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tecture as metaphor
- 생활정보
- 2007. 9. 2. 18:41
그 대신에 플라톤은 상상 속에서 그 불가능한 것을 실현시켰다. 즉, 그는 소크라테스를 이 달성 불가능한 생각에 대한 순교자로 만들었다. 이는 예를 들면 성 바울이 예수를 숭배의 대상으로 만든 것과 같은 방식이라 하겠다. 이 모든 것은 이상의 존재가 불가능함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불가능한 것, 즉 이상의 존재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함으로써 건축에의 의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이 건축에의 의지가 바로 서양 사유의 토대다. (47, 영어판 서문)
마르크스가 화폐 형태에 관한 자신의 이론에서 논증했던 것은 화폐와 상품 간의 관계가 두 형태-상대적 가치 형태와 등가물 형태-사이의 어떤 비대칭적인 체계의 발전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화폐와 상품 간의- 더 정확히 말해서, 구매와 판매 간의-비대칭성은 처음부터 존재했으며 결코 극복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가 종종 언급했던 위기가 놓이게 된다. (49, 영어판 서문)
실제 건축에서는, 이데아로서의 어떤 디자인을 실현하는 것이 건축이라는 생각보다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 ... 어떠한 건축도 자신의 맥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건축은 그것이 제작자의 통제를 넘어서는 제작 또는 생성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탁월한 사건이다. (51, 영어판 서문)
건축의 은유에서 플라톤은 '제작'을 방패삼아 '생성'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비유를 찾아 냈다. (66)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과학을 지탱하는 것은 수학이나 확실하고 엄밀한 토대가 아니라 하나의 신념, 즉 위대한 건축가인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세계는 질서잡혀 있으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인식 가능하다는 신념이라고 주장했다. (67)
'견고한 건축물을 구축하려는 의지'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토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자신의 토대가 부재함을 드러낸다는 역설적 사실이다. (69)
니체에게 수학은 오직 수와 양에만 관련되는 것이었던 반면에 개념이란 케케묵은 은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다른 사람들의 사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개념은 관계다. 수학은 물질의 관계들을 탐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물질 그 자체가 얼마나 변하는지는 개의치 않고 불변하는 관계들, 결코 변하지 않는 관계들을 연구한다. 그래서 수학은 플라톤에게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규범으로 간주된다. (71)
후설은 니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사유의 심연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둘 다 합리성 자체가 어떤 비합리적인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78)
서구 사상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지식의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위기 때마다 새로워지는 건축에의 의지다. 이 의지는 혼돈스럽고 다양한 생성 속에서 구조와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하나의 비합리적인 선택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 이는 단지 많은 것들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81)
발레리는 인간이 만든 것의 표시는 그것의 형식이 지니는 구조가 그것의 질료가 지니는 구조나 구성에 비해 단순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예컨대, 어떤 문학 작품의 구조를 파악해 보면, 그 구조는 항상 텍스트 자체보다 단순하다. 비록 인간에 만들어졌지만 텍스트는 구조보다 더 복잡하고 더 초과한다. 텍스트는 언어라는 자연적인 질료가 혼합되어 짜여진 구축물이기 때문이다. 한편, 구조는 어떠한 구조든지 간에 그 구조가 형성될 때의 어떤 의도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텍스트에 대한 구조적 분석에는 항상 감추어진 의미 내지 작가가 전제되게 마련이다. (89)
소쉬르는 랑그란 말하는 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사회적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놓여 있다. 즉, 물리적인 말소리와 구별되는 소리 유형은 어떤 변별적 기능이 있는 한에서만 뽑아낼 수 있는데, 그 변별적 기능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말하는 주체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가 말하는 주체를 위해 존재할 때 그 때에만 그 의미를 구분하는 형식이 항상 그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랑그의 언어학도 말하는 주체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환원에 의해, 즉 예를 들면 물리적 말소리, 지시 대상, 문맥을 괄호침으로써 도출된다. 따라서, 랑그의 언어학은 자신의 전제로서 주체를 요구한다. 그것에 의해서 발견되는 차이의 형태가 더 높은 차원의 조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항상 목적론적인 성격을 띠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발레리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이 만든 것'은 항상 단순화를 동반한다. (102)
특히, 이 차이의 형태들은 '체험된 세계'를 현상학적으로 환원함으로써 뽑힌 형태들이다.
그러므로 구조는 초월적 자아를 상정하고 이것과 하나가 된다. 데리다가 구조주의가 아닌 후설의 현상학 읽기에서 자신의 비판-해체론-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03)
수학 분야에서 제로 기호는 상식이다. 수학적 구조는 하나의 형식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기능으로서 작동한다. 즉, 그것의 변형 규칙 속에서 변형의 특성을 띠지 않는 기능까지도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 야콥슨의 제로 음소는 수학적 변형 그룹들 속에 있는 단위 요소 e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야콥슨이 제로를 채용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초점을 맞추었던 구조는 개별 음소들 그 자체라기보다 오히려 음소들 사이의 대립적 관계의 묶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제로를 도입함으로써만 하나의 그룹(구조)이 구성될 수 있다. 야콥슨에게 제로가 의미하는 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제로는 인도에서 발명되었다. 그것은 원래 주판 위의 구슬을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름이었다. 만일 제로가 없다면, 숫자 205와 25는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로는 '어떤 수든지 간에 그 수의 없음과 맞서' 있다. 자리값 체계는 바로 이런 식으로 제로를 도입함으로써 확립되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제로에 해당하는 단어가 비록 불교의 공 개념에 해당하는 단어와 같다 하더라도, '제로'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개념과는 구분되어어야만 한다. 제로는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로가 서양에서보다 인도에서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진 것을 생각해 보면-서양에서는 12세기에 제로가 처음 등장했을 때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이 개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여기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103,4)
이것은 조각들을 상하 좌우로 움직여 어떤 순서를 만드는 숫자 또는 문자 움직이기 게임의 빈 공간과 꼭 같다. 그 게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1,2,3과 같은 기표들의 차이의 체계가 아니라, 빈 자리 바로 그것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숫자들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떠돌아다는 것은, 그리고 이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그 빈 자리다. 그것을 라캉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러하다. 각각의 숫자는 자신이 주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 떠다니는 기표의 한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뒤바꿈이 아무리 지나치게 여겨질지라도, 떠도는 기표 또는 제로 기호는 구조의 구조성을 보장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은 그저 신이나 초월적 자아의 대리인으로서 존재할 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106,7)
마찬가지로 유태의 카발라와 이슬람의 신비주의에서의 의인적인 신도 단지 대중을 위해 고안된 어떤 표상일 뿐이다. 하지만 제로에 호소하는 것은 초월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다. (107)
실제로, 구조주의적인 건축에의 의지가 앞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에서만 텍스트의 애매성이 문제가 된다. 더욱이 텍스트의 애매성은 체계화하고 합리화하려는 구조주의적 욕망이 의도하지 않은 반대의 결과를 산출한다는 역설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텍스트의 애매성은 역사적 회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형식화에 의해서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115)
언어는 본질적으로 언어에 관한 언어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차이의 (형식) 체계가 아니라 자기 지식적인 체계,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체계, 즉 자기 자신과 차이를 만드는 어떤 체계다. 자기 지시적인 형식 체계, 또는 자기 자신과 차이를 만드는 차이의 체계self-differential differential system에는 토대도 중심도 없다. 그것은 여러 중심들을 갖고 있으며 초과적이다. 그러므로 소쉬르의 랑그라는 개념적 틀을 그러한 자기 지시성을 금지하는 데 기반하지만 여전히 자기지시성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에 성공하지 못한다. (129)
텍스트도 모순적인 의미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 참된 의미가 표면 아래에 있는 어떤 '심층 구조' 내에 숨겨져 있기 때문도 아니며 그 의미가 본성상 애매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형식주의적으로 접근하는 한 텍스트의 의미는 결정 불가능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체는 텍스트로부터 어떤 새로운 의미들의 집합을 강제로 뽑아 낸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괴델의 증명으로 볼 때 형식 체계들은 오직 그 체계들이 무모순적인 한에서만 불완전하다. 같은 방식으로, 어떤 텍스트의 해체적 읽기는 어떤 텍스트의 명시적인 의미가 적어도 한번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조건 아래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해체는 자의적인 해석을 위한 지칭하기 위한 또 다른 이름이 아니다. (130)
무한을 하나의 수로 취급했던 칸토르처럼 마르크스는 자본 자체를, 그리고 화폐 자체를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함으로써 자신의 '집합론'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흥미로워했던 것은 화폐의 일반성이 아니라 무한성이었다. 화폐는 가치의 일반적인 척도가 아니라,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교환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137)
즉, 괴델은 더 이상의 기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어떤 수학적 실재란 것이 실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더 나아가 그 가설의 결정 불가능성 또한 하나의 형식적인 증명 과정을 통해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그 실재를 적극적으로 새겨 놓는 대신에 소극적으로 넌지시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182)
비트겐슈타인은 증명이란 내놓기만 하면 그냥 자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규칙에 복종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183)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도 비록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식으로 쓰여져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독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85)
합리적이라는 것은 곧 대화를 하나의 전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진리를 산출하는 수학의 힘은 재판의 대화에서 살아남은 것만을 수학으로 인정하는 플라톤 식의 명제로부터 나온 것이다. 플라톤 이후로 수학적 증명은 그 범위가 개인적인 시야를 확장되는 상호 주관적 인식으로 보여지게 된다. (186)
즉, 타자-어떤 공통의 규칙들을 공유하지 않는-와의 의사소통은 항상 가르침-배움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의사 소통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론들은 모두 공유되는 어떤 공통의 규칙을 예외없이 가정하지만 외국인, 아이들, 정신병자들과의 대화에선 어떠한 공통 규칙도, 적어도 처음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 최초의 의사소통은 항상 가르침-배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일상적인 의사소통조차도 어느 정도 통약 불가능성을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결국엔 어쩔 수 없이 서로간의 가르침이 필요하게 된다. 만일 어떤 공통의 규칙이 표면 위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다만 이러한 가르침-배움의 상황의 한 결과일 뿐이다. (190,1)
가르치는 입장은 권위를 행사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둘 중에서 더 약한 쪽이다. 가르치는 쪽은 다른 누군가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거기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세는 사고 파는 사람의 관계에서 파는 입장에 비유될 수 있다. ...만일 하나의 개별 상품이 팔리거나 교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환 가치도 사용 가치도 가질 수 없다. (191)
반면에 비트겐슈타인은 내적 확실성을 갉아먹는 타자를 결코 신으로, 즉 절대적 타자로 그리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타자는 언제나 아이고 외국인인, 즉 상대적 타자다. (195)
바로 이 판매와 가르침에서 타자와의 비대칭적인 의사 소통 관계가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철학적 담론들은 바로 이러한 비대칭성을 지워버림으로써 자신들의 근거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197)
언어의 규칙들은 그 언어를 이미 말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언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의 관점에서 구성된다. (211)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그토록 집요하게 하고자 했던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본래부터 달라붙어 있던 비대칭성을 실증해 보이는 것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 비대칭성을 무시하는 사고 방식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 것이었다. (215)
신용의 본질은 파는 입장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위기를 피하는 것, 즉 현재의 위기를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연기하는 데 있다. (259)
끊임없는 차이짓기의 과정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시간성은 결코 무한한 미래를 향한 진보가 아니며, 기약 없는 미래로 지불 결제를 끊임없이 연기하는 것이다. (260)
Karatani Kojin, 김재희 역, 한나래, 1998
마르크스가 화폐 형태에 관한 자신의 이론에서 논증했던 것은 화폐와 상품 간의 관계가 두 형태-상대적 가치 형태와 등가물 형태-사이의 어떤 비대칭적인 체계의 발전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화폐와 상품 간의- 더 정확히 말해서, 구매와 판매 간의-비대칭성은 처음부터 존재했으며 결코 극복될 수 없다.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가 종종 언급했던 위기가 놓이게 된다. (49, 영어판 서문)
실제 건축에서는, 이데아로서의 어떤 디자인을 실현하는 것이 건축이라는 생각보다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 ... 어떠한 건축도 자신의 맥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건축은 그것이 제작자의 통제를 넘어서는 제작 또는 생성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탁월한 사건이다. (51, 영어판 서문)
건축의 은유에서 플라톤은 '제작'을 방패삼아 '생성'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비유를 찾아 냈다. (66)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과학을 지탱하는 것은 수학이나 확실하고 엄밀한 토대가 아니라 하나의 신념, 즉 위대한 건축가인 신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세계는 질서잡혀 있으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인식 가능하다는 신념이라고 주장했다. (67)
'견고한 건축물을 구축하려는 의지'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토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자신의 토대가 부재함을 드러낸다는 역설적 사실이다. (69)
니체에게 수학은 오직 수와 양에만 관련되는 것이었던 반면에 개념이란 케케묵은 은유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다른 사람들의 사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개념은 관계다. 수학은 물질의 관계들을 탐구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물질 그 자체가 얼마나 변하는지는 개의치 않고 불변하는 관계들, 결코 변하지 않는 관계들을 연구한다. 그래서 수학은 플라톤에게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규범으로 간주된다. (71)
후설은 니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사유의 심연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둘 다 합리성 자체가 어떤 비합리적인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78)
서구 사상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지식의 건축물 자체가 아니라 위기 때마다 새로워지는 건축에의 의지다. 이 의지는 혼돈스럽고 다양한 생성 속에서 구조와 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하나의 비합리적인 선택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 이는 단지 많은 것들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81)
발레리는 인간이 만든 것의 표시는 그것의 형식이 지니는 구조가 그것의 질료가 지니는 구조나 구성에 비해 단순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예컨대, 어떤 문학 작품의 구조를 파악해 보면, 그 구조는 항상 텍스트 자체보다 단순하다. 비록 인간에 만들어졌지만 텍스트는 구조보다 더 복잡하고 더 초과한다. 텍스트는 언어라는 자연적인 질료가 혼합되어 짜여진 구축물이기 때문이다. 한편, 구조는 어떠한 구조든지 간에 그 구조가 형성될 때의 어떤 의도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텍스트에 대한 구조적 분석에는 항상 감추어진 의미 내지 작가가 전제되게 마련이다. (89)
소쉬르는 랑그란 말하는 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사회적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놓여 있다. 즉, 물리적인 말소리와 구별되는 소리 유형은 어떤 변별적 기능이 있는 한에서만 뽑아낼 수 있는데, 그 변별적 기능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말하는 주체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가 말하는 주체를 위해 존재할 때 그 때에만 그 의미를 구분하는 형식이 항상 그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랑그의 언어학도 말하는 주체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현상학적 환원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것은 환원에 의해, 즉 예를 들면 물리적 말소리, 지시 대상, 문맥을 괄호침으로써 도출된다. 따라서, 랑그의 언어학은 자신의 전제로서 주체를 요구한다. 그것에 의해서 발견되는 차이의 형태가 더 높은 차원의 조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항상 목적론적인 성격을 띠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발레리가 지적한 것처럼 '인간이 만든 것'은 항상 단순화를 동반한다. (102)
특히, 이 차이의 형태들은 '체험된 세계'를 현상학적으로 환원함으로써 뽑힌 형태들이다.
그러므로 구조는 초월적 자아를 상정하고 이것과 하나가 된다. 데리다가 구조주의가 아닌 후설의 현상학 읽기에서 자신의 비판-해체론-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03)
수학 분야에서 제로 기호는 상식이다. 수학적 구조는 하나의 형식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기능으로서 작동한다. 즉, 그것의 변형 규칙 속에서 변형의 특성을 띠지 않는 기능까지도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 야콥슨의 제로 음소는 수학적 변형 그룹들 속에 있는 단위 요소 e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야콥슨이 제로를 채용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초점을 맞추었던 구조는 개별 음소들 그 자체라기보다 오히려 음소들 사이의 대립적 관계의 묶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제로를 도입함으로써만 하나의 그룹(구조)이 구성될 수 있다. 야콥슨에게 제로가 의미하는 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제로는 인도에서 발명되었다. 그것은 원래 주판 위의 구슬을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름이었다. 만일 제로가 없다면, 숫자 205와 25는 구별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로는 '어떤 수든지 간에 그 수의 없음과 맞서' 있다. 자리값 체계는 바로 이런 식으로 제로를 도입함으로써 확립되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제로에 해당하는 단어가 비록 불교의 공 개념에 해당하는 단어와 같다 하더라도, '제로'는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개념과는 구분되어어야만 한다. 제로는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로가 서양에서보다 인도에서 훨씬 더 쉽게 받아들여진 것을 생각해 보면-서양에서는 12세기에 제로가 처음 등장했을 때 엄청나게 시끄러웠다- 이 개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여기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103,4)
이것은 조각들을 상하 좌우로 움직여 어떤 순서를 만드는 숫자 또는 문자 움직이기 게임의 빈 공간과 꼭 같다. 그 게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1,2,3과 같은 기표들의 차이의 체계가 아니라, 빈 자리 바로 그것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숫자들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떠돌아다는 것은, 그리고 이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그 빈 자리다. 그것을 라캉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러하다. 각각의 숫자는 자신이 주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 떠다니는 기표의 한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뒤바꿈이 아무리 지나치게 여겨질지라도, 떠도는 기표 또는 제로 기호는 구조의 구조성을 보장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은 그저 신이나 초월적 자아의 대리인으로서 존재할 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106,7)
마찬가지로 유태의 카발라와 이슬람의 신비주의에서의 의인적인 신도 단지 대중을 위해 고안된 어떤 표상일 뿐이다. 하지만 제로에 호소하는 것은 초월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다. (107)
실제로, 구조주의적인 건축에의 의지가 앞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에서만 텍스트의 애매성이 문제가 된다. 더욱이 텍스트의 애매성은 체계화하고 합리화하려는 구조주의적 욕망이 의도하지 않은 반대의 결과를 산출한다는 역설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텍스트의 애매성은 역사적 회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형식화에 의해서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115)
언어는 본질적으로 언어에 관한 언어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차이의 (형식) 체계가 아니라 자기 지식적인 체계,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체계, 즉 자기 자신과 차이를 만드는 어떤 체계다. 자기 지시적인 형식 체계, 또는 자기 자신과 차이를 만드는 차이의 체계self-differential differential system에는 토대도 중심도 없다. 그것은 여러 중심들을 갖고 있으며 초과적이다. 그러므로 소쉬르의 랑그라는 개념적 틀을 그러한 자기 지시성을 금지하는 데 기반하지만 여전히 자기지시성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에 성공하지 못한다. (129)
텍스트도 모순적인 의미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 참된 의미가 표면 아래에 있는 어떤 '심층 구조' 내에 숨겨져 있기 때문도 아니며 그 의미가 본성상 애매하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형식주의적으로 접근하는 한 텍스트의 의미는 결정 불가능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체는 텍스트로부터 어떤 새로운 의미들의 집합을 강제로 뽑아 낸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괴델의 증명으로 볼 때 형식 체계들은 오직 그 체계들이 무모순적인 한에서만 불완전하다. 같은 방식으로, 어떤 텍스트의 해체적 읽기는 어떤 텍스트의 명시적인 의미가 적어도 한번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는 조건 아래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해체는 자의적인 해석을 위한 지칭하기 위한 또 다른 이름이 아니다. (130)
무한을 하나의 수로 취급했던 칸토르처럼 마르크스는 자본 자체를, 그리고 화폐 자체를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함으로써 자신의 '집합론'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흥미로워했던 것은 화폐의 일반성이 아니라 무한성이었다. 화폐는 가치의 일반적인 척도가 아니라, 오히려 무조건적으로 교환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으로 여겨져야만 한다. (137)
즉, 괴델은 더 이상의 기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어떤 수학적 실재란 것이 실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더 나아가 그 가설의 결정 불가능성 또한 하나의 형식적인 증명 과정을 통해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그 실재를 적극적으로 새겨 놓는 대신에 소극적으로 넌지시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182)
비트겐슈타인은 증명이란 내놓기만 하면 그냥 자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규칙에 복종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183)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도 비록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식으로 쓰여져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독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185)
합리적이라는 것은 곧 대화를 하나의 전제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진리를 산출하는 수학의 힘은 재판의 대화에서 살아남은 것만을 수학으로 인정하는 플라톤 식의 명제로부터 나온 것이다. 플라톤 이후로 수학적 증명은 그 범위가 개인적인 시야를 확장되는 상호 주관적 인식으로 보여지게 된다. (186)
즉, 타자-어떤 공통의 규칙들을 공유하지 않는-와의 의사소통은 항상 가르침-배움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의사 소통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론들은 모두 공유되는 어떤 공통의 규칙을 예외없이 가정하지만 외국인, 아이들, 정신병자들과의 대화에선 어떠한 공통 규칙도, 적어도 처음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 최초의 의사소통은 항상 가르침-배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일상적인 의사소통조차도 어느 정도 통약 불가능성을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결국엔 어쩔 수 없이 서로간의 가르침이 필요하게 된다. 만일 어떤 공통의 규칙이 표면 위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다만 이러한 가르침-배움의 상황의 한 결과일 뿐이다. (190,1)
가르치는 입장은 권위를 행사하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둘 중에서 더 약한 쪽이다. 가르치는 쪽은 다른 누군가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거기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세는 사고 파는 사람의 관계에서 파는 입장에 비유될 수 있다. ...만일 하나의 개별 상품이 팔리거나 교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환 가치도 사용 가치도 가질 수 없다. (191)
반면에 비트겐슈타인은 내적 확실성을 갉아먹는 타자를 결코 신으로, 즉 절대적 타자로 그리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타자는 언제나 아이고 외국인인, 즉 상대적 타자다. (195)
바로 이 판매와 가르침에서 타자와의 비대칭적인 의사 소통 관계가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철학적 담론들은 바로 이러한 비대칭성을 지워버림으로써 자신들의 근거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197)
언어의 규칙들은 그 언어를 이미 말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언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외국인들'의 관점에서 구성된다. (211)
결국, 비트겐슈타인이 그토록 집요하게 하고자 했던 것은, 타자와의 관계에 본래부터 달라붙어 있던 비대칭성을 실증해 보이는 것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 비대칭성을 무시하는 사고 방식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 것이었다. (215)
신용의 본질은 파는 입장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위기를 피하는 것, 즉 현재의 위기를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연기하는 데 있다. (259)
끊임없는 차이짓기의 과정 속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자본주의의 시간성은 결코 무한한 미래를 향한 진보가 아니며, 기약 없는 미래로 지불 결제를 끊임없이 연기하는 것이다. (260)
Karatani Kojin, 김재희 역, 한나래,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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