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학파의 기호학-박인철

사실 우리가 의사소통 내지 언어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공통의 기반이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낱말이나 구절, 혹은 그 문장을 들었을 때 일차적으로 그것들이 바로 그 낱말이나 구절, 혹은 그 문장임을 모든 사람이 똑같이 지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의사소통을 구성하는 언어 단위들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지각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물론 우리가 학습을 통해서 얻은 것이긴 하지만) 랑그라는 체계가 우리 모두의 뇌 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소쉬르는 생각했다. (24)

...랑그는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한 사회에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각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분류할 수 있게끔 하는 동일성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29)

예컨대 내가 도둑맞은 옷을 후에 헌 옷가게에서 되찾았을 때 이 옷은 물질적으로 동일하다. 이와 달리 우리는 매일 저녁 8시 45분에 출발하는 '주네브 발-파리 행' 급행열차 두 대를 두고도 이것을 동일한 열차로 간주한다. 실제로 기관차, 승무원, 객차, 승객이 다른데도 말이다. 물질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열차가 동일한 것은 두 열차가 파리 발-주네브 행 열차가 아니고, 아침 8시 반에 떠나는 열차가 아니고 완행열차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즉 어떤 열차들이 전체 열차 시간표 내에서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 우리는 이 열차들을 동일한 열차로 간주한다. 우리는 전자와 같은 경우를 '물질적 동일성', 후자와 같은 경우를 '관계적 동일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언어 단위를 예로 들어보자. 프랑스어의 dent와  dans은 모두 [당]으로 발음된다. 즉 물질적으로는 동일하다. 하지만 두 단어는 문장 내에서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적으로 동일하지는 않다. 전자는 명사이고 후자는 전치사이다. 다른 한편, 전치사 dans은 자음 앞에서는 [당]으로, 모음 앞에서 연음이 되면 [당즈]로 발음된다. 즉 물질적으로는 두 단위가 달리 발음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단위라고 간주할지 모른다. 하지만 두 단위는 모두 명사구(관사+명사) 앞에 놓이기 때문에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관계적으로 동일한 단위라고 할 수 있다. (52)

"언어에서 각 사항은 다른 모든 사항들과의 대립에 의해 그 가치를 갖게 된다."(107쪽) 언어에서 "사항들은 특정 규칙에 따라 상호 연관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체계 내에서 한 언어 요소의 동일성도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에 따라 정해진다. 이렇게 해서 "동일성의 개념은 가치의 개념이고, 가치의 개념은 곧 동일성의 개념임"(154쪽)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일성이 곧 언어적 실체라고 한다면, 더 나아가서 언어적 실체는 다름 아닌 가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3)
 
사과의 붉은 빛깔이 단지 붉은색만 의미한다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붉은 빛깔이 사과의 성숙도를 의미할 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진일보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붉은색은 표현 면에 해당하고 \, 과일의 성숙도는 내용 면에 해당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표현 면과 내용 면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과의 경우 성숙도는 시간의 차원과 상관관계를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성숙도는 표현 면에 해당하고 시간의 차원은 내용 면에 해당한다. 이처럼 표현 면과 내용 면 사이의 경계가 확고하게 정해지지 않은 현상은 문학 텍스트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67)

옐름슬레우는 소쉬르가 말한 '무정형의 덩어리'를 "질료(materie)"라고 부름으로써 소쉬르에게서 실질이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던 애매함을 해소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파롤의 차원에서 듣는 음성이나 해석하는 의미인상은 실질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71)

질료는 하나의 '연속체'이다. 각각의 언어는 이 연속체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불연속적으로 분절한다. 따라서 형식은 "의미의 관점에서 보면 자의적이다."(73족) 이것은 옐름슬레우가 든 비유를 사용하면 한 움큼의 모래를 뿌리면 그때마다 다른 형태가 그려지고, 한 덩어리의 구름이 시시각각 새로운 형태를 취하는 것과 같다. 즉 동일한 질료가 각각의 언어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형태가 잡히고 구조화되는 것이다. 질료는 설명될 수 있는 것 전체, 다시 말하면 경험의 장으로서의 세계라고 할 수 있고, 형식은 이것을 대립들에 의해 조직된 어떤 유형들의 체계로 구조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4)

그러면 형식과 실질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그것은 우선 발현된 것과 발현하는 것 사이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표현 면을 보자. 어느 프랑스인(혹은 제각기 연령과 나이와 출신이 다른 여러 프랑스 사람들)이 /pa/라고 발음했다고 하자. 그러면 이것을 들은 사람은 이 음성적인 재료(들)를 추상화하여 /p/와 /a/라는 두 음운을 인식할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p/를 경음으로 발음하든, 격음으로 발음하든(예컨대 Paris를 '파리'로 발음하든 '빠리'로 발음하든) /b/와는 다른, 그리고 /a/를 /o/나 /u/와 다른 음운으로 판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 혹은 여러 프랑스 사람들이 실제로 발음한 음성은 이 음운의 표현 실질이다. 다른 예를 들어 보자. 프랑스어의 경우 i라는 음을 단음으로 발음하든 장음으로 발음하든 의미의 변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즉 프랑스어의 경우에는 [i]와 [i:]의 대립은 표현형식에 속하지 않는다. 두 음은 다만 실질의 차원에서 구별될 뿐이다. (하지만 영어의 경우 단모음 i와 장모음 i는 표현 형식에서 서로 대립된다. 이미 우리가 앞에서 예로 든 바 있듯이 프랑스어에서 '장미'를 뜻하는 rose의 r의 음은 [.......등등]로, 그리고 때로는 [?]로 발음된다. 즉 이 소리들은 rose라는 낱말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독일어에서 [r]와 [x]는, Art와 Acht에서처럼, 의미를 변별시켜 주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음이다.) 이러한 소리들이 음운 /r/의 "변이형(variante)"이라고 한다. 하지만 변이형만이 음성 실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표현 형식과 관련을 맺은 (아울러 기호 기능에 의해 내용 형식과 관련된) 소리는 어느 것이나 표현 실질이 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실질은 전적으로 형식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rose 를 어떤 식으로 발음하든 듣는 사람은 그것을 rose의 음성 형식을 통해서 지각하고 이것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 실질을 통해 프랑스어에 고유한 표현 형식인 음운 체계가 발현되는 것이다. 즉 형식은 발현된 것이고, 실질은 발현하는 것이다. (75,6)

옐름슬레우가 표현과 내용 양면에 사용한 '질료'는 '형태가 잡히지 않은 것', 즉 일종의 연속체이다. 이 질료는 각 언어의 형식을 통해 불연속적으로 분절되고 구조화된다. 바꾸어 말하면 랑그는 이 질료에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질료를 구조화된 체계로 만든다. 그런데 형식은 추상적인 것이다. 형식은 실질을 통해 실제적으로 발현되고 지각된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행이 체계를 전제하고 또 체계가 사행을 통해 발현되는 것처럼, 실질은 "전적으로 형식에 의해 좌우되고 ... 어떤 의미에서든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68쪽) 이런 이유에서 옐름슬레우는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강의>>에서 소쉬르가 '내용실질(사고)'과 '표현실질(음성 연쇄체)'을 랑그에 선행시킨 것(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실질은 전적으로 형식에 좌우되며 어떤 의미에서든 실질이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볼 수 없기"(68쪽) 때문이다.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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