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mberto Maturana
- 생활정보
- 2007. 8. 31. 13:25
현재 상태의 우리 지식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인간만이 언어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이 있을 수 있는지를 자문할 때, 우리는 말하기에 의해,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통해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저기 어디 바깥에 '관찰자와 독립적인' 실재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파악할 때조차도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토론을 위해서 언어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이야말로 존재에 대한 이러한 토론들과 주장들이 완전히 무의미하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143)
내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행위의 순환[재귀]적인 조정, 즉 행위의 조정의 조정에서의 흐름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것, 즉 언어가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어가 출현할 때 대상들이 출현합니다. 예컨대 택시 같은 것 말입니다. 택시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행위의 두 번째 조정(첫 번째 순환[재귀])에 의해 조정을 이룬 행위의 조정으로서의 승객을 태우는 수송 및 운전은 행위의 세 번째의 조정(두 번째 순환[재귀]) 속에서 택시라고 "이름 붙여져" 나타나는 행위의 그러한 배치(configuration)가 된다.' 이것은 (택시가 수송[실어나름]을 모호하게 하는 것처럼) 대상들이 자기들이 조정하는 행위를 모호하게 하는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으로서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생님이 제시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이 새로운 이해가 갖는 장점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언어가 정보 전송의 수단이 아니라, 그리고 소통 체계가 아니라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의 흐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임을 드러내 줍니다. 이것은 상호작용하는 체계들의 구조적 결정론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일단 이것이 파악되고 나면 상징들이 언어의 시초가 아니라, 역으로 언어가 상징들의 기원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잠깐 우리가 체계들의 상호작용 및 언어현상과 관련한 우리 대화의 앞머리에서 논의했던 인터뷰 약속이라는 핵심적인 사태로 돌아가 볼까요? 당신이 칠레로 오기 전에 우리가 나눴던 전화 통화는 함부르크에서 산티아고로, 또는 산티아고에서 함부르크로 이어지는 정보전송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상호작용의 결정적인 결과는 두 개의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푀르크젠과 마뚜라나-이 그들의 행위의 순환[재귀]적인 조정을,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을 이루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여기에 함께 앉아있는 것입니다. (146-7)
내가 보기에는, 모든 행위가 관계들의 동학 속에 삽입되기 때문에 어떤 체계적 이해는 항상 필요할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 둘만이 여기에서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을지라도 우리 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 우리의 문화, 우리가 태어난 나라, 우리의 모국어 등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속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는 내용과 방법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관계들의 전체 네트워크를 몸에 지닙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마주침은 순전히 개인적일 수 있지만 우리 둘 모두 체계적 동학의 빠져나올 수 없는 일부이다.' 문화의 형성적 힘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결정에 따라) 우리가 실제로 하는 것과 (우리의 출신으로 인해) 우리를 관통해 일어나는 것을 확증할 수 있도록 해 줄 성찰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형성하는 영향력들'을 깨달을 때에만 해방을 위한 기회가 생겨나게 됩니다. (198-9)
우리는 모든 인간들이 지적이며, 매우 드물게만 논리적 실수를 저지른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특히 아이들은 (어른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그래서 잘못이며 문젯거리라고 선언되는) 수많은 구분들을 이용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의 생각들이 비논리적이고 잘못되어 있다는 의견은 대개, 말해진 것이 관찰자의 청취와 판단의 기초인 논리 영역과는 다른 어떤 논리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무릇 실수란 또 다른 영역의 맥락 속에서 청취되고 평가된, 실재의 특별한 영역에서 만들어진 진술인 것입니다.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직 정확하게 알거나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됩니다.
괄호없는 객관성의 경로를 취하는 사람들은 실수나 환각을 처벌해야 할 잘못들로, 실패의 징후들로 간주합니다. 지각되어야 하고 이해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있는데, 사람들이 단지 그것을 보거나 이해할 수 없고, 사물들을 그것들의 실재대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괄호 친 객관성의 경로를 따르는 사람들은 환각과 실수의 체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환각들과 실수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대답은 이렇습니다. '어떤 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그리고 제한된 전망에서 외관상으로 지각된 현상의 적절한 특징들에 부합하는, 구조적으로 결정된 유기체 안에서 유발된다.' 이것은 우리가 환각들과 실수들을-아이러니하게-부분적 진실들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어떤 현상에 부합하지만, 우리는 작동의 과정에서는 그것들이 전체 현상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체험의 순간에는, 지각과 환각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내 주장입니다. 만일 당신이 창문 밖에 있는 유니콘이 있다고 나에게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면, 그때에 당신은 완전히 그 세계에 빠져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전체 몸은 그러한 체험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세계에 흡수됩니다. 오직 나중에 가서야 유니콘이 한 쌍의 새들로 인한 나뭇잎들의 다소 이상한 움직임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환각이란 그것이 다른 체험에 의해 자격을 박탈당하기 전까지는 타당한 것으로 남아있는 체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215-7)
내가 '알기'의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연관된 모든 과정들의 근본적인 조건으로서의 '아는 자'가 불가피하게 최전선으로 이동했습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말해지는 것이 어떠한 조건 아래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있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분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의 기원이자 원천입니다.(257)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누구도 확신시키고 싶지 않고, 사람들을 순환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혁명가가 아니며 내 자신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임무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단지 어떠한 과정들이 어떻게 해서 어떠한 존재[실체]들을 산출하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게 답니다. 나는 오늘도, 내가 마치 무한한 양의 시간을 가진 것처럼, 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나만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젊었을 적에는-심지어 60년대 초반에도- 사정은 어쩌면 이와 달랐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견해들을 확신시키고자 했습니다. 나는 이제 이러한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사람들을 확신시키려 애쓸수록, 너는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되는 거야.' 나는 그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259)
결정적인 통찰은 관찰자들이 그들이 구분의 작동들을 통해 그들이 지각하는 것을 상술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은유들 역시 사용하지 않습니다. 은유들은 영역들을 뒤섞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이해하기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들은 이해에 손상을 가합니다. 나는 은유들이 우리를 미혹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막 논의되고 있거나 서술되고 있는 것'을 스스로 예증하는 진술들-그것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의 본보기들인 진술들-을 위해 '이소퍼(isopher)'라는 용어를 도입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이해에 다다르기 위하여, 은유의 경우에서처럼, 상이한 영역들을 연결하거나 뒤섞지 않습니다. (310)
있음에서 함으로,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06,
내 주장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행위의 순환[재귀]적인 조정, 즉 행위의 조정의 조정에서의 흐름과 마주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것, 즉 언어가 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어가 출현할 때 대상들이 출현합니다. 예컨대 택시 같은 것 말입니다. 택시란 무엇입니까?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행위의 두 번째 조정(첫 번째 순환[재귀])에 의해 조정을 이룬 행위의 조정으로서의 승객을 태우는 수송 및 운전은 행위의 세 번째의 조정(두 번째 순환[재귀]) 속에서 택시라고 "이름 붙여져" 나타나는 행위의 그러한 배치(configuration)가 된다.' 이것은 (택시가 수송[실어나름]을 모호하게 하는 것처럼) 대상들이 자기들이 조정하는 행위를 모호하게 하는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으로서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생님이 제시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이 새로운 이해가 갖는 장점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언어가 정보 전송의 수단이 아니라, 그리고 소통 체계가 아니라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의 흐름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자 방법임을 드러내 줍니다. 이것은 상호작용하는 체계들의 구조적 결정론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일단 이것이 파악되고 나면 상징들이 언어의 시초가 아니라, 역으로 언어가 상징들의 기원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잠깐 우리가 체계들의 상호작용 및 언어현상과 관련한 우리 대화의 앞머리에서 논의했던 인터뷰 약속이라는 핵심적인 사태로 돌아가 볼까요? 당신이 칠레로 오기 전에 우리가 나눴던 전화 통화는 함부르크에서 산티아고로, 또는 산티아고에서 함부르크로 이어지는 정보전송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상호작용의 결정적인 결과는 두 개의 '구조적으로 결정된' 체계들-푀르크젠과 마뚜라나-이 그들의 행위의 순환[재귀]적인 조정을, '행위의 조정들의 조정'을 이루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여기에 함께 앉아있는 것입니다. (146-7)
내가 보기에는, 모든 행위가 관계들의 동학 속에 삽입되기 때문에 어떤 체계적 이해는 항상 필요할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 둘만이 여기에서 서로에게 이야기하고 있을지라도 우리 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 우리의 문화, 우리가 태어난 나라, 우리의 모국어 등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속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는 내용과 방법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관계들의 전체 네트워크를 몸에 지닙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마주침은 순전히 개인적일 수 있지만 우리 둘 모두 체계적 동학의 빠져나올 수 없는 일부이다.' 문화의 형성적 힘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결정에 따라) 우리가 실제로 하는 것과 (우리의 출신으로 인해) 우리를 관통해 일어나는 것을 확증할 수 있도록 해 줄 성찰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형성하는 영향력들'을 깨달을 때에만 해방을 위한 기회가 생겨나게 됩니다. (198-9)
우리는 모든 인간들이 지적이며, 매우 드물게만 논리적 실수를 저지른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특히 아이들은 (어른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그래서 잘못이며 문젯거리라고 선언되는) 수많은 구분들을 이용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의 생각들이 비논리적이고 잘못되어 있다는 의견은 대개, 말해진 것이 관찰자의 청취와 판단의 기초인 논리 영역과는 다른 어떤 논리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무릇 실수란 또 다른 영역의 맥락 속에서 청취되고 평가된, 실재의 특별한 영역에서 만들어진 진술인 것입니다.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직 정확하게 알거나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됩니다.
괄호없는 객관성의 경로를 취하는 사람들은 실수나 환각을 처벌해야 할 잘못들로, 실패의 징후들로 간주합니다. 지각되어야 하고 이해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있는데, 사람들이 단지 그것을 보거나 이해할 수 없고, 사물들을 그것들의 실재대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괄호 친 객관성의 경로를 따르는 사람들은 환각과 실수의 체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환각들과 실수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대답은 이렇습니다. '어떤 것은, 특정한 방식으로 그리고 제한된 전망에서 외관상으로 지각된 현상의 적절한 특징들에 부합하는, 구조적으로 결정된 유기체 안에서 유발된다.' 이것은 우리가 환각들과 실수들을-아이러니하게-부분적 진실들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부분적으로 어떤 현상에 부합하지만, 우리는 작동의 과정에서는 그것들이 전체 현상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체험의 순간에는, 지각과 환각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게 내 주장입니다. 만일 당신이 창문 밖에 있는 유니콘이 있다고 나에게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면, 그때에 당신은 완전히 그 세계에 빠져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전체 몸은 그러한 체험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세계에 흡수됩니다. 오직 나중에 가서야 유니콘이 한 쌍의 새들로 인한 나뭇잎들의 다소 이상한 움직임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환각이란 그것이 다른 체험에 의해 자격을 박탈당하기 전까지는 타당한 것으로 남아있는 체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215-7)
내가 '알기'의 과정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연관된 모든 과정들의 근본적인 조건으로서의 '아는 자'가 불가피하게 최전선으로 이동했습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모든 말해지는 것이 어떠한 조건 아래에서도 그것을 말하고 있는 사람과 분리될 수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말하는 사람과 말해지는 것 사이에는 어떠한 분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의 기원이자 원천입니다.(257)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누구도 확신시키고 싶지 않고, 사람들을 순환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혁명가가 아니며 내 자신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임무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단지 어떠한 과정들이 어떻게 해서 어떠한 존재[실체]들을 산출하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게 답니다. 나는 오늘도, 내가 마치 무한한 양의 시간을 가진 것처럼, 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나만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젊었을 적에는-심지어 60년대 초반에도- 사정은 어쩌면 이와 달랐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견해들을 확신시키고자 했습니다. 나는 이제 이러한 의도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사람들을 확신시키려 애쓸수록, 너는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되는 거야.' 나는 그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259)
결정적인 통찰은 관찰자들이 그들이 구분의 작동들을 통해 그들이 지각하는 것을 상술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은유들 역시 사용하지 않습니다. 은유들은 영역들을 뒤섞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이해하기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들은 이해에 손상을 가합니다. 나는 은유들이 우리를 미혹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막 논의되고 있거나 서술되고 있는 것'을 스스로 예증하는 진술들-그것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의 본보기들인 진술들-을 위해 '이소퍼(isopher)'라는 용어를 도입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이해에 다다르기 위하여, 은유의 경우에서처럼, 상이한 영역들을 연결하거나 뒤섞지 않습니다. (310)
있음에서 함으로, 서창현 옮김, 갈무리, 2006,
이 글을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