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준비-줄인 원고1122

당면한 과제.

묻는다는 것. 물음을 던진다는 것. 이것이 문학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 물음이 대답과 만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끝끝내 알 수 없다. 물음과 대답은 거의 언제나 어긋나기만 할지도 모르지만, 물음이 물음으로서 삶의 수면水面에 파문波紋을 일으키고, 그 파문이 '자유의 무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 문학이다. 그리고 이 희망은 무한으로 수렴한다. 즉, 희망의 끝은 희망일 뿐 그 너머는 알 수 없다. 문학이 절규와 고통의 무늬로 수놓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은 다시, 또 다시 희망한다. 이러한 희망의 운동이 지속되는 한 문학의 호흡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집트가 페르시아에 패한 후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는 이집트의 왕 사메니트우스에게 모욕을 주고자 했다. 페르시아의 개선행렬 속에서 사메니트우스의 딸은 하녀복장을 한 채 물동이를 이고 걸어야 했고, 그의 아들은 노예들 틈에서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모든 이집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슬피 울었지만, 사메니트우스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포로행렬 가운데서 늙고 불쌍한 하인 한 명이 눈에 띄자, 그는 손으로 머리를 치면서 가장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온갖 표식을 보내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사메니트우스는 왜 하필 그때 울었을까?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헤로도토스는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설명도 부가하지 않았다. 그의 보고는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보고이다."

문학에서 근대적 제도의 겉옷을 모두 벗기고 나면 남게 되는 알몸이 이야기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이야기의 소멸이 문학의 위기, 문학의 종언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소멸과 종언의 흐름이 그 젖줄을 대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묻지 않는 곳, 즉 정보를 '전달'하고 사태를 '설명'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설명'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험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이곳은 어디인가? 언론과 매체가 만들어내는 세상, 즉 근대세계다. 근대세계에서 사람들의 경험은 다양하되 다르지 않고, 그들이 소통하는 정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대개의 신문은 하루 단위로 발간되고 폐기된다!) 새로움의 순간에 곧바로 폐기되고 갱신되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정보는 근대세계, 즉 새로움의 신화의 세계의 상징이다. 이야기하는 이의 호흡이 씨줄이 되고 이야기되는 사건이 날줄이 되어 촘촘히 엮이는 이야기의 직물은 이 세계에 의해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어느 평론가는 문학에 대한 사랑은 어쩐지 남들 앞에서 말하기 쑥스러운 비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고 썼지만, 더 적나라하게 그리고 더 적확하게 표현하자면, 문학을 좋아한다는 것은 세상모르고 헛꿈만 꾸고 있는 이들의 사치가 되어버렸다. 유명한 작가의 이름은 영화나 매체에 의해 전파를 타고 나서야 일시적으로 검색 순위에 오르고, 권장 도서나 추천 작품은 대개 논술과 입시를 위한 자료로 읽히는 것이 현실임을 누가 부인하랴. 종언과 죽음의 목소리가 떠들썩한 것은 괜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소란과 무관심의 와중에서 쓰이고 읽히는 문학은, 그야말로 끈질기다. 이 끈질김 속에서 그리하여 경이로운 문학의 생존 속에서 빚어진 두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이를 통해 어두운 종말의 시대를 견딜 수 있는 문학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당면과제이다. 이들의 이름은 고종석과 김훈, 김훈과 고종석이다. 이들은 정보를 가공하는 신문기자였다가 이야기를 엮는 소설가로 변모했다.

 

너무 많은 말, 말 되어지지 않은 말.

김훈은 현재 문학계와 문학시장에서 가장 우뚝한 존재다. 95년 첫 장편소설『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쓴 후, 본격적인 성공을 거둔 『칼의 노래』를 거쳐 올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남한산성』에 이르기까지 김훈 소설은 비약에 가까운 상승세에 있다. 경이로운 판매부수뿐만 아니라 각종 문학상을 휩쓸고 있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고 있는 김훈의 글쓰기는 연필을 쥔 손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 한다. 이에 반해 고종석은 첫 장편소설『기자들』을 낸 이후로 두 권의 소설집을 더 출간했지만, 대중의 주목과 평단의 대접에 있어서 내쳐지는 쪽에 가까웠다. 요컨대 고종석은 문학계와 문학시장에서 기우뚱한 존재다.

우뚝함을 우뚝함으로 세우는 것과 기우뚱함을 그것대로 버티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빚어내는 말의 힘이다. 그러나 이 힘은 오히려 그 헛됨에 의해 추동되는 것인데, 말의 헛됨에 대한 의식은 이들의 사고의 밑바닥에 깔려있다. 『남한산성』의 첫 장 <눈보라>의 앞부분을 보자.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廟堂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9~10면)

 

김훈의 말 속에서 말은 문장으로 시작되어 뱀의 몸으로 화했다가 다시 산맥으로 치솟아 급기야 임금의 시야를 가로막아 버린다. 이 말들은, 그 역동적인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꿈틀거리며, 서로 물고 물리며, 뒤엉키고 출렁거리는, 말하자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말이 하는 일이란 임금의 시야를 저 들판에 가 닿지 못하게 막는 것뿐이다. 시야를 가리는 말의 산맥은 다시 말의 먼지로 흩어진다.

 

...전하, 지금 성 안에는 말[言]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 또한 말[馬]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197면)

 

시야를 가리며 출렁거리는 산맥과, 삶의 길을 막아선, 성 안팎으로 자욱한 먼지. 김훈에게 말은 삶(세계)에서 삶(인간)을 자꾸만 밀어내는 힘이다. 삶이 말로써 삶 그 자체에 다가가려는 노력보다 더 헛된 것은 없다. '말로 쌓은 성'은 적을 막아내지도, 끼니를 챙겨주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무기력한 말이 대책 없이 쏟아내는 허세에 대해서 김훈은 이미 초기 작품에서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의 한 구절을 보자.

 

먼 눈은 그 먼 눈을 들여다보려는 성한 눈을 눈멀게 하는 것이어서, 먼 눈 앞에서 성한 눈의 '본다'는 동작은 '보고 싶다'는 형용사가 동사의 포즈로 허세를 부리고 있는 꼴이었거나, 아니면 아직도 캄캄한 자궁 속에 갇혀 있는 동사의 태아가 자궁벽을 걷어차는 가위눌린 발길질에 불과했다.(154면, 강조는 인용자.)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어쩌면 영원히 태어날 수 없을 말이 부리는 허세란 말 그대로 헛것이 사람을 호리고 놀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헛것인 말이 '성한 눈을 눈멀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한 눈은 '본다' 혹은 '보고 싶다' 따위의 언어 없이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본다'의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먼 눈’은 그 언어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성한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말로 쌓은 성' 안에 살면서 멀쩡하게 '눈을 뜨고 보며' 사는 사람들의 삶은 '속수무책'의 삶이다. 말의 밧줄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모습, 이것이 김훈이 말의 삶[言生]에 내린 선고이다. 『칼의 노래』이순신은 말한다.

 

위관들의 심문은 결국 아무것도 묻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헛것을 쫓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가 가엾었다. 그들은 헛것을 정밀하게 짜맞추어 충(忠)과 의(義)의 구조물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았다.(18면)

 

이순신의 입을 빌어 김훈은 '그들'의 언어가 가엾다 말한다. 충과 의라는 헛것을 정밀하게 짜맞추어 성을 쌓고 이로써 조국과 삶을 지키려는 그들의 언어. (이 점에서 『칼의 노래』의 위관들이 만들어낸 헛것의 언어는 『남한산성』에 와서는 꼬리를 물고 물리며 치솟아 먼지로 흩날리는 묘당들의 언어로 변모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언어는 바다의 '사실'에 입각해 있지 않다. 바다는 '먼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삶의 자리일 터이다. 이 삶의 자리에서 말의 산맥은 빙하처럼 무너지고, 말의 먼지는 파도에 의해 말끔히 씻기어질 게다. '2007년 4월, 다시 봄이 오는 남한산성에서' 김훈은 쓴다. "말로써 정의를 다툴 수 없고, 글로써 세상을 읽을 수 없으며, 살아 있는 동안의 몸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다 받아 내지 못할진대, 땅 위로 뻗은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으리."(『남한산성』, 하는 말, 4면)

정의를 다툴 수도 없고, 세상을 읽을 수도 없는 말과 글을 저리도 아름답게 엮어내는 김훈의 말이 염원하는 (바다의) '사실'은 그러나 어디 있는 것인가? 혹시 그것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Godot'와 같은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문은 우리를 극도로 복잡한 미로 속으로 던져 넣게 될 것이므로, 말머리를 돌려 이제 '말의 힘'에 대해 고종석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보도록 하자.

 

언어라는 건 권력인 것 같아. 아니 억압인 것 같아. 무지막지한 억압. 예컨대 타자기로 글씰 쓰다가 '사랑'이란 말을 '사렁'이라고 오타를 냈대봐. 종이 위에 찍힌 그 '사렁'이란 말을 그리도 촌스럽고 낯설게 만드는 게 결국 말이 가진 억압의 힘 아냐. 말의 그 전제주의, 표준어의 그 전제주의 말이야. (『제망매』, 「제망매」, 36면.)

 

흩날리는 먼지와 같은 말이 가진 '무지막지한 억압'의 힘. 이들의 글쓰기는 그러한 힘에 편승해서 그 힘을 무화시키고자 하는 시지프스의 작업과 같은 형국을 띠고 있다. 한 에세이에서 고종석은 "무엇이 '참이다'라는 진리술어도 그 말의 주체에 따라 서로 다른 힘을 내뿜는 일이 많다. (...) 사실판단을 내리는 언어가 전형적 수행문처럼 그 힘의 크기를 주체의 신분에 구속시킨다는 것은 좀 쓸쓸한 일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의 신분이란 말을 주체의 입장 혹은 주체의 세계라고 바꿔 써보면, 이순신이 말하는 '바다의 사실' 따위는 그저 이순신의 입장에서만 헛되지 않을 수 있는 '사실'인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위관들에게 이순신이 말하는 '바다의 사실' 따위는 영원히 오지 않는 고도Godot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들의 사실에 입각해서 이순신을 안타까워한 것은 아닐까? 이순신에게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훈의 소설은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억압하고 있다.

말의 헛됨 속에서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김훈은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고 말했다. 누가 '고통 받는 자'인가? 그러나 김훈에게 이 물음은 결국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말과 다를 바 없으므로, 쓸모없고 헛된 물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과 저 물음을 결국 '다를 바 없게' 만드는 그의 언어야말로 무지막지한 억압의 힘을 내뿜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가 고통 받는 자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고종석은 솔직한 일인칭으로 답한다. '내가 고통스럽다.' 고종석에게 현실은 저주이며, 이 저주 속에서의 살아감 자체를 그는 쓸쓸한 일이라 말한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 대사를 주고받는 배우 같았다. 현실의 저주를 푸닥거리하기 위해, 운명을 배반하기 위해, 악착같이 언어의 치유력을 믿고 거기에 기대는(『제망매』「제망매」51면.)

 

고종석은 '악착같이 언어의 치유력을 믿'는다는 표현을 쓴다. 악,착,같,이? 그는 언어의 헛됨을 모르는 걸까? '악착같은'이라는 형용사는 '치유력'이라는 명사에 악착같이 달라붙는 듯하다. 엄마의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아이가 그러하듯. 그러므로 치유력은 '엄마'에게서 나온다. 마치 엄마젖처럼. 이 '엄마'는 어떤 엄마인가?

 

누이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리고 말을 높일 줄 몰랐다. "엄마, 밥!" "엄마, 아퍼?" "엄마 나 그 남자랑 결혼할래" "엄마, 이번 애는 아들이야" ...... 이런 식이었다. 그것이 여자들의 통상적 말투이기는 하지만, 누이가 부르는 '엄마'라는 말은 늘 정겨웠다. 누이의 두 입술이 다물렸다 벌어지며 내놓는 그 '엄마'는 현실의 엄마보다도 더 엄마다웠다. 지금 어머니를 돌이켜보면, 내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머니의 구체적 행동거지가 아니다. 그것보다 먼저 내 귓전에 울리는 것은 누이의 목소리에 담긴 '엄마'라는 두 음절이다.(『엘리아의 제야』, 「누이 생각」, 45면, 강조는 인용자.)

 

고종석의 '엄마'는 말[言]로서의 엄마다. 그 엄마는 현실의 저주를 푸닥거리하게 해주는 치유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고종석에게서 말은 뱀처럼 뒤엉켜서 서로 물고 물리는 괴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정겹고 그리운 삶을 반복재생해주는 삶의 운동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한 발짝 물러나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면, 이러한 말의 야누스적인 면모에 대해서 수긍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김훈의 말이 오직 묘당廟堂의 말이요, 적들에게 둘러싸여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는 말이라면, 고종석의 말은 때로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오붓한 자리에서 풍경처럼 수놓아지는 말이기도 하다는 점, 이 차이가 중요한 것이다. 김훈의 언어가 치솟았다가 추락하여 고꾸라지는 절벽과 같은 형세에 있다면, 고종석의 언어는 흐르고 구르며 졸졸 찰방찰방 노래하는 시냇물의 모양에 가깝다.

이처럼 말의 힘, 그리고 이 말의 힘이 세계의 질서와 버무려지는 사태-우리가 흔히 삶이라고 부르는-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라진다. 그들은 다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에서만 일치하는 것이다. 말의 힘이 뱀처럼 뒤엉켜서 싸우다가 터져서 먼지가 되어 세상을, 즉 바다의 사실을 뒤덮어버린다고 보는 이가 김훈이라면, 고종석은 각자가 각자의 바다에서 각자의 사실을 제각기 주장하는데, 이때 그 말의 힘의 크기와 방향은 각자의 바다의 넓이과 자원량, 그리고 그 파도의 무늬에 달려 있다고 본다. 고종석이 보기에 김훈이 말하는 ‘바다의 사실’ 따위란 없다. 행여 그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이미 뒤틀린 사실이요, 그리하여 결국 그것 역시 ‘말먼지’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평이 할 일은 작품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지, 말과 삶을 둘러싼 구체적 개인에 대하여 판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의 ‘작품의 사실’에 입각해 보자.

 

이야기되지 못한 일인칭

고종석은 제 첫 소설을 두고 "그저 어설픈 신문기사라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정확히 10년 후, 그는 다시 (제 소설을 보니) "내 삶의 가녀림이 무참하다"고 적었다. 이에 반해 김훈은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칼의 노래』) “이 책은 다만 소설이다.”(『현의 노래』)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남한산성』) 그는 거듭 거듭 자신의 글이 ‘소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언급이 자신의 소설의 소설됨을 자부하거나 자랑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고 말하기 10여 년 전, 그러니까 그의 첫 장편소설에서 그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나는 소설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다만 떼죽음으로 쓰러지는 말들의 최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참패하였다. 내 참패에도 불구하고, 나의 싸움은 전면전이었다, 라고 써본들 위안이 될 리는 없다. 쓸쓸하다. 져버린 나는 말을 밀쳐놓고 또다시 꾸역꾸역 살아가기 시작했다.”(『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서문, 1995년) 이제 그는 10년 전 참패의 역사를 승리의 칼로 찢어낸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는 여전히 무참해 하고 있다. (“슬픔이 나를 옥죄는 동안, 서둘러 작은 이야기를 지어서 내 조국의 성에 바친다.”-『남한산성』, 하는 말) 소설의 소설됨과 그 언어의 무참함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이제 그들의 소설의 바다로 나아가 그 사실에 입각해 보고자 하는 우리에게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이다.

김훈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늙은, 그러나 아주 늙지는 않은 이들이다. 그러니까, 늙어가기 시작하는 이들이 김훈 소설의 주인공인 것이다.(물론 이 시작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할 수 없을 터이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이른바 ‘초로’의 나이로 이해하기로 하자.) 김훈이 그리는 연령층의 사람들을 특징지어 보면 이렇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것이고, 어떤 일을 두고 잘잘못을 따지고 악다구니를 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며, 세상의 이치는 옳고 그름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된 것, 즉 옳은 것으로 된 것이 옳은 것인데,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옳음이 내 가족의 오늘과 내일을 위협하지 않는 옳음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내 가족의 안전’만을 생각하는 것을 이기주의라 하여 비난한다. 그러나 김훈은 이런 도덕을 거부한다. 그런 도덕은 말에 의해 축조된 헛것의 구조물이며, 그로서는 ‘다만 당면한 일(내 가족의 밥과 안전, 그리고 생존)을 당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소설 속 화자가 1인칭으로 말할 때와 3인칭으로 말할 때가 동일한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이다. 이때 말하는 사람은 바로 김훈 자신이고, 따라서 “그것은 모두 ‘세상의 길’위에 선 ‘나’의 이야기다.” “작가 김훈을 두고 ‘뛰어난 복화술사(複話術師)’라 칭한 최원식의 표현은 이순신이 일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칼의 노래』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현의 노래』나 『남한산성』 같은 삼인칭 소설에서도 그런 의미의 복화술을 내놓고 구사하는 것이 또한 김훈 소설의 특징이다.”

고종석의 소설은 이와 반대로 대개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말은 부정확하다. 젊은이의 기억을 떨치지 못한 중년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다. 이런 점에서 김훈과 고종석의 소설은 실제 자신들의 나이에 충실한, 말하자면 정직한 소설이랄 수도 있겠다. 어느 글에선가 그는 <유럽의 기자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자신의 몸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싱그러움’이 빠져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썼다. 그는 그것을, 그 싱그러움의 시기를 그리워하고 있다. 아니, 그는 그저 '그리워'하고 있다. 그에게 '살아가다'라는 동사는 '그리워하다'라는 동사와 동의어이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저주와 운명의 편린들이 징그러워서 글을 통해 그리움을 세워나간다. 이 그리움의 대상은 대개 누이(들)이다. 『기자들』의 주잔나 셀레스, 「제망매」의 혜원, 「누이 생각」의 줄리아나, 「파두」의 미옥, 그리고 「카렌」의 화련 등등. 이들은 누이이거나 누이의 느낌을 주는 연인들이다. 이 누이라는 존재는, 그 입에서 발화되는 ‘엄마’라는 소리가 현실의 엄마보다도 더 엄마처럼 느껴질 정도로, 특별한 존재들이다. 고종석의 소설들은 거의 예외 없이 1인칭 소설들인데, 화자의 서술은 대개 나와 누이에 대한 이야기로 집중되어 있다. 이는 김훈의 소설과 변별되는 중요한 지점인데, 김훈 소설의 화자가 복화술에 의해 김훈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면, 고종석 소설에서의 그 ‘정직한’ 1인칭은 대개 나와 누이가 뒤섞여 있다. 뒤섞여 있다, 라는 이 표현은 해명을 필요로 하는데, 간추려 말하자면 나는 누이와 하나가 되기를 열망하지만, 그 열망이 강제나 강요 혹은 일방적 규정으로 이어질까봐 늘 저어한다는 것, 이것이 뒤섞여 있음의 내용이다. 다시 말해 고종석의 1인칭은 흔들리는 1인칭이고 2/3인칭과 섞여있는 불순한 1인칭이다. 표면적 서술이 1인칭이든 3인칭이든 늘 ‘확고한’ 1인칭으로 말하는 김훈의 서사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 지점은 그들의 소설이 시작되는 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시작된 김훈의 언어는 치밀한 공부에 의해 구성되고 고통스런 퇴고에 의해 세공된 문장들로 실현된다. 1인칭이든 3인칭이든 소설 속 화자의 묘사는 짧고 건조하면서도 곧장 뻗어가는 문장들로 이루어지며, 이 문장들 속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전문 직업 언어들이다. 전문 직업 언어를 소설 속에 적절히 배치하는 김훈의 솜씨는 가히 장인적이라 할 만하다. 이에 반해 고종석의 언어는 "혜원아, 내가 정말 널 사랑하는 것 같아."(『제망매』, 「제망매」 37면), "자신의 우정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고, 정확히는 모독으로 받아들이는 제스처를 썼고"(『엘리아의 제야』, 「엘리아의 제야」, 21면) "그때쯤이면 그랬을지도 모른다"(『엘리아의 제야』, 「파두」, 118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숱한 가정과 유보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거의 언제나 변함없이 일인칭이지만, 그 일인칭의 언어는 영어나 독일어로 치면 가정법과 접속법, 양상 조동사 없이는 발화할 수 없는 혀를 갖고 있다.

단호한 어조, 달리 말하자면 (김훈 자신의 표현대로) ‘주어와 동사, 문장의 뼈다귀만 갖고 쓰는 스트레이트 문체’를 통해 김훈이 성취하려 하는 것은 말로써는 건네어질 수 없는 저 너머의 ‘사실’이다. 말을 써야 하지만, 말에 의지해서는 안 되는 악전고투를 김훈은 뼈다귀로만 써서 이어붙이는 수작업을 가지고 해내려 하는 것이다. 그의 글쓰기가 칼이나 악기와 같이 손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연필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작업이라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거기에 가 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알지 못한다. 참패하더라도 매번 다시 전면전을 개시하는 것. 이것이 김훈의 글쓰기이고, 이는 ‘이 세계는 악이다’라는 그의 염세적 세계관과 맞물려 자연스레 그의 소설을 전쟁의 와중으로 이끌어간다. 전쟁은 저 먼 신라와 조선 시대의 것이지만(『현의 노래』, 『칼의 노래』, 『남한산성』,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세계가 악인 이상 세계의 지속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은 지금도 진행형인데, 그러나 그 양상은 ‘막막한 비애를 불러일으키는 일상적 현실’에서 반복되는 ‘밥벌이’로 전환되어 나타난다(『강산무진』). 요컨대, 김훈의 세계는 전쟁 중이고 그의 소설은 전쟁의 기록이다.

흐물흐물하여 늘 불안과 조바심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고종석의 문체는 그의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그리움이라는 동력이 없으면 결코 지속될 수 없는 약하고 여린 그것이다. 고종석의 이 약하고 여림, 나아가 회의와 염세에 대해서는 그 뿌리를 더듬어 볼 수가 있는데, 그 뿌리란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산문가 에밀 시오랑이다. 고종석의 소설이 1인칭인 이유를 에밀 시오랑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자아는 그의 개인적 문제와 함께 작가의 유일한 소재이다. 몽테뉴는 나는 내 작품의 소재이다 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작가, 특히 시인의 정의라 믿는다.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쓴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강조는 인용자) 평론가 황종연은 『제망매』의 추천사에서 고종석의 소설이 “시오랑적 의미에서 지혜로운 소설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때의 지혜란, 흔들리는 제 발밑을 견디지 못할 많은 대중들에게는, 염세와 회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것이 고종석의 소설이 대중에게 외면받는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명확한 규정과 개념을 통해 단단한 지반을 다지려는 철학자들에게도 지혜로 수용될 수 없을 것인데, 철학자들에 대하여 시오랑은 이렇게 쓰고 있다.

 

철학자는 꽤 잘 균형 잡힌 인간으로서 정말로 괴로워하는 일은 없고 삶의 곤란한 문제들을 슬쩍슬쩍 통과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철학은 확실히 지적 자기형성에는 도움이 되지만 직접 삶의 드라마에는 효과가 없다. 삶의 드라마에서는 비인칭적 사색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절망의 맨끝에서』,「태어남의 잘못에 대하여」중에서, 99면, 강조는 인용자.)

 

지독한 문체주의자라 할 두 작가가 딛고 서 있는 지반은 이렇게 다르다. 그 지반은 불안과 염세를 지층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 지층의 생성과 구조는 서로 전혀 접촉이 없는 별개의 것이다. 하여, ‘불안’과 ‘염세’라는 추상적인 말은 얼마나 헐거운 것인지. 김훈이 곧추 서 있는 자리는 전장戰場이고, 고종석이 흔들리고 있는 곳은 운명과도 같은 술자리이다. 전장은 당연히 아비규환일 터이고, 아비규환 속에서 ‘누구누구’라는 고유성은 전혀 무기력하다. 김훈의 소설 속에서 ‘이 곳은 전장이고,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목소리 외에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는 인물이 부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고유성은 살아남은 이후의 일이다. 술자리에서 오고가는 목소리는 너무나 직접적인 ‘그 자신’의 것이며, 따라서 고종석 소설의 인물들이 각기 자신의 관점으로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벌이는(『기자들』에서 주인공 장인철과 동료들, 장인철과 일로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토론,『엘리아의 제야』「파두」에서 벌어지는 경수와 민석 간의 언쟁)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 말들의 여백 곳곳에는 고통스런 삶을 짊어지고 태어난 인간의 운명運命moira에 대한 안쓰러움이 배어 있다. 김훈과 고종석의 언어가 더듬고자 하는 삶의 직접성이란 이렇게 그 얼굴을 달리 하고 있다. 전장은 생의 직접성, 목숨의 직접성에 살이 떨리는 곳이고, 술자리는 다른 누구 아닌 바로 ‘그 사람’의 목소리와 웃음과 눈물이 함께 있는 사람들의 기억에 고스란히 새겨지는 직접성의 장소인 것이다. 고종석의 고유성은, 그것이 살아남은 이후의 한가로움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 해도, 절박하고 절실하며, 김훈의 직접성은, 비록 고유명을 상실한 채 군번軍番으로만 지탱되는 것이긴 하지만, 아름답다.

 

1인칭으로 묻기.

계속되는 참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전면전을 시도하고 있는 김훈은 그가 쌓는 헛것의 구조물이 이토록 많은 눈과 귀에 가닿을 줄을 알고 있었을까? 문학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따위의 소리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그의 글이. 그는 단지 '자신을 표현해 내기 위해' 쓴다고 한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의 소설이 그 헛것이 그리도 높이 꿈틀대며 치솟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소설 이미 어떤 대답을 주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전쟁이며, 악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남아라.' 저녁놀처럼 아득한 아름다움이 자아내는 그 말들의 우주 속에서 사람들이 듣게 되는 목소리는 바로 이것이다. 이 목소리는 '살아남기'에 지친 자들에게 어떤 위안을 준다. 이순신과 우륵과 남한산성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해 살아가리라고, 그렇게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확실한' 대답이 김훈 소설의 아킬레스건이다. 이미 대답을 주었으므로, 다시 또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자기표절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인물을 그려내고 있음에도 그의 소설이 문학의 삶보다는 문학의 죽음에 치우쳐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결코 묻지 않고, 대답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고종석의 소설은 1인칭으로 서 있되, 너무 많이 흔들려서 제대로 묻지 못한다. 끊임없는 망설임과 주저, 후회와 아쉬움은, 그것이 비록 따뜻한 그리움의 취기로 채워지고 있다 해도, '잘 된 물음'을 던지지 못하는 것이다. 잘 묻고, 다시 또 더 잘 묻는 것에 문학의 과제와 희망이 있다면, 고종석은 그 과제와 희망 앞에서 너무 움츠려 있다. 그의 에세이들이 번뜩이는 혜안과 해박한 지식으로 독자들을 매료하고 있는 반면, 그의 소설들이 엉거주춤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당면한 과제를 '다만' 당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것만이 당면한 과제일까,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박한 과제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되풀이해서 묻고 씨름하는 태도와, 물음과 씨름해 보기도 전에 주저하며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물음을 던져보고 다시 또 바꾸어 물어보는 열심과 과감함이 잘 버무려진다면, 문학의 종언은 좀 더 멀리 연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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