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달되지 않는 삶-영화<밀양>

니체의 철학은 '관점주의'라 일컬어진다. 그의 화려심오한 수사와 은유들을 외면하고 속되게 끌어와서 그 관점주의를 '각자의 삶'이라 번역해보자. 삶은 각각이다. 삶은 건네어질 수 없고, 건네 받을 수 없다. 공기와 빛은 가장 필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무나 '당연'해서 잘 의식되지 않는 것들의 대명사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한계현상이라 불러보자. 이 한계현상에 속하는 것들로는 앞서의 둘 이외에 가족, 건강, 사랑 그리고 '지금, 이곳'이 있다. 그런데 가족, 건강, 사랑은 사실 뭇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추구하는 것들이어서 한계현상이라 부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제 열거한 것들이 모두 삶이라는 한계현상 속에 포함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부름은 타당하다. 이 셋 이외에 '지금, 이곳'은 마치 공기나 빛처럼 한계현상의 극한이라 할 수 있다. 대개의 인간은 수많은 '지금, 이곳'을 놓치고 또 놓친 끝에 어렵사리-죽음에 가까워서야- 자신의 '지금,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놓친 수많은 '지금, 이곳'은 결코 양도되거나 전달될 수 없다. 되물릴 수 없는 일회성, 그것이 '지금, 이곳'이다. 공기, 빛, 가족, 건강, 사랑 그리고 '지금, 이곳'의 삶은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결국, 언제나 이미, 각각이다.

영화 <밀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글머리를 열었는데, 이제 진짜 영화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두 마디 사족만 더 붙여두고 가겠다. 그 하나는 이 글이,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전달되지 않는 삶에 대해 쓰여지는 것이기에 전달이 아니 되기를 바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므로 이 글이 그저 온전히 하나의 유일한 관점이 되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무망한 바람이겠지만, 그런  까닭에 이 글은 잡문 에세이로 나아갈 것이다.

영화를 요약하면, 신혜의 굴곡진 삶의 바닥에 대한 것이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온 신혜는 카센터 사장 김종환을 만난다. 김종환에게 신혜는 밀양이 어떤 곳이냐 묻는다. 이 서른 아홉의 노총각은 밀양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대신, 그 도시의 경기불황, 사람들의 말씨, 인구현황 등으로 밀양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한다. 그에게 밀양은 늘 마시던 공기와 늘 쬐던 햇빛이다. 그런 그에게 신혜는 '밀양'이라는 지명의 뜻을 풀이해 준다. 비밀 밀, 볕 양. 비밀의 햇빛. 신혜에게 밀양은 남편이 입버릇처럼 추억하던, 그래서 매개된 추억의 장소이며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곳이다. 요컨대 신혜의 밀양은 비밀스런 햇빛을 쬘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같은 밀양에 살지만, 각기 다른 밀양에 속해 있는 신혜와 종환. 이들의 평행선은 굽어질 줄 모른다.

그런데 신혜의 새로운 시작은 곧 절망으로, 암흑으로 떨어진다. 피아노학원 개업기념으로 떡을 들고 찾아간 옷가게에서 굳이 참견을 하는 신혜. 볕도 들지 않는 가게를 검은 색으로 인테리어를 했기 때문에 장사가 잘 안 된다고. 어색한 첫 인사가 더욱 어색해진 순간이 지난 며칠 뒤, 미용실에서 옷가게 주인은 뒷담화를 통해 보란듯이 신혜의 운명을 예고한다. 첫 인사에서 남의 가게 인테리어에 대해 참견하고, 죽은 남편 고향이라고 애 데리고 와서 사는 약간 이상한 (미친!) 여자, 그 피아노학원 원장. 아들 준이의 그럴싸한 웅변실력에 흥이 난 신혜가 동네 아주머니들-그 속에는 옷가게 주인도 있다-과 술자리를 가진 후, 신혜는 정말로 점점 이상한 여자가 되어간다. 아들 준이가 납치된 것이다. 인텔리하진 않지만(가짜 상장), 침착하고 똑부러진 성격의 신혜(옷가게 주인의 뒷담화를 받아넘긴 모습). 그러나 납치범의 전화를 받으면서부터 심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납치범의 전화 후, 그나마 의지하던 종환을 찾아 카센터로 달려가지만, 세상 모르고 신나게 노래를 불러대는 그의 모습에 신혜는 옷섬을 추스르며 뒤돌아선다. 평행선은, 굽어질 줄 모른다.) 경찰에 신고도 못한 채 납치범의 지시에 따라 돈을 전해주는 신혜. 자동차 기어를 잘못 놓은 채 시동이 켜지지 않자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른다. 그녀의 햇빛, 아들 준이가 죽어간다.

아들 준이를 화장터의 재로 남기고 돌아선 신혜,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온 곳에서 주저 앉고 만다. 그녀의 평행선이 다가와 묻는다. "신혜씨, 뭐 따뜻한 거라도 한 잔 하실래예?" 어긋장나는 물음의 연속, 신혜의 대답. "왜 그랬을까요? 왜 그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의 눈을 내가 피했을까요?"

빚에 쫓긴 학원원장(준이가 다니던)이 납치범으로 밝혀진 후, 신혜의 분노와 절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정리되어 가는 듯 보인다. 상처받은 자들을 위한 부흥회에서 목가슴이 터져라 절규한 후 신혜는 하나님을, 교회를, 기도를 부여잡는다. 볕이 들지 않아서 제 손으로 전구를 킨 것이다. 교회를 나가기 전, 준이의 사망신고를 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신혜는 가슴을 쥐어짜며 호흡곤란을 보였었다. 숨 쉴 공기가 없었다. 그러나 교회를 나가고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순간순간 느끼면서부터 '가슴을 누르는 듯한 아픔'이 사라졌다(고 그녀는 '간증'한다. 아멘). 볕 대신  전구불빛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듯 보였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종환은 -정말로 아무 이유 없이- 어느 새 교회의 주차관리위원이 되어 있다. 정말로 믿음 때문에 교회 나오는 거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할 수 있느냐는 신혜의 물음에 종환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믿음 때문인 것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몰라서이다. 이유가 무엇인지. 그는 자신의 삶에만 비추이는 비밀스런 빛 따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기 때문이다. 제 몸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줄기차게 신혜 주위를 맴돌면서도, 제 친구들의 추궁에는 그저 "신혜씨하고 내하고는 그런 간계가 아이라카이"라고 밖에는 이야기를 못한다. 신혜가 자신에게만 고유한 빛이라는 것을 그는 아직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알지 못한다. 그렇게 신혜를 따라다니면서도, 신혜의 볕이 왜 사라졌으며, 왜 숨이 막히게 되었는지 그는 고민해 보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종환이 보기에 공기와 빛은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똑같다.

숨을 쉴 수 있게 된 신혜가 생일을 맞아 큰 결심을 한다. 아들의 납치살해범 면회를 가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의 큰 사랑으로 그를 용서해주기 위해서다. 마음으로 용서를 하면 됐지 굳이 꼭 가야겠냐는 종환의 만류가 예사롭지 않다. 아니나다를까, 면회는 드디어, 결국, 그리고 정말로 신혜를 바닥으로 몰고간다. 자신에게만 주어져야 했던 소중하고도 절실한 그 볕이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그놈'에게도 이미 비추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건네주기 전에, 벌써. 자기는  이미 용서받았다고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로 그는 신혜에게 말하고 있었다. 신혜가 용서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를 용서한 것이다. 이 기막힌 배신. 신혜는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그 쓰러짐의 순간 이전에 종환은 교인들과 함께 납치범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신통해 하고 있다. 멀어져 가는 평행선. 경찰에 붙잡혀 온 납치범의 뒤통수를 (소심하게도!) 갈기며 "멀 쳐다보노!"하며 소리치던 그만큼의 무심함보다 2배는 더 멀어져 가는 평행선. 변화도 굴곡도 요란하게 궂은 날씨도 없다, 그의 삶에는. 언제나 '약간 흐림'일 뿐이다.

이제 정말 이상한 여자가 되어버린 신혜는 하나님의 그 처절한 배신에 대해 복수를 감행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이 위태롭다. 칠흑같은 밤에 가파르고 거친 산길을 홀로 방황하는 모습. 게다가 신혜에게는 이제 조그마한 후레쉬빛조차 없다. 한밤중에 호흡곤란(납치범의 전화)을 호소하는 신혜에게서 (눈치없게도!) 식사약속을 받아낸 종환의 흥겹게 들썩이는 어깨는, 비극적 슬픔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다음날, 한껏 들떠 식사를 기다리는 종환을 버려둔 채 신혜는 자신에게 그 가증스런 하나님 따위를 전도한 원흉인 약국 김집사의 남편을 유혹해 드라이브를 가고, 들판에서 섹스를 한다. 훤한 대낮, 들판 위에서 끙끙대는 남자를 품에 안고 신혜는 하늘을 향해 쏘아붙인다. "보여?...보이냐구?" 발기가 잘 안 되는 김집사 남편(그는 장로다)이 하는 말을 듣고 신혜는 구토를 해 버린다. "그만합시다, 이선생. 하나님이 보시는 것도 같고..."

극도의 흥분상태로 신혜가 종환을 찾아가기 전, 그는 혼자 카센터에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다. 엄마와 통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전화한 엄마에게 그는 짜증을 낸다. "내 기분도 쫌 생각을 해주야지..." 그가 드디어 자기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찾아온 신혜가 그에게 묻는다. "나랑 섹스하고 싶어요?"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실성한 여자처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그저~" 화가 난 종환은 물건들을 때려 부순다. 여전히, 그는 모른다. 그 실성한 노래소리가 고통의 신음소리라는 것을. 아니, 알지만 이해 못한다. 신혜의 밀양에 그토록 궂은 날씨가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밀양도 흐리다. 그가 신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에는 이렇게 써 있다. "이런 사랑도 있다..." 신혜 동생의 말처럼 그는 정말로 신혜가 좋아할 만한 타입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신혜를 사랑한다. 아무 이유, 없다.

화내는 종환으로부터 도망나온 신혜가 밤거리를 중얼거리며 걷는다. 여전히, 아니 그전보다 더 위태롭다. 준이가 죽기 전 그녀는 환한 대낮에도 좌우의 차를 살피며 길을 건넜다. 그런데 이제 깜깜한 밤인데도 차 따위는 아랑곳 없이 길을 건넌다. 비틀거린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 는 약국 김집사와 장로를 향해, 배신자 하나님을 향해 돌을 던진다. 집으로 돌아와 온 집안에 불을 다 킨 채 그녀는 손목을 긋는다. 길거리로 뛰쳐나가 울부짖는 그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눈물이 난다. 캄캄한 밤 홀로 낯선 산속에 혼자 버려진 사람처럼 절망적으로 그녀가 울부짖는다. 눈물이, 흐른다. 그녀의 새로운 시작점, 비밀스런 빛의 도시, 밀양에서.

신혜의 퇴원날, 신혜의 동생이 차 안에서 종환에게 묻는다. "밀양은 어떤 곳이에요?" 종환은 신혜도 똑같이 물었다며 웃는다. 그리고 그의 대답도 변함없다. 여전히 그에게 사람사는 곳은 다 똑같다. 그리고 그의 밀양은 맑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퇴원 후 신혜가 머리 단장을 하고 싶다 해서 찾아간 미용실. 그곳에서 신혜는 준이의 납치살해범의 딸을 다시 만난다. 소년원에서 미용기술을 배웠단다. 몇 마디 말을 힘들게 주고 받은 뒤, 신혜는 결국 뛰쳐나간다. 그녀에게 드리워진 음지가 너무나 끈질기다.

길거리를 걷고 있던 그녀를 누군가 부른다. 옷가게 주인이다. 인테리어를 밝고 화사하게 바꿨다 한다. 그리고는 매출이 조금 늘었단다. 신혜가 웃는다. 힘겨워 보이는 웃음지만, 그래도 웃음이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마당에 거울을 두고 저 혼자서 머리를 자르려는데, 종환이 슬쩍 들어온다. 거울을 들어준다. 마당 한 켠에 볕이 들었다. 이제 평행선은 만날 수 있을까?

신혜의 삶은 우리에게 전달된 것일까? 10원짜리 동전 하나에도 수없이 많는 사연이 들어있다는 그런 말로, 누구나 사연은 있다는 말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일까? 신혜의 이야기, 영화 <밀양>은 그저 '억수로 재수없는' 한 여자의 인생이야기로 추상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내게 '그렇게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전달되고 나면, 그렇게 다 똑같은 게 되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빛이 음지로 전달되면, 음지가 양지로 바뀌어 버리듯, 그래서 빛이 언제나 전달되는 대신 음지를 만나 언제나 양지가 되듯.

평행선이 만나기를, 아니 그 암시만이라도 주기를 나는 바랐다. 그러나 내 바람은 아마도 헛된 것일 게다. 평행선은, 평행선이다. 그리고 그 각각이 휘어지고 굽어지더라도 그것들이 서로 만나거나 겹칠만큼은 아니 될 것이다. 삶은 한계현상이다. 그 속에서 만남의 착각, 소통과 전달의 가상은 아마도 가능하고 또 필연적이어서 그것들이 삶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겠지만, 결국 삶들은 각각이다. '지금, 이곳'의 삶. 각자의 삶. 삶들. 밀양들. 음지는 크고 깊으며, 볕은 한 조각이다. 밀양이 작고 좁은 도시이듯. 여기에도 아무런 이유는 없다. 니체는 이 아무 이유없음을 견디고 긍정하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것이 비록 착각이고 가상이라 해도, 다른 삶을 만나야만 견딤과 긍정은 가능한 것이 아닐까? 결국 신혜의 밀양이 종환의 밀양과 만나는 기적을 꿈꿀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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