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소위 '현실적','경제적','역사적','사회-제도적'이라 불리는 모든 구조들을 뜻하며, 간단히 말해서 모든 가능한 준거 대상을 말한다. 여기에 "텍스트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다시 상기해보자. 이 말은, 사람들이 주장했거나 순진하게 믿어버린 것처럼 혹은 내가 그렇게 믿는다고 비난하는 것처럼, 모든 준거대상들이 유보되거나 부정되고 아니면 하나의 책 속에 폐쇄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준거 대상과 현실적 실재가 차연적 흔적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가 어떤 해석의 경험 안에서가 아니라면 이 현실적 실재를 준거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이 해석의 경험은 차연적 준거와 반송의 운동 안에서가 아니라면 의미를 낳거나 담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차연이 부정하는 것은 사물의 실재성이나 준거 대상의 사실적 존재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해석의 문맥으로부터 사물의 실재성을 추상하거나 고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다. 사물이든 말이든 모든 현실적인 것은 그 실재성의 의미마저 차연을 통하여 개입하는 전체의 흔적 안에서만 현상한다. (181)
데리다에게서 형이상학의 한계는 어디서 드러나는가? 그것은 언어의 과잉과 기호의 인플레이션을 통하여, 그리고 '기표의 기표'가 기의를 대신하거나 소멸시키는 현상 속에서 노출된다. 기호의 범람 속에서 실재성이 소멸하고 기표가 더 이상 기의에 근거하거나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기표가 기표의 근거가 되고 기원이 된다는 것, 바로 여기에서 형이상학적 전제 위에 서 있던 고전적 기호 개념이 파괴되고 있다(G.: 15-21) (185)
그러므로 니체에게서 은유는 단순히 언어적 표현의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대면하는 최초의 신체적 접촉에서부터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상이 일으키는 생리적 자극을 수용할 때 이미 신체는 그 자극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며, 이 해석에서 비롯되는 지각과 언어는 그 해석에 대한 은유적 재해석이자 재왜곡의 과정에 불과하다. 은유적 해석과 가상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일치하지 않고, 그런 한에서 인간의 언어는 그 기원에서부터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진리란 허구에 불과하다. (238)
"명사의 범위는-그리고 따라서 명사의 전용 또는 자리 바꾸기로서의 은유의 범위는-엄밀한 의미의 명사의 범위가 아니라 (......) 명사화 가능한 것의 범위이다. 이 명사화에 저항하는 모든 말은 은유에 무관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명사화될 수 있는 것은 완결되어 있고 독립적인 지위의 의미체를 지시하는 말이며, 모든 구문론적 관계 밖에 놓여 있더라도 그 자체로 인지 가능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명사의 이해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은유의 개념이 성립하는 지반이 되고 있다. (255)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체의 형체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극히 정확하게 그려 놓았을 때에는 보고 쾌감을 느낀다." 이 문장은 주목할 만한 아이러니를 함의하고 있다. 이 문장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원래의 모방 대상에는 없던 쾌감을 산출하는 힘을 지닌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술 작품은 그 원본과 차이를 지닌다. 그러나 이 차이는 그 작품이 원본을 '극히 정확하게' 그려낼수록 커진다. 이것이 아이러니이다. (267)
그러한 환원주의적 언어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서, 비평가들은 시적 언어가 논리적 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일탈적 권리에 대해서 맹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언어의 특권에 맹목이라는 것은 시 자체의 목적과 의도, 나아가서 예술작품의 존재 양태에 대해서 맹목이라는 것과 같다. 시적 언어가 때로는 모순을 범하고 때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태를 묘사하며, 나아가서 불합리하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예술 작품의 존재가 가능적 존재 양태이기 때문이다. 이 가능적 존재로서의 예술 내적 사건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개연성과 납득 가능성을 그 구성 원리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원리가 시적 언어의 구성 원리인 것은 시적 행위의 궁극적 의도와 목적이 경이감과 쾌감에 있기 때문이다. (274-5)
데리다에 따르자면, 은유적 전이의 수레바퀴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단순해 보이는 은유, 나아가서 소위 비은유적 개념 또한 이미 먼 길을 지나온 그 은유적 전이의 수레를 타고 있으며, 이 수레의 이동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생략 유추나 부정에 의한 은유에서 볼 수 있는 은유적 역동성의 무한한 반복과 중첩 가능성은 '은유의 구조' 자체에 등재되어 있는 가능성이며, 은유가 은유로서 태어나는 모든 현장에서 잠복해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한한 은유적 중첩 운동은 표면으로 부상할수록 은유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개념적 규정을 위기에 빠트리게 된다. 이는 은유적 반복과 그 역동성이 시작되는 출발점으로서 규정되었던 고정된 의미가 그 역동성 자체에 의하여 점점 뒤로 밀려나서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은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에서부터 실마리를 얻어서 연출해 볼 수 있는 어떤 극단적 상황이며, 이렇게 연출된 상황은 허구가 아니다. (279)
데리다에 의하면, 은유에 대한 철학적 정의가 이미 은유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 또는 그 정의하는 개념이 은유의 은유에 불과하다면, 이 은유의 은유로서의 철학적 개념들은 두 가지 종류의 은유로 환원된다. 그것은 빛의 은유와 집의 은유이다. 빛의 은유는, 이제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태양중심주의적 은유 체계를 언급하면서 충분히 부각된 것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나타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 명료한 것과 애매한 것 등등의 철학적 비유가 등장하는 곳에 먼저 존재한다. 빛의 은유는 여타의 비유와 개념이 생성되는 원천으로서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다. 반면 집의 은유는 말의 은유적 이행에 대한 표상이 수렴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데리다는 집의 은유를 빛의 은유와 마찬가지로 모든 은유들을 지배하는 은유로서 거론하고 있다. (....)
사실 은유는 어떤 말이 자신 속에 다른 의미가 거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미는 것에서 시작한다. 거꾸로 말해서 어떤 말이 자신의 의미를 떠나서 다른 의미를 수용하게 되는 이동과 자리 옮김이 은유적 전용의 본성이다. 이 은유적 이동을 위하여 처음에 의미는 자기 집 밖에 놓이지만, 자기 집 밖에서 계속 유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전셋집에 재기숙한다. 이 임대된 방이 은유적 표현이다. 그리고 이 임대된 방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다시 회복한다. 말의 은유적 전용 속에서 의미는 자기 집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지만 곧 새집을 얻게 되어서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일의적 의미를 구하는 철학적 은유란 그러므로 어떤 잃어버렸던 진리에 대한 우회적 재회복이며, 이 재회복의 거리가 소멸되는 종착지가 바로 "진리의 임재, 관념의 충만한 자기 현전"이다. (283-4)
만일 의미를 초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최초에 어떻게 언어의 세계 안에 편입되었던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퐁타니에의 남유이론이다. 남유란 의미론적 대체의 틀을 벗어나는 과도한 비유이다. 이 남용적 비유에서는 기호의 전이와 대체가 순차적이고 형식에 맞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발적이고 강제적으로 일어난다. .... 그러므로 남유의 강제력에 의하여 출현하는 이 의미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 의미의 대립적 구도 안에서 그 중간적 위치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중간적 위치의 고유 의미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고유 의미와 달리 어떤 명칭이나 기호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특징을 지닌다. .... 즉 남유는 원래 언어를 벗어나 있고 그래서 표현 불가능한 의미를 기존 언어의 강제적 전용과 폭력적 확장을 통해서 말의 세계로 끌어낼 수 있고, 따라서 남유는 새로운 의미의 발견에 대하여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비유법이다. 말로 할 수 없고 추적할 수 없는 묵시적 관념의 세계로 침입해 들어가는 힘, 그것이 바로 남유의 돌발성이고 탈규칙적인 강제력이다. 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말의 영역으로 끌어냄으로써, 남유는 더 나아가서 언어의 교환 규칙과 통상적 기능 방식을 변형시키고 새로운 말놀이의 가능성을 창출한다. 말하자면 비유는 언어의 가능성 범위를 넓히고 언어의 규칙을 개혁하는 전위적 언어이다. (288-9)
남유를 통해서 언어 세계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관념적 진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데리다가 늘 의심하는 것은 바로 그런 언어 이전에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온 진리이다. (290)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
데리다에게서 형이상학의 한계는 어디서 드러나는가? 그것은 언어의 과잉과 기호의 인플레이션을 통하여, 그리고 '기표의 기표'가 기의를 대신하거나 소멸시키는 현상 속에서 노출된다. 기호의 범람 속에서 실재성이 소멸하고 기표가 더 이상 기의에 근거하거나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기표가 기표의 근거가 되고 기원이 된다는 것, 바로 여기에서 형이상학적 전제 위에 서 있던 고전적 기호 개념이 파괴되고 있다(G.: 15-21) (185)
그러므로 니체에게서 은유는 단순히 언어적 표현의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대면하는 최초의 신체적 접촉에서부터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상이 일으키는 생리적 자극을 수용할 때 이미 신체는 그 자극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며, 이 해석에서 비롯되는 지각과 언어는 그 해석에 대한 은유적 재해석이자 재왜곡의 과정에 불과하다. 은유적 해석과 가상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일치하지 않고, 그런 한에서 인간의 언어는 그 기원에서부터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진리란 허구에 불과하다. (238)
"명사의 범위는-그리고 따라서 명사의 전용 또는 자리 바꾸기로서의 은유의 범위는-엄밀한 의미의 명사의 범위가 아니라 (......) 명사화 가능한 것의 범위이다. 이 명사화에 저항하는 모든 말은 은유에 무관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명사화될 수 있는 것은 완결되어 있고 독립적인 지위의 의미체를 지시하는 말이며, 모든 구문론적 관계 밖에 놓여 있더라도 그 자체로 인지 가능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명사의 이해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은유의 개념이 성립하는 지반이 되고 있다. (255)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체의 형체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극히 정확하게 그려 놓았을 때에는 보고 쾌감을 느낀다." 이 문장은 주목할 만한 아이러니를 함의하고 있다. 이 문장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원래의 모방 대상에는 없던 쾌감을 산출하는 힘을 지닌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술 작품은 그 원본과 차이를 지닌다. 그러나 이 차이는 그 작품이 원본을 '극히 정확하게' 그려낼수록 커진다. 이것이 아이러니이다. (267)
그러한 환원주의적 언어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서, 비평가들은 시적 언어가 논리적 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일탈적 권리에 대해서 맹목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언어의 특권에 맹목이라는 것은 시 자체의 목적과 의도, 나아가서 예술작품의 존재 양태에 대해서 맹목이라는 것과 같다. 시적 언어가 때로는 모순을 범하고 때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태를 묘사하며, 나아가서 불합리하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예술 작품의 존재가 가능적 존재 양태이기 때문이다. 이 가능적 존재로서의 예술 내적 사건은 논리적 필연성이 아니라 개연성과 납득 가능성을 그 구성 원리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원리가 시적 언어의 구성 원리인 것은 시적 행위의 궁극적 의도와 목적이 경이감과 쾌감에 있기 때문이다. (274-5)
데리다에 따르자면, 은유적 전이의 수레바퀴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단순해 보이는 은유, 나아가서 소위 비은유적 개념 또한 이미 먼 길을 지나온 그 은유적 전이의 수레를 타고 있으며, 이 수레의 이동은 무한히 이어질 것이다. 생략 유추나 부정에 의한 은유에서 볼 수 있는 은유적 역동성의 무한한 반복과 중첩 가능성은 '은유의 구조' 자체에 등재되어 있는 가능성이며, 은유가 은유로서 태어나는 모든 현장에서 잠복해 있는 가능성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한한 은유적 중첩 운동은 표면으로 부상할수록 은유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개념적 규정을 위기에 빠트리게 된다. 이는 은유적 반복과 그 역동성이 시작되는 출발점으로서 규정되었던 고정된 의미가 그 역동성 자체에 의하여 점점 뒤로 밀려나서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은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들에서부터 실마리를 얻어서 연출해 볼 수 있는 어떤 극단적 상황이며, 이렇게 연출된 상황은 허구가 아니다. (279)
데리다에 의하면, 은유에 대한 철학적 정의가 이미 은유적 성격을 띠고 있다면, 또는 그 정의하는 개념이 은유의 은유에 불과하다면, 이 은유의 은유로서의 철학적 개념들은 두 가지 종류의 은유로 환원된다. 그것은 빛의 은유와 집의 은유이다. 빛의 은유는, 이제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태양중심주의적 은유 체계를 언급하면서 충분히 부각된 것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나타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 명료한 것과 애매한 것 등등의 철학적 비유가 등장하는 곳에 먼저 존재한다. 빛의 은유는 여타의 비유와 개념이 생성되는 원천으로서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다. 반면 집의 은유는 말의 은유적 이행에 대한 표상이 수렴되는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데리다는 집의 은유를 빛의 은유와 마찬가지로 모든 은유들을 지배하는 은유로서 거론하고 있다. (....)
사실 은유는 어떤 말이 자신 속에 다른 의미가 거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미는 것에서 시작한다. 거꾸로 말해서 어떤 말이 자신의 의미를 떠나서 다른 의미를 수용하게 되는 이동과 자리 옮김이 은유적 전용의 본성이다. 이 은유적 이동을 위하여 처음에 의미는 자기 집 밖에 놓이지만, 자기 집 밖에서 계속 유동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전셋집에 재기숙한다. 이 임대된 방이 은유적 표현이다. 그리고 이 임대된 방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다시 회복한다. 말의 은유적 전용 속에서 의미는 자기 집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지만 곧 새집을 얻게 되어서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일의적 의미를 구하는 철학적 은유란 그러므로 어떤 잃어버렸던 진리에 대한 우회적 재회복이며, 이 재회복의 거리가 소멸되는 종착지가 바로 "진리의 임재, 관념의 충만한 자기 현전"이다. (283-4)
만일 의미를 초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최초에 어떻게 언어의 세계 안에 편입되었던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퐁타니에의 남유이론이다. 남유란 의미론적 대체의 틀을 벗어나는 과도한 비유이다. 이 남용적 비유에서는 기호의 전이와 대체가 순차적이고 형식에 맞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발적이고 강제적으로 일어난다. .... 그러므로 남유의 강제력에 의하여 출현하는 이 의미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고유한 의미와 비유적 의미의 대립적 구도 안에서 그 중간적 위치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중간적 위치의 고유 의미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고유 의미와 달리 어떤 명칭이나 기호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특징을 지닌다. .... 즉 남유는 원래 언어를 벗어나 있고 그래서 표현 불가능한 의미를 기존 언어의 강제적 전용과 폭력적 확장을 통해서 말의 세계로 끌어낼 수 있고, 따라서 남유는 새로운 의미의 발견에 대하여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비유법이다. 말로 할 수 없고 추적할 수 없는 묵시적 관념의 세계로 침입해 들어가는 힘, 그것이 바로 남유의 돌발성이고 탈규칙적인 강제력이다. 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말의 영역으로 끌어냄으로써, 남유는 더 나아가서 언어의 교환 규칙과 통상적 기능 방식을 변형시키고 새로운 말놀이의 가능성을 창출한다. 말하자면 비유는 언어의 가능성 범위를 넓히고 언어의 규칙을 개혁하는 전위적 언어이다. (288-9)
남유를 통해서 언어 세계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관념적 진리가 존재하는 것일까? 데리다가 늘 의심하는 것은 바로 그런 언어 이전에 존재한다고 생각되어온 진리이다. (290)
김상환 <<해체론 시대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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