인들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다. 신비도 기적도 모두 음험하고 냄새나는 미치광이들의 소관이 되어버렸고, 믿음 자체에 대해서 치유할 수 없는 의심이 마음 깊숙이 고여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믿는 것은 오직 돈뿐이다. 흔히들 '돈의 노예'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이 말을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하다'라는 뜻으로 쓴다면,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하지 않은 시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 먹고 사는 문제가 절실한 것은 욕망의 도착에 의한 것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데, 거식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드브레의 시대 구분에서 오늘날은 제 3기 비디오스페르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경제계가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며, 가치와 분배에 관련된 것까지도 결정한다. 구매력의 문제이다.> 경제계, 다시 말해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것은 오늘날 진부하기까지 한 상식이다. 그러므로 이 상식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보다 한 걸음 나아가, 이 상식이 어떻게 인간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앙리 르페브르의 선구적 작업이 말하고 있는 것을 들어보자.

 

<'정신적' 마모와 물건의 폐기가 순식간에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욕구 또한 노쇠해져 새로운 젊은 욕구가 노쇠한 욕구를 대체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욕망의 전략이다! 둘째, 이제부터는 생산능력이 생활ㆍ물건들ㆍ집ㆍ도시ㆍ'주거'의 유동성을 극대화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생활'은 이제 더 이상 일상성 속에 고정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이며 실제 관행이기도 한 폐기는 덧없음을 오로지 일상성을 수익성화하기 위한 방법으로만 간주한다. (...) 수동적으로 당하는 덧없음이 아니라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기꺼이 원하고 열망하는 질적인 덧없음은 한 사회계급, 즉 유행과 미를 만들어내고 세계를 활동무대로 삼는 그러한 한 사회계급의 전유물이다. (...) 덧없음의 예찬은 현대성의 본질임이 판명되었다.>

 

그렇다. 덧없음이 이 시대의 유일한 구호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덧없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의식적인 확인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확인이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덧없음은 이 시대의 집단 무의식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거룩한 신과의 소통을 위한 예배 장소였던 교회와 사원들은 오늘날 거의 모두 박물관으로 대체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거기서 성스러움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색다른 것the exotic을 찾는다. 심지어 그 공간에서 역사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사람도 거의 없다. 박물관이 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심리를 보다 더 깊이 해부해 보자면, 그들이 거기서 찾는 것은 오직 '그곳에 가보았다'는 사실뿐이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자본이 되어 교양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교양의 역할을 대신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덧없는 행위를 사진을 통해 극명하게 표현한다. 사진은 그들이 거기에 가보았다는 상징자본=교양의 증거자료가 되어준다. 쉼터나 휴양지가 되어버린 불교의 사원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서도 성스러움의 흔적이 말소된 것은 다를 바 없다. 그들은 하나님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분'이라는 말을 입으로는 하면서, 일요일마다 사업과 학업과 결혼이 '복되게' 잘 이루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빈다. 그들은 덧없음을 매주 반복되는 기도와 예배로 표현하고 있다. 근대인들은 자연과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세계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덧없음을 유일한 삶의 원리로 삼아 지탱할 수 밖에 없다. 드브레에 따르면, 우상기에는 성스러운 것, 예술기에는 아름다운 것이 경배되었다면, 영상기인 오늘날에는 새로운 것이 경배의 대상이 된다. 이 새로운 것의 다른 이름은 '유행'이다. 일찌기 벤야민은 이 새로움의 성격을 간파했다. <벤야민에게 유행은 새로움의 외양만을 구성하는 혁신과 변화에 대한 이미지이자 환영에 불과했다. 새로운 것이 있었던 것으로부터 구별되기 힘들듯이 새로움은 전혀 새로움이 아니다. (...) 유행은 새로운 것처럼 가장하고 있는 반복동일성의 끝없는 생산과 소비이다.> 덧없음과 유행은 그러므로 서로 긴밀히 연동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이 문제에 대하여 문학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근대의 산물로서 근본적으로 내면을 지향하는 소설의 종말, 즉 근대문학의 종말을 언급하면서 그는 일본인들에 대하여 <예를 들어, 오로지 타인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을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강한 자의식은 있지만 내면성이 전혀 없는 타입의 사람이 많습니다>라고 평하고 있다. 초월자의 자리가 철거된 이후 문학이 담당하던 역할이 본격적인 영상 시대가 도래하자 쓸모없고 무기력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즉 사람들은 더 이상 내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고, 고유한 가치를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는 덧없음이 집단무의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관점을 뒷받침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참조대상의 몰락>이라는 원인이 자리하고 있다.

 

<백 년 전에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말과 담론(discours)의 주변에 견고한 지시대상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것들 사이에는 서로 연관이 있었고, 어떤 단일한 체계가 형성되지는 않은 채 논리적 일관성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결집이 있었다. (...) 그런데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여러 가지 압력(과학ㆍ기술ㆍ사회변화) 밑에서 지시대상들이 하나씩 폭파되어 날아가 버렸다. '양식良識'과 '이성'의 통일체는 흔들리고 와해되었다. '상식' 앞에서 현실의 절대적 성격은 사라졌다. 정통한(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인지의 대상인 이 현실에 또 다른 현실, 또 다른 감성세계가 중첩되고 대체되었다.>

 

이 현상의 기원은 중세 시대 보편 논쟁에서 찾을 수 있다. 개개의 사물들을 묶어주는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실재론(현대 철학에서의 실재론과는 다르다. 굳이 구별하자면 '보편실재론'이라 할 수 있다)과 보편자란 그저 이름일 뿐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개개의 사물들 뿐이라는 유명론의 대립이 그것인데, <참조대상의 몰락>이라는 현상은 유명론의 입장이 극단화되어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명론의 승리인데, 이 승리가 철학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서 제어할 수 없는 폭발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움의 지옥'으로 지속되고 있는 일상성에서 가장 주목을 요하는 것은 광고다.

 

4. 이콘에서 광고로

<오늘날 사물의 핵심에 가장 본질적으로 가 닿는 시선은 광고라고 불리는 상업적 시선이다. 광고는 자유롭게 관찰할 여지를 없애버리며, 영화의 스크린에서 차가 점점 더 거대해지면서 우리 쪽으로 흔들리며 질주해 오듯이 사물들을 바로 우리 눈앞에까지 들이민다.>

 

자본주의의 시대는 곧 광고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광고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상품 선전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성의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광고는 가장 세밀하고 눈에 띄지 않는 공간에까지 침투해 들어가며, 수용자가 미처 의식하지도 못하는 찰나의 순간까지도 포착하여 이용한다. 레지스 드브레가 영상기의 지배 위상을 광고에서 찾은 것은 핵심을 파악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다. 드브레가 말하는 우상기에 이미지를 주도했던 이콘이 초월자를 향한, 영원을 향한 창窓fenestra ad aernitatis의 역할을 하였다면, 광고는 새로움과 유행, 덧없음을 무한히 되비추는 거울spectrum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거울은 끝없이 이어지는 미로의 형태로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이 미로 속에서 유유히 산책한다. 창문은 없다. 빛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며, 저 먼 하늘에서 비쳐오는 영원의 빛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미로의 초기 형태를 간파한 사람은 벤야민이다. 그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바로 이 미로에 대한 비판적 탐구이고, 이 미로를 폭파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기획된 것이었다. <파사주(아케이드)는 꿈꾸는 집합체의 도피처일 뿐만 아니라 현대 대도시가 꿈꾸는 대상들의 본거지이다. 파사주는 무대라기보다는 상품이 전시되는 환경이다. (...) 파사주는 상품이 숭배되는 상품물신성의 장소이다.>

 

파사주는 백화점의 전신이며, 실내공간과 거리를 결합하여 광고(당시에는 전시)를 집약적으로 발산하여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공간이었다. 벤야민은 이 공간에서 '소비하지 않고' 다만 산책하는 인간인 거리산보자flâneur에서 혁명적 가능성을 엿보기도 했다. 오늘날 도시 공간은 광고들로 뒤덮인 거대한 파사주이며, 이 공간이 구획되고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따라 도시인들의 신체적 무의식이 직조되고 가공된다. 그런데 도시 공간을 가득 채운 광고는 끊임없이 폐기와 혁신의 진자운동을 반복해야 한다. 유행에 뒤떨어진 낡은 광고를 내버려두는 것은 도시, 특히 대도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자운동은 국지적으로 다시 말해 지역을 선택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러한 광고의 홍수 속에서도 '낡은 것'들이 버려진 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벤야민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파사주도 사실 당시에 이미 건축되기 시작한 백화점에 의해서 버려진 폐허였다. 벤야민은 이러한 폐허와 파편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역사를 구성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벤야민은 도시를 하나의 텍스트로 보았다. 그는 글을 통해 도시라는 텍스트를 '보여주고자' 했다. <대도시에 존재하는 것들은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원근법을 부정한다. 도시의 재현은 연속적이지 않은 단편적인 문학 양식과 스타일을 요구한다.> 이질적이고 모순적인 것들이 서로 병치ㆍ중첩되어 있는 대도시의 사물들을 보기에는 원근법적 시선이 적절치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도시의 사물들, 광고들은 시선의 편재와 시간의 병치를 통한 영원성, 동시성을 한 화면에 담아내는 비잔티움 예술에 비교될 수 있다. 다만 이때 중요한 차이는 후자가 초월자의 존재에 의해 뒷받침되고 추동된 것인 반면, 전자는 일상성의 덧없음에 의해 추동되는, '방향도 미래도 없는' 허무주의의 소산이라는 점이다. 이콘에서 광고로의 이행은 초월자를 상실한 현재의 상황을 대표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나오며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타래를 가진 덕에 테세우스는 다이달로스가 지은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 『큐브』의 주인공들이 갇힌 미로는 고정된 미로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고 변형되는 미로였다. 이미지들이 무한히 반복ㆍ변형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장악해 버린 오늘날의 세계는 어떤 미로일까? 이 세계가 미로이고, 실재를 향한 탈출구는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낸 이는 칸트였다. 탈출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칸트의 철학은 '비판'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실타래를 건네줄 아리아드네, 즉 초월자를 상실한 오늘날의 인간들은 이 미로를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혹시 '미로를 헤쳐 나가야 된다는 생각' 자체가 오히려 미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성급히 미로를 빠져나가야 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도시 공간이 사실은 미로이고, 그 인위적인 빛 속에 폐허의 잔해를 잔뜩 숨기고 있는 것임을 폭로하는 '비판 작업'이 선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 작업의 토대 위에서 '미로를 헤쳐 나가야 한다'는 강박 대신 '미로를 폭파해야 한다'는 새로운 전망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 두 작업은 근본적으로 '계몽'의 기획이다. 그리고 이 기획은 '원근법적 단일 시선'이 바라보는 계몽과는 다른 것이다. 이 기획이 수단으로 삼는 것은 '기민한 언어'이고, 이러한 언어를 가진 파괴자들이 미로 안 여기저기서 게릴라처럼 거울을 부수는 작업을 하는 것이 -특히 비판적 학문을 하는 자들에게- 과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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