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리처드 로티
- 생활정보
- 2007. 6. 17. 13:11
약 2백 년 전에,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기보다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유럽의 상상력을 붙잡기 시작하였다. 프랑스 혁명(1789년)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어휘 전체가 그리고 사회적 제도라는 스펙트럼 전체가 거의 하룻밤만에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선례는 지식인들에게 유토피아 정치학이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되게 해주었다. 유토피아 정치학은 신의 의지와 인간의 본성 양자에 관한 물음들은 모두 제쳐놓고, 여지껏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사회창조를 꿈꾼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낭만주의 시인들은 예술이 더 이상 모방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가의 자아창조라고 생각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었다. 그 시인들은 문화에서 전통적으로 종교와 철학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 계몽주의자들이 과학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자리가 예술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S. 29)
진리는 저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장들이 저 바깥에 [인간의 정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저 바깥에 존재하나, 세계에 대한 서술은 그렇지 않다. 세계에 대한 서술들만이 참이나 거짓이다. 세계 그 자체, 인간의 서술 활동의 도움을 받지 않는 세계 그 자체는 참이나 거짓일 수가 없다. (S. 32)
세계는 말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말할 뿐이다. (S. 34)
18세기 말엽에 어렴풋이 파악된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재서술됨에 따라 좋거나 나쁘게,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게, 유용하거나 쓸모없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S. 36)
낡은 메타포들은 끊임없이 죽어가면서 문자적인 것이 되어 새로운 메타포를 위한 출발의 발판과 화석으로 봉사한다. (S. 51)
데이비슨은 이 논점을 이렇게 피력한다: 메타포적 표현은 그 문자적 의미와는 다른 별도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의미를 갖는다고 함은 언어 놀이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함을 말한다. 그러나 정의 자체가 말해주듯이, 메타포들이란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데이비슨은, "메타포를 만든 자는 그 인지내용을 전달하려 하고 그 메시지를 얻고자 하는 해석자라면 반드시 파악해야 할 그러한 인지 내용이라는 것과 메타포가 연합된다는 테제"를 부정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대화 중에 메타포를 끼워넣는 것은 마치 얼굴을 찌푸릴 만큼 상당한 시간 동안 갑자기 중단한다거나, 호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거나, 주변의 여건 중 어떤 특징을 가리킨다거나, 상대방의 뺨을 후려친다거나, 상대방에게 키스를 퍼붓는 것과 같다. 텍스트 속에 메타포를 끼워넣는 것은 마치 이탤릭체를 쓴다거나, 삽화를 넣는다거나, 괴상한 구두점이나 배치방식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S. 54)
한 언어 놀이 속에서 고정된 자리가 없는 문장을 발언한다는 것은 실증주의자들이 제대로 말했듯이 참도 거짓도 아닌 어떤 것, 혹은 해킹Ian Hacking의 용어를 빌리자면 "진리치 후보"가 아닌 어떤 것을 발언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것은 확증도 반증도 할 수 없으며, 찬성의 논변도 반대의 논변도 할 수 없는 그런 문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것이 얼마 후에라도 진리치 후보로 <변화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것이 내뱉어지기보다 맛본 뒤에 삼켜진다면, 그 문장은 되풀이될 것이며 마음에 들게 되고 널리 퍼질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점차 습관화된 용법을 얻어 언어 놀이 속에서 낯익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 해서 그 문장은 메타포이기를 멈추게 된다. 달리 말해 그것은 우리 언어 중 대부분의 것이 그렇듯이 하나의 죽은 메타포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S. 55)
플라톤주의자와 실증주의자는 메타포에 대해 환원주의reductionist view를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언어가 갖고 있는 한 가지 심각한 목적 곧 실재의 표상을 위해 메타포는 부연 가능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는 표현주의expressionist view를 표방한다. 낭만주의는 메타포란 이상스럽고 신비하고 멋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낭만주의자들은 메타포에 대해 "상상력"이라 불리는 신비스런 능력, 즉 그들이 자아의 한복판 가슴 속 깊은 핵심에 놓여 있다고 상정하는 그 능력에 귀속시킨다. 플라톤주의자와 실증주의자들은 메타포적인 것에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데 비해 낭만주의자들은 문자적인 것에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전자는 언어의 요점이 우리의 바깥에 놓여있는 숨겨진 실재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후자는 언어의 목적이란 우리들의 내부에 놓여 있는 숨겨진 실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S. 56)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없으며, 다만 어떤 구체적인 잃음에 대한 두려움만이 있다.(S. 64)
우리 시대의 중요한 철학자들은 낭만주의 시인들을 추종함으로써 플라톤과 결별하고자 하였으며, 자유를 우연성에 대한 인식으로 간주한 사람들이다.(S. 68)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원인을 추적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원인에 관한 이야기를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S. 72)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 우리가 한 친구를 도울 때 끝없는 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끔찍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더 큰 고통들을 깡그리 망각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S. 78)
카텍시스[cathexis: 심적 에너지가 특정 인물, 사물, 관념에 쏠리는 것](S. 86)
죽음에 대한 대담한 시인의 두려움은 곧 미완성에 대한 두려움인데, 이것은 세계와 과거를 재서술하는 어떠한 프로젝트도, 또 각자의 특이한 메타포를 부과함으로써 자아창조를 하려는 어떠한 프로젝트도, 주변적이며 기생적이라는 점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수 관계에 놓여 있다. 메타포들은 낡은 용어를 낯설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용법은 이미 친숙한 방식으로 사용중인 다른 낡은 낱말들을 배경으로 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전적으로 메타포"인 언어는 아무런 쓰임새가 없는 언어일 것이며, 따라서 언어가 아니라 단지 웅얼거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언어란 표상이나 표현의 매개물이 아니라고 우리가 동의한다고 해도, 언어란 의사소통의 매개물, 사회적 교섭의 도구, 한 사람을 다른 인간 존재와 묶어주는 방식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S. 93f)
재서술되지 않은 과거에 기생적이지 않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의 자비심에 의존되지 않는 삶은 없다라고. (S. 96)
모든 인간 존재는 그들의 행위, 그들의 신념, 그들의 인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용하는 일련의 낱말들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친구들에 대한 칭찬, 적들에 대한 옥설, 장기적인 프로젝트, 가장 심오한 자기 의심 그리고 가장 고결한 희망 등을 담은 낱말들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때로는 앞을 내다보면서 때로는 뒤를 돌아다보면서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낱말들이다. 나는 그러한 낱말들을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라고 부르겠다.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은, 만일에 그러한 낱말들의 값어치를 의심한다면 그 낱말의 사용자는 의존할 비순환적인 논변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낱말들은 사용자가 언어와 더불어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며, 그것들 너머에는 오직 어찌할 수 없는 피동성, 혹은 힘에의 호소만 있을 따름이다. 마지막 어휘의 비교적 작은 부분은 "참이다", "좋다", "옳다", "아름답다" 등과 같은 엷고도, 유연하며, 어디에나 있는 용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더 큰 부분은 가령 "그리스도", "잉글랜드", "전문적 기준들", "고상함", "친절", "혁명", "교회", "진보적", "엄밀하다", "창의적이다" 등과 같이 더 두텁고, 더 고정적이며, 더 편협한 용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S. 145f)
그의 선행자들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그들의 명제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언어가 진부하다는 것이었다. (S. 155)
우리 아이러니스트들에게 다른 마지막 어휘를 제외하곤 그 무엇이라도 마지막 어휘에 대한 비평일 수 없다. 재-재-재서술을 제외하곤 재서술에 답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S. 157)
재서술이란 아이러니스트의 특별한 징표가 아니라 지식인의 태생적인 한 특징이다. (S. 174)
가령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향은, 재서술을 당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자아나 진정한 이익을 드러내주는 일에 해당된다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그러한 재서술을 자신이 수용하는 일이야말로 과거에 자신을 억압해 왔던 존재들 중 어느 존재보다도 더 강한 파워와 제휴를 굳게 다지는 일로 믿어져 버린다. (S. 174f)
그러므로 나는 아이러니스트가 비난받는 까닭은 굴욕을 주는 성향 때문이 아니라 파워를 부여해 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S. 175)
그러므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단지 자신의 깨우침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마지막 어휘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실제적이며 잠재적인 굴욕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른 마지막 어휘를 가능한 한 많이 익힐 필요가 있다. (S177)
아이러니스트들에게 그렇듯 문제되는 과거란, 아이러니화할 수 없는 어휘, 즉 재서술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어휘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던 책이다. 아이러니스트 이론가는 그 책들, 바로 그 특정한 문예 장르에 정통한 문학비평가로 생각될 수 있다. (S. 186)
가능한 모든 권위 있는 인물들을 고통을 당하는 동료들로 재서술함으로써 권위의 개념에서 권위를 제거하려 한 프루스트의 노력은, 형이상학자의 단어를 도구로 사용하기보다는 단지 그 공명에 귀기울이려 한 하이데거의 시도와 평행관계를 이룬다. (S. 221)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널리 사용되는 마지막 어휘 속에서 현재 언급할 수 있는 목적의 범위와 <새로운> 마지막 어휘를 만들어내려는 목적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런 구분을 적용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기준을 근거로 그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을 구분할 수 있다. 후자에 속하는 책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바로 그러한 책이 가장 중요한, 즉 장기적으로 볼 때 위대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책이다.
두 번째로 이 후자에 속하는 책들은 새로운 <사적인> 마지막 어휘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책과 새로운 <공적인> 마지막 어휘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책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었던가?"등의 물음에 답하기 위한 마지막 어휘이고, 후자는 "내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의 어떤 점일까?"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한 어휘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두 물음이 함께 제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S. 260f)
거의 같은 시기에, 낭만주의 시인들은 예술이 더 이상 모방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가의 자아창조라고 생각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었다. 그 시인들은 문화에서 전통적으로 종교와 철학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 계몽주의자들이 과학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자리가 예술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S. 29)
진리는 저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장들이 저 바깥에 [인간의 정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저 바깥에 존재하나, 세계에 대한 서술은 그렇지 않다. 세계에 대한 서술들만이 참이나 거짓이다. 세계 그 자체, 인간의 서술 활동의 도움을 받지 않는 세계 그 자체는 참이나 거짓일 수가 없다. (S. 32)
세계는 말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말할 뿐이다. (S. 34)
18세기 말엽에 어렴풋이 파악된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재서술됨에 따라 좋거나 나쁘게,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게, 유용하거나 쓸모없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S. 36)
낡은 메타포들은 끊임없이 죽어가면서 문자적인 것이 되어 새로운 메타포를 위한 출발의 발판과 화석으로 봉사한다. (S. 51)
데이비슨은 이 논점을 이렇게 피력한다: 메타포적 표현은 그 문자적 의미와는 다른 별도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의미를 갖는다고 함은 언어 놀이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함을 말한다. 그러나 정의 자체가 말해주듯이, 메타포들이란 그렇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데이비슨은, "메타포를 만든 자는 그 인지내용을 전달하려 하고 그 메시지를 얻고자 하는 해석자라면 반드시 파악해야 할 그러한 인지 내용이라는 것과 메타포가 연합된다는 테제"를 부정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대화 중에 메타포를 끼워넣는 것은 마치 얼굴을 찌푸릴 만큼 상당한 시간 동안 갑자기 중단한다거나, 호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거나, 주변의 여건 중 어떤 특징을 가리킨다거나, 상대방의 뺨을 후려친다거나, 상대방에게 키스를 퍼붓는 것과 같다. 텍스트 속에 메타포를 끼워넣는 것은 마치 이탤릭체를 쓴다거나, 삽화를 넣는다거나, 괴상한 구두점이나 배치방식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S. 54)
한 언어 놀이 속에서 고정된 자리가 없는 문장을 발언한다는 것은 실증주의자들이 제대로 말했듯이 참도 거짓도 아닌 어떤 것, 혹은 해킹Ian Hacking의 용어를 빌리자면 "진리치 후보"가 아닌 어떤 것을 발언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것은 확증도 반증도 할 수 없으며, 찬성의 논변도 반대의 논변도 할 수 없는 그런 문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것이 얼마 후에라도 진리치 후보로 <변화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것이 내뱉어지기보다 맛본 뒤에 삼켜진다면, 그 문장은 되풀이될 것이며 마음에 들게 되고 널리 퍼질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점차 습관화된 용법을 얻어 언어 놀이 속에서 낯익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 해서 그 문장은 메타포이기를 멈추게 된다. 달리 말해 그것은 우리 언어 중 대부분의 것이 그렇듯이 하나의 죽은 메타포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S. 55)
플라톤주의자와 실증주의자는 메타포에 대해 환원주의reductionist view를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언어가 갖고 있는 한 가지 심각한 목적 곧 실재의 표상을 위해 메타포는 부연 가능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낭만주의는 표현주의expressionist view를 표방한다. 낭만주의는 메타포란 이상스럽고 신비하고 멋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낭만주의자들은 메타포에 대해 "상상력"이라 불리는 신비스런 능력, 즉 그들이 자아의 한복판 가슴 속 깊은 핵심에 놓여 있다고 상정하는 그 능력에 귀속시킨다. 플라톤주의자와 실증주의자들은 메타포적인 것에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데 비해 낭만주의자들은 문자적인 것에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전자는 언어의 요점이 우리의 바깥에 놓여있는 숨겨진 실재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후자는 언어의 목적이란 우리들의 내부에 놓여 있는 숨겨진 실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S. 56)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없으며, 다만 어떤 구체적인 잃음에 대한 두려움만이 있다.(S. 64)
우리 시대의 중요한 철학자들은 낭만주의 시인들을 추종함으로써 플라톤과 결별하고자 하였으며, 자유를 우연성에 대한 인식으로 간주한 사람들이다.(S. 68)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원인을 추적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원인에 관한 이야기를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것이다. (S. 72)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서 우리가 한 친구를 도울 때 끝없는 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끔찍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더 큰 고통들을 깡그리 망각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S. 78)
카텍시스[cathexis: 심적 에너지가 특정 인물, 사물, 관념에 쏠리는 것](S. 86)
죽음에 대한 대담한 시인의 두려움은 곧 미완성에 대한 두려움인데, 이것은 세계와 과거를 재서술하는 어떠한 프로젝트도, 또 각자의 특이한 메타포를 부과함으로써 자아창조를 하려는 어떠한 프로젝트도, 주변적이며 기생적이라는 점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과 함수 관계에 놓여 있다. 메타포들은 낡은 용어를 낯설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용법은 이미 친숙한 방식으로 사용중인 다른 낡은 낱말들을 배경으로 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전적으로 메타포"인 언어는 아무런 쓰임새가 없는 언어일 것이며, 따라서 언어가 아니라 단지 웅얼거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언어란 표상이나 표현의 매개물이 아니라고 우리가 동의한다고 해도, 언어란 의사소통의 매개물, 사회적 교섭의 도구, 한 사람을 다른 인간 존재와 묶어주는 방식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S. 93f)
재서술되지 않은 과거에 기생적이지 않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의 자비심에 의존되지 않는 삶은 없다라고. (S. 96)
모든 인간 존재는 그들의 행위, 그들의 신념, 그들의 인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용하는 일련의 낱말들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친구들에 대한 칭찬, 적들에 대한 옥설, 장기적인 프로젝트, 가장 심오한 자기 의심 그리고 가장 고결한 희망 등을 담은 낱말들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때로는 앞을 내다보면서 때로는 뒤를 돌아다보면서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낱말들이다. 나는 그러한 낱말들을 "마지막 어휘final vocabulary"라고 부르겠다.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은, 만일에 그러한 낱말들의 값어치를 의심한다면 그 낱말의 사용자는 의존할 비순환적인 논변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낱말들은 사용자가 언어와 더불어 끝까지 함께 하는 것이며, 그것들 너머에는 오직 어찌할 수 없는 피동성, 혹은 힘에의 호소만 있을 따름이다. 마지막 어휘의 비교적 작은 부분은 "참이다", "좋다", "옳다", "아름답다" 등과 같은 엷고도, 유연하며, 어디에나 있는 용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더 큰 부분은 가령 "그리스도", "잉글랜드", "전문적 기준들", "고상함", "친절", "혁명", "교회", "진보적", "엄밀하다", "창의적이다" 등과 같이 더 두텁고, 더 고정적이며, 더 편협한 용어들을 포함하고 있다. (S. 145f)
그의 선행자들에 대한 헤겔의 비판은 그들의 명제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언어가 진부하다는 것이었다. (S. 155)
우리 아이러니스트들에게 다른 마지막 어휘를 제외하곤 그 무엇이라도 마지막 어휘에 대한 비평일 수 없다. 재-재-재서술을 제외하곤 재서술에 답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S. 157)
재서술이란 아이러니스트의 특별한 징표가 아니라 지식인의 태생적인 한 특징이다. (S. 174)
가령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향은, 재서술을 당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자아나 진정한 이익을 드러내주는 일에 해당된다는 느낌을 갖게 해준다. 그러한 재서술을 자신이 수용하는 일이야말로 과거에 자신을 억압해 왔던 존재들 중 어느 존재보다도 더 강한 파워와 제휴를 굳게 다지는 일로 믿어져 버린다. (S. 174f)
그러므로 나는 아이러니스트가 비난받는 까닭은 굴욕을 주는 성향 때문이 아니라 파워를 부여해 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S. 175)
그러므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단지 자신의 깨우침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마지막 어휘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실제적이며 잠재적인 굴욕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른 마지막 어휘를 가능한 한 많이 익힐 필요가 있다. (S177)
아이러니스트들에게 그렇듯 문제되는 과거란, 아이러니화할 수 없는 어휘, 즉 재서술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어휘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였던 책이다. 아이러니스트 이론가는 그 책들, 바로 그 특정한 문예 장르에 정통한 문학비평가로 생각될 수 있다. (S. 186)
가능한 모든 권위 있는 인물들을 고통을 당하는 동료들로 재서술함으로써 권위의 개념에서 권위를 제거하려 한 프루스트의 노력은, 형이상학자의 단어를 도구로 사용하기보다는 단지 그 공명에 귀기울이려 한 하이데거의 시도와 평행관계를 이룬다. (S. 221)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널리 사용되는 마지막 어휘 속에서 현재 언급할 수 있는 목적의 범위와 <새로운> 마지막 어휘를 만들어내려는 목적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런 구분을 적용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기준을 근거로 그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책과, 그렇지 못한 책을 구분할 수 있다. 후자에 속하는 책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바로 그러한 책이 가장 중요한, 즉 장기적으로 볼 때 위대한 차이를 만들어내는 책이다.
두 번째로 이 후자에 속하는 책들은 새로운 <사적인> 마지막 어휘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책과 새로운 <공적인> 마지막 어휘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책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었던가?"등의 물음에 답하기 위한 마지막 어휘이고, 후자는 "내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의 어떤 점일까?"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한 어휘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두 물음이 함께 제기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S. 26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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