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

마키아벨리의 저작을 로마 전통의 재수용으로 보거나 로마 정신의 부활로 해석한다면 와전히 틀릴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글을 쓰게 된 동기는 "고유한"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로마의 국가론을  쓴 이들은 두 가지의 동기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출발했는데, 그것은 로마의 관습과 역사를 찬양하거나(키케로가 이에 해당한다), 혹은 궁핍한 시대의 체험에서 오는 것만은 아닌 학문적인 숙고들을 편안한 시대에 서술하는 것(타키투스)이다. 요컨대 그들(플라톤의 모방자인 키케로 또한)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를 여러가지로 해석할 뿐 아니라 그것을 또한 변화시키려는" 시도로서의 국가론이 아니라 다소간 강하게 덧입혀진 역사서술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마키아벨리의 저작들은 모든 사람들을 엄습했던 암울한 시대에 생겨났으며, 이 사람들은 정치적 층위에서 사유하는 것을 이해했고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완전한 붕괴와 몰락을 함께 겪으며 괴로워했던 이들이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의 내적 분열과, 도덕과 권력의 완전한 몰락, 그리고 무엇보다 이탈리아가 프랑스와 독일 신성로마제국 등 외국 권력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것(주권의 상실)에 대해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모든 정치적 범죄, 간계와 흉계, 야만적 폭력의 찬양, 절대적 국가 권력에 대한 칭송, 요컨대 모든 정치적 비도덕성을 마키아벨리의 탓으로 돌리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단어는 정치적 범죄행위와 그에 대한 찬양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사실 정치적 파렴치범, 권력자 그리고 독재자들이 항상 그의 논증을 자의적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자신들의 범죄행위에 대한 전거로 이용해 왔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젊은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반 마키아벨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때조차 그것은 정치적인 정직함에 대한 한갓 입에 발린 거짓말이었을 뿐이다. 정치적 실천 행위에 있어서 그는 순수한 마키아벨리스트였기 때문이다. 니체가 마키아벨리에게 공감했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쉽다.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의 소국들과 도시국가들을 길들이기 위해 노골적인 방책을 제시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그가 용병부대의 배치를 추진한 것도 당시의 군사전략에 비추어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또한 그가 무제한적인 군주권력을 제안한 것도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분열상황은 다른 해결책을 허락하지 않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전의 플라톤처럼, 그리고 그로부터 끌어온 착상으로부터 마키아벨리는 개별국가형태의 발전과정을 서술한다. 근친상간으로 인해 변질되는 군주정, 다음에는 귀족정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과두정이 오며, 이는 다시 민주주의로 이어지게 되고,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의 무절제한 자유로 인해 무정부주의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무정부주의는 필연적으로 다시 군주정을 산출하며, 이로써 원환운동이 완결된다.

우리가 플라톤에게 있어서 독재자는 결코 악한 자로 미리 전제되지 않고, 비록 그에게 이기적인 동기가 있다고 해도, 오히려 민주주의보다는 상위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마키아벨리가 일종의 폭군과 왕의 혼합물인 군주에게 지배자 유형의 긍정적인 모습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플라톤이 기사계급과 이로부터 선출된 지배자의 악덕, 즉 <<국가의 명예를 위한>> 거짓과 사기, 말하자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보았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마키아벨리에게서도 똑같은 동기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기는 플라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서도 전혀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아마도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이런 표현방식은 세 개의 대척적인 개념들, 즉 occasione, fortuna, virtu의 세 개념으로부터 생성된 것일 게다. 그는 이 개념들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다. occasione는 정치적인 우연을 의미한다. fortuna는 정치적인 선요소들의 영역, 이를테면 기후나 지정학적 위치 등이며, 이 요소들은 우연적인 것이고 인간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의 눈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가장 부정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그것들이 불특정한 심급에 있어서 국가의 Ausgeliefertsein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의 비참함은 사람들이 너무나 fortuna의 요소들에 의해 휘둘린 채 국가 운명을 능동적으로 조종하지 않았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fortuna에 대해 군주의 덕을 대비시켰는데, 그는 군주가 자신 안에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를 통합하여 가지고 있어야 하며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책략과 속임수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군주는 또한 국가를 위하는 일이라면 파렴치한 행위를 주저해서도 안 된다. 요컨대 덕은 더 이상 고대로마의 <덕virtus>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간계와 교활함, 잔인함과 지배욕이 우선하던 그 당시의 정치적 실천과 관련을 갖는 것이었다. 수백년 동안 지속된 이탈리아의 정치적 무관심(이 나라는 주지하다시피 476년 이후로 줄곧 외국 권력의 각축장이었다)을 고려하면, 마키아벨리가 행동하는 것을 호소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단순히 분열된 나라였던 것만이 아니라 여러 권력들(스페인,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교회, 노르만인들)에 의해 쪼개지고 점유된 나라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민족주의자에게 수단의 선택에 있어서 특별히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마키아벨리에게는 개인의 도덕과 국가의 도덕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을 명백히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마키아벨리의 사유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 항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에게는 개인에 대한 전통적인 도덕가치를 상대화하거나 나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의 도덕이었고, 또한 여기서는 -그리고 이 점이 적어도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Il Principe>>에 대해서는 특히 중요한데-유토피아적 척도를 가지고서 존재해야 하는 것을 서술하는 규범목록을 확정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주어진 것들에서 출발했으며, 그가 본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에 대한 유사-기술을 제공하려 했을 뿐이다. 그의 서술이 규범체계라 불릴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며, 오히려 그 반대다. 그로서는 그러한 체계보다는 그 시대의 경멸스런 상태에 대한 묘사와 그가 "외국의 야만족들"에게서 인식했고 반드시 국가정치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던 윤리적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누군가가 마키아벨리에게 이런 것이 그의 도덕적 신념이라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는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국가도덕을 "상황윤리"라 주장할 것이다. 예의, 법,  그리고 질서와 같은 고상한 개념은 전혀 적용될 수 없는데, 그에게는 단순히 목적-의도-수단의 층위에서만 움직이는 실용적 태도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그로서는 이탈리아를 굴욕과 노예상태로부터 건져내려는 자신의 주된 과업에 소용되는 수단이라면 높이 사는 것만이 관심사일 수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가치위계는 다음과 같다. 유능함-지배-명예. 그가 지배와 여타의 것에 대비해 명예를 강조한 것은 그에게 권력뿐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기꺼이 수용해주는 지지자들 또한 중요했다는 점을 암시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Discorsi..>>라는 책에서 우리는 조금 다른 마키아벨리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첫 번째 책에서, 야만족들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 무제한적 권력을 가지고 국가를 통치할 수 있어야 하는 군주를 요청했다.(페트라르카도 이러한 요청을 했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Il Principe>>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가 교회에 대하여 격렬한 비판자의 입장을 취했다는 점, 나아가 도덕의 부패와 이탈리아 정치의 종말의 책임을 교회에 돌렸다는 사실은 새롭고 흥미롭다. 이런 까닭에 약 천년 전 서로마 제국의 군사정치적 분열을 승리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교회의 덕이었다는 주장도 자못 흥미롭다. 그러나 시대는 단 한 번만 바뀌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교회에 대한 비판이 더 정당하다 하겠다. 그가 유사한 방법, 즉 그것이 필연적인 한에서의 무제한적 비도덕에 대한 것을 추천한 한에서만 이 비판은 상대화된다(es die Staatsraeson erfordert, wie dies so schoen heisst). 언젠가 그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인간성, 충성심, 경건함이 사라진 지 오래인 곳에서 새로운 지배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잔인함, 배덕, 불경함이라네. 그리고 잔인함, 배덕, 불경함이 잠깐이라도 지배했던 곳에서 인간성, 충성심, 경건함은 전혀 힘을 쓸 수 없다네."

<<Il Principe>>가 당시의 상황에 결부된 것만이 아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저작이라면, 그의 <<Discorsi..>>는 이탈리아인으로서가 아니라 로마인으로서 느낄 수 있는 당시 르네상스인의 표현물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천년 간의 치욕과 수치를 떨쳐내고 동포들에게 그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려 시도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저작은 영광스런 로마에 대한 찬가요, 위대하고 강한 세계와 그들의 가엾은 후손들의 그것을 적나라하게 대비하고 있는 작품이다. 천년 동안의 단절을 극복하고 연속성을 증명하여 "제국의 부활"을 호소하고자 그는 노력했다. <<Discorsi..>>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민족주의자였고, 바로 이런 점에서 후대의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이 그를 추모했던 것이다.

우리가 그를 비-도덕주의자(그에게 있어서 도덕의 층위는 기껏해야 사적 영역에서나 운위되는 것이다) 혹은 적어도 절대적(객관적)으로 통용되는 규범체계에 저항하는 도덕적 상대주의자로 본다면, 그가 자신의 원리들이 일반화가능성의 관점에서 지지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시험해 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고, 단지 보편적으로 승인된 최고가치(자유와 해방)만을 인정했고, 방법론을 세우거나 가능한 결론들에 대해 고찰해 보지도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있어서 유죄판결을 내려야 한다. 자신의 나라의 <sacro egoimo>를 높이지 못하는 불가능성, 모든 나라가 따르게 될 유사원칙이 무엇인지를 묻는 물음을 스스로 던져볼 수 없는 불가능성은 그의 이론의 부정적 측면이다.

인문주의적 실용주의의 상속자인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인문주의 인간상의 이론적 결함으로부터 "인간 본성"의 규정에 많은 시사를 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본 것이 아니라, 나쁜 본성이 아닌 동물적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충동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인간의 충동본성은 변화하지 않으며, 이 충동으로부터 윤리적 정치적 행위가 나오는 것이지, 고귀한 이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그가 "부정적 인류학"을 세우려 한 것인지 아니면 당시의 인간에 대한 (가감없이) 적확한 묘사를 주려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렇게 본다면 그는 근대 심리학자와 똑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그는 행복과 불행은 정신적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라 보았다. 이때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그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본성이 인간을 강제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아무도 자신의 충동본성을 바꿀 수 없고, 또한 우리는 습득된 행동방식을 바꿀 수조차 없음이 명백하다고 보았다. 이로써 그가  기독교의 교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나 하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는 인문주의-실용주의 시대정신 속에서 숨쉬며 살았고, 의심할 바 없이 "인간 본성"의 관점에서 이론적인 결함은 확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19세기의 심리학을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과 같은 통찰을 가지고 인간을 파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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