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의 이미지

마르세 프루스트의 13권으로 된 소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구성하기 힘든 어떤 종합의 결과이다. 여기에는 신비주의자의 침잠과 산문작가의 기량 및 풍자가의 열광, 그리고 학자의 폭넓은 지식과 편집광의 일방적 자의식이 한데 어울려 하나의 자전적 작품을 이루고 있다. (S. 102)

프루스트의 이미지는, 시와 삶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커가고 있는 간극이 획득할 수 있었던 최대의 인상학적 표현이다. ... 프루스트는 그의 작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삶이 아니라 삶이 체험했던 사람이 바로 그 삶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삶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아직도 부정확하고 매우 엉성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여기에서 기억하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가 체험한 내용이 아니라 그러한 체험의 기억을 짜는 일, 다시 말해서 회상Eingedenken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기억을 짜는 일이 아니라 망각을 짜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가 무의지적 기억memoir involontaire이라고 부르는 무의지적 회상은 흔히 기억이라고 불리워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망각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여기서는 밤이 짰던 것을 낮이 풀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우리는 대부분 약하고 느슨한 몇몇의 조각 속에서 망각이 우리들 속에서 짰던 이미 체험한 삶의 양탄자를 갖게 된다. 그러나 낮이 시작되면 우리는 언제나 목적과 결부된 행동을 하게 되고 또 그 위에 목적에 맞게 기억을 하게 됨으로써 망각이 밤새 짰던 직물과 장식은 해체된다. 그렇기 때문에 프루스트는 마지막에 가서는 인공적으로 불을 밝힌 방안에서 그의 모든 시간을 아무런 방해 없이 작품을 쓰는 데 이용하였고, 또 이를 위해 시간이 만드는 정교한 상감조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낮을 밤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S. 103)

그 이유는 체험되어진 어떤 사건은 유한한 데 비해 기억되어지는 사건은 그 사건의 전과 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풀어 주는 열쇠구실을 함으로써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에 의한 사건의 짜임새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억이다. 다시 말해 텍스트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오로지 기억이라는 순수행위actus purus 그 자체일 뿐, 작가도 아니며 또 얘기의 줄거리는 더욱 더 아닌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작가의 개입과 이야기줄거리에 의해 생겨나는 중단은 다만 기억이라는 연속성의 또 다른 면, 이를테면 양탄자 뒷면의 무늬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S. 104)

아무튼 인생의 모범생에게는 위대한 업적이란 다름아닌 노력과 비탄, 그리고 환멸의 결과라는 사실만큼 더 분명한 사실은 없는 것이다. 아름다움에는 행복도 한몫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 과분한 것이고 또 그들 모범생들의 반감은 결코 그러한 생각을 너그러이 보아주지 않을 것이다. .... 이를 위해 그는 삶에서 친구와 사교적 모임을 희생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에서는 구성과 인물의 통일성, 이야기의 흐름과 상상력의 유희도 희생했던 것이다. (S. 105)

<모든 일상적인 꿈은 누군가 그것을 얘기하게 되면 즉시 종잡을 수 없는 얘기가 된다>......꿈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결코 동일하지 않고 유사할 뿐이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는 사물 간의 유사성 자체가 명확하지 못하다. (S. 106)

말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일을 우리는 항상 큰 소리로 말하지는 않는다. 또 우리는 가장 중요한 일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구, 이를테면 우리의 고백을 가장 충실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친구에게까지도 털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가장 깊숙한 비밀을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닌 그저 지나치면서 알게 된 사람에게 털어 놓는 그러한 정숙한 태도, 다시 말해 교활하고 부조경박한 의사소통방식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시대도 또한 갖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시들어 가는 19세기로투버 가장 놀라운 비밀을 붙든 사람이 졸라나 아나톨 프랑스도 아니라 젊은 작가 프루스트였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별볼일 없는 속물이자 사교계의 스타인 프루스트에 의해 비로소 19세기는 기억될 수 있는 성숙의 단계에 이른다. (S. 107)

이러한 점에서 보면 한 두마디로 간단히 말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체험한다는 것이 대단히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체험의 요체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닐까? (S. 109)

프루스트가 펼쳐 보이고 있는 영원성은 곧장 나아가는 무한한 시간으로서의 영원성이 아니라 둘둘 말린 나선형적 시간으로서의 영원성이다.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가장 실제적인 모습을 하고 공간과 결부되어 있는 이러한 나선형적인 시간의 진행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진행이 그 본연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곳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기억 속과 또 외부에서 일어나는 늙어감 속에서이다. 늙어감과 기억의 상호작용을 추적한다는 것은 프루스트 세계의 핵심부, 즉 둘둘 말려 있는 나선적 시간의 우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유사성의 상태 속에 있는 세계이고 또 이 세계 속에는 교감Korrespondenz의 영역이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교감을 최초로 파악한 것은 낭만주의자들이고 이러한 상호교감을 가장 깊이 파악한 사람은 보들레르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 이를 밖으로 드러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프루스트이다. 그것은 <무의지적 기억>의 작품, 즉 불가피하게 늙어가는 노화의 과정에 대적해서 회생하는 힘의 작품인 것이다.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 아침이슬처럼 <일순간Nu>에 반영되는 곳에서는 회생의 고통스러운 쇼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시 한번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끌어모으게 되는 것이다. (S. 113)

<램프의 밝은 불빛 아래에서는 세상은 얼마나 넓은가? 하지만 회상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얼마나 좁은가!> 프루스트는 일순간에 온 세상을 한 인간의 일평생 동안의 시간만큼 늙어버리게 하는 엄청난 일을 완수하였다. ... 프루스트의 전 작품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주어진 삶의 진정한 드라마를 실제로 체험해 볼 시간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이다. 우리를 늙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지, 결코 그 밖의 사실이 아닌 것이다. 얼굴에 새겨진 작은 주름, 그것은 위대한 정열이나 악덕 내지 우리들을 가끔 찾아오는 인식의 기록부이긴 하지만 정작 주인인 우리는 주인 노릇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 프루스트의 소설로부터 쟁쟁하게 울려퍼지는 시끄럽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공허한 수다는  우리를 고독의 심연으로 끌고 들어가는 사회의 소음이다. ... 그의 수많은 일화 중에서 우리를 불안스럽게 하고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대화의 강렬성과 대화의 상대자에 대해 갖는 더할 나위 없는 거리감의 상호결합이다. 사물을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사람은 프루스트 이전에는 아무도 없었다. (S. 114)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의 창작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와 동일한 무경험으로 인해 죽었다. 그는 세상물정에 어두웠기 때문에, 또 그에게 파국을 가져다 준 삶의 조건을 변경시킬 줄 몰랐기 때문에 죽었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불을 피우고 또 어떻게 창문을 여는지 몰랐기 때문에 죽었다.> 그리고 또한 그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정신적 천식 때문에 죽었던 것이다. ... 의사들은 이 병을 두고 속수무책이었다. 이 병을 매우 계획적으로 이용하였던 작가 자신은 그 정도까지 속수무책이지는 않았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는 그가 지닌 병의 완벽한 연출자였다. (S. 116)

우리들이 찾아내는 대부분의 기억은 시각적 이미지로서 우리들에 나타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심지어 무의지적 기억의 가장 유동적인 형태까지도 그 대부분은 유리된-그것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현재적이긴 해도-시각적 이미지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루스트의 작품에 내재하는 가장 내적인 톤에 자신을 내맡기고자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러한 무의지적 회상이라는 하나의 심층에 자신을 침잠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때 우리들이 침잠하는 무의지적 기억의 심층에서는, 기억의 여러 계기들은 우리들에게 더 이상 개별적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마치 그물의 무게를 보고 고기가 얼마나 잡혔는가를 아는 어부처럼, 무정형적이고 이미지가 없는 상태로 또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도 무게의 어림짐작으로 떠오르는 전체적 이미지로서 부각되는 것이다. 취각이란,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에 내던져진 그물을 걷어 올리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노력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S.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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