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토마스 홉스(1588-1679)

홉스는 말메스버리의 웨스트포트에서 태어났고, 14세에 이미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했으며, 1607년에 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취득한다. 그후 교사가 되어 바론 카벤디쉬의 아들과 함께 1610년부터 3년 동안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의 사유는 많은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잠시 동안 프랜시스 베이컨을 중심으로 모여든 학자들의 그룹에 속해 있었지만, 결코 경험론의 지지자는 아니었다. 이보다 더 강하게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가 두 번째로 유럽여행을 할 당시(1629-31) 유클리드의 <<기하학 요강>>에서 알게 되어 높이 평가한 수학적 사유이다. 세 번째 여행(1634-36)에서 그는 메르센과, 특히 가상디, 데카르트, 그리고 갈릴레이를 알게 된다. 이로써 그는 수학(기하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함께 자연과학적 물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의 시민전쟁은 그로 하여금 네 번째로 프랑스에 가게 했으며, 1640년부터 1651년까지 여기서 머무르도록 만들었다. 1646년부터 그는 그와 마찬가지로 망명해 온 칼 1세의 아들후에 칼 2세가 될-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1651년 런던에서 그의 주저 <<리바이어던>>이 출간되었다.

방법적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수학적으로 정향된 자연과학을 국가론에 적용하려 시도했고, 이를 통해 국가론을 일종의 국가물리학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그는 이후의 수백년간 전개된 법철학과 정치철학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리바이어던(구약성서로부터 차용한 전설적인 바다괴물의 이름)은, 무법과 잔인함이 지배하는 끔찍한 자연상태에 완전히 대립되는 절대적 국가로 실현되어야 한다. 또한 그가 인간은 본성상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야만적인 존재라고 말할  때,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라는 인류학적 견해에서 출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에게는 "Homo homini lumpus est"라는 격언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함께 부패해가는 측면에서 "bellum omnium contra omnes"가 지배해 온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로써 국가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권역이 아니라 인공적 형성물이며, 필요와 통찰로부터 발생한 것이 된다. 즉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까닭에 스스로를 충분히 지켜내어야 할 필요성과, 국가를 세우는 것만이 평화와 자기보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통찰.

가장 높은 목적으로서의 평화는, 모든 사람이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더 강한 자의 원천적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개인의 권력과 자유를 전체의지를 대변하는 하나의 의지에게 넘겨줌으로써 영구히 보장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홉스에게 가장 완벽한 국가형태는 절대군주제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개인적 양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기껏 개인의 의견을 표현할 뿐인 그런 것이었다. 사람들은 공공의 양심으로서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최고권력자는 모든 시민적 법의 위에 서 있으며, 그가 공포한 법을 바꾸거나 폐기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시민의 생명과 재산의 주인이다. 모든 권력이 그의 안에 모여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민중의 복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오직 신에게만 해명할 책임이 있을 뿐이다. 한 가지 경우, 즉 국가권력이 개인에게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을  때에만 복종의 의무는 소멸된다. 리바이어던(이와 관련된 그의 주저로 평가되는) 외에 <<베헤모트>>(마찬가지로 구약성서에서 차용한 전설적인 동물)도 있다. 이 책에서 홉스는 시민전쟁에 대한 묘사와 이론을 다루고 있다. <<베헤모트>>는 4 부분으로 된 대화록이다. 첫 번째 부분은 시민전쟁의 맹아를 다루고 있고, 두 번째는 이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가를 서술하며,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결과들을 간략히 요약하여 서술한다.

그는 시민전쟁의 원인과 발발에 대한 물음을 말을 둘러싼 투쟁으로 보았다. 이를 자극한 것은 지식인들과, 간접적으로는 대학들이었는데, 이러한 대학들에서 후세의 수많은 목사들과 의회의원들이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홉스는 대학의 개혁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목사들과 많은 의회의원들의 반역적인 사상을 통해 제한적으로나마 더 이상 민중들은 무엇이 신하의 의무인가에 대해 알려하지 않았다.(?) 이렇게 추동된 혼란은 너무나 완벽해서 "전제정치"가 "폭정"으로 재정의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혼란전략의 구체적인 예로는, 세금에 대해 가장 강력히 항의한 자들이 의회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선박세"의 형태로 칼 1세가 도입한 세금은 시민전쟁과 마침내는 그 자신이 사형을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홉스의 윤리학과 관련해 언급되어야 할 것은 그의 윤리학이 전적으로 그의 인류학(이미 잠깐 언급되었던)과 당시의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열광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정의/불의, 법/무법을 가르는 기준은, 질서지워진 국가가 있고 나서야 의미있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무법의 상황으로 묘사되는 끔찍한 자연상태에서 이러한 기준들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은 국가로 모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이성의 명령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행위의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대해 밝혀주는 것 또한 이성의 명령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자연법을 침해하는 것은 잘못된 추론을 통해서만, 따라서 결국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해서만 생겨나는 일이다. 이성의 주된 요구들로부터 홉스는 하나의 자연적 도덕에 대한 규약집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물론 완전히 실용적 고려에 따라 기획된 것이며 일련의 자연법적 규정(이를테면 Pacta servanda sunt라는 원칙)외에 감사하는 마음, 겸손함, 절제심, 자비심 등을 포함하고 있다.

홉스가 유용성의 관점만을 인정했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절대적 도덕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규범과 가치의 상대성 위에는 모든 인간이 동의하는 단 하나의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은 평화를 평화를 원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사유에서 개인은 더 이상 중심에 있지 않으며, (고전적-그리스적 의미의) 국가가 중심에 선다. 시민 사회에서 개인은 더 이상 정의와 불의를 가릴 권리가 없으며, 이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입법자의 몫이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그는(당대의 다른 대부분의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신에 대한 어떤 명시적인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wie in allen Buchreligionen ueblich) 그것은 신에 대한 인식도, 신의 계명에 대한 인식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홉스가 (자연법적이고 종교적으로 동기화된 법과 대립되는) 국가법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독창적인 통찰로써 20세기 법실증주의의 직접적인 선구자로 불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미루어 두겠다.

종교철학적 관점에서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게 결정적인 신정정치를 철저히 거부하고 교회를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된 국가에 종속시키기 위해 선동하는 것이었고, 이는 실제로 헨리 8세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로써 그는 내적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이러한 사상이 그의 윤리학뿐 아니라 그의 국가철학도 관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연종교"에 대해 말할 때, 그가 생각한 것은 한편으로 모든 존재의 창조자, 즉 (그의 자연과학적 열정에 충실하게) 최종원인에 대한 물음에 있어서 "자기 원인"으로 나타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계시에 근거하면서 허용될 수 없는, 국가에 버금가는 권력을 요구하며 등장하는 종교이다. 이는 그에게 단 하나의 국가교회만이 문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인식론을 물리학의 한 부분으로 이해했다. 그는 어떤 의식현상들(환영)에는 사유와 무관한, 표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물들이 상응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때 그는 환영의 발생에 대한 기계론을 전개시킨 셈인데, 이에 대해 그는 운동론의 명제들, 특히 작용과 수용의 동등함에 대한 명제들에 의거하고 있다. 그에 따라 감각기관에 물리적 자극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작용은 "spiritus animalis"(지각 불가능한 미묘한 물질)의 반작용을 불러일으킴에 틀림없는데, 이 반작용은 당시 생리학의 견해로는 자극운동을 뇌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가장 단순한 요소 및 경험가능한 것의 개념을 그는 "크기","운동",감각질, 나아가 "공간","시간","속성","원인","결과","동등","차별","현실성","가능성"이라 명명했다. 이러한 "가장 단순한 요소들"이 양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그리스의 범주표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이 홉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여기서 열거된 개념들은 그에 따르면 "제일 철학"의 대상들이다. 이로써 사물들은 이름을 부여받으며, 사상적으로 서로 결합되거나 분리된다.

당연하게도 그는 진리에 대한 관습적 이해를 지지하는데, 이에 따르면 주어와 술어의 자리에서 계사를 통해 결합되어 있는 이름들이 정의적으로 고정된 의미에 근거해 사물에 귀속될 때, 하나의 명제를 "참"이라고 한다. 그의 체계 안에는 이른바 "영원한 진리"를 수용할 자리가 없다. 명제들의 진리는 전제된 정의들에 의존하는 것이며, 이 정의들은 어떤 이름들이 한 사물을 규정할 것인지를 먼저 확정해 놓은 것이어야 한다. 중세적 어법으로 말하자면, 홉스에게는 순수한 유명론이 중요했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