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미셸 드 몽테뉴(1533-1592)
- 생활정보
- 2007. 7. 4. 14:53
이 인문주의적 회의주의 사상가는 프랑스의 Perigord 출신이며, 보르도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의회에 진출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공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아버지가 남겨준 성에서 자유문필가로 살았다. 1580년에 <<수상록>> 2권을 완성했으며, 8년 뒤에 다시 세 번째 권을 추가했다. 프랑스 전역과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등지를 여행하면서 여행기를 썼다. 4년간 보르도 시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자신의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시간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철학적 회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bekaeftig. 우리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나 목적이 아니며 하찮은 피조물로서 부당하게도 스스로를 동물보다 우월하게 여긴다. 우리의 감각지각과 이로부터 도출된 인식은 기만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가변적인 상황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오성의 인식들은 여러 가지로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우리는 오류와 진리를 판별해줄 최고의 심판자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이성의 힘으로는 결코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이제 우리의 도덕적 근본가치들 또한 민족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 가치질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가치의 영역에 있어서 우리는 의견을 넘어설 수 없다. 예로부터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죽음 앞에서의 불안이다. 그 때문에 철학은 오랫동안 올바른 죽음에 대한 가르침과 기술을 주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죽음을 의식 바깥으로 몰아내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며, 우리는 죽음과 일종의 우정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집트인들은 빈번히 그들의 축제상에 죽음의 상징을 올려두었다고 한다. 철학적 통찰을 통해 삶의 자연스런 과정 속에서 평안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죽음 속에서 자연의 섭리를 보았기 때문에 태연히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이 점에서 몽테뉴는 스토아 철학의 입장을 분명히 이어받았다.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사람은 자연의 법칙에 적응하여 조화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모든 회의주의자가 그러하듯이 몽테뉴도 일체의 사회개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새로운 것이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일리 없다. 현명한 인간은 세계의 영원한 질서에 순응하며, 새로운 이론과 세계관들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다.
그런 까닭에 몽테뉴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이론을 거부했다. 그러한 이론은 학자들 간의 끝없는 싸움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의심을 없애주지만, 곧바로 이에 대한 불확실성이 세 가지나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이 궁극적인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는 한 그는 결코 쉼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는 모든 진리, 인식, 가치의 상대성과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으며 정신의 내적 평안을 얻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환경과 사회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인간들은 사유에 있어서의 겸손함을 더 배우고, 신과 교회질서와 국가질서에 대해 더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우리 인간들은 이성적 사유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동물과 구별짓지만 이성적 사유는 동물들에게는 낯선 것인 거짓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논리는 우리에게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하며, 이성만으로 우리 인간이 도덕적으로 더 선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한계를 아는 것이 궁극의 진리를 장악하려는 망상보다 삶에 더 유익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대부분 감각적 지각에서 발생하며 이는 오류에 빠지기 쉬우므로 우리에게 확실한 통찰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신체적 감각도 이성적 사유도 우리에게 인식의 확실성을 줄 수는 없다. 감각과 이성은 종종 서로를 속이며, 우리는 진리에 대한 최종적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이성의 통찰들은 선입견들 때문에 빈번히 빗나가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최종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인식할 수 없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해석이 틀린 것이라고 한다면, 별들의 운행에 관한 새로운 이론들 역시도 틀린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법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인간 본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법도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에게 지식이란 최고의 선이 아니다. 지식은 정신과 감정을 평안에 이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따르는 단순한 삶만이 이러한 내적 평화에 이를 수 있다. 인간 오성의 허약함과 인간적인 의견의 변화가능성과 모순성을 고려하면 이론들을 종교와 교회에 순응시키는 것이 좋다. 철학적 이론의 억지 또한 삶을 방향짓는 데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다. 신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좁은 경계선 안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삶에 대한 기준들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회의주의적 방식은 본능의 직관적인 방식과 사회적 종교적 관습들을 따른다.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의 형식 속에서 보수적이다. 그는 개혁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자신의 <<수상록>>에서 몽테뉴는 시간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철학적 회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bekaeftig. 우리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나 목적이 아니며 하찮은 피조물로서 부당하게도 스스로를 동물보다 우월하게 여긴다. 우리의 감각지각과 이로부터 도출된 인식은 기만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가변적인 상황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오성의 인식들은 여러 가지로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우리는 오류와 진리를 판별해줄 최고의 심판자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이성의 힘으로는 결코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
이제 우리의 도덕적 근본가치들 또한 민족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 가치질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가치의 영역에 있어서 우리는 의견을 넘어설 수 없다. 예로부터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죽음 앞에서의 불안이다. 그 때문에 철학은 오랫동안 올바른 죽음에 대한 가르침과 기술을 주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죽음을 의식 바깥으로 몰아내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며, 우리는 죽음과 일종의 우정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집트인들은 빈번히 그들의 축제상에 죽음의 상징을 올려두었다고 한다. 철학적 통찰을 통해 삶의 자연스런 과정 속에서 평안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죽음 속에서 자연의 섭리를 보았기 때문에 태연히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이 점에서 몽테뉴는 스토아 철학의 입장을 분명히 이어받았다.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사람은 자연의 법칙에 적응하여 조화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모든 회의주의자가 그러하듯이 몽테뉴도 일체의 사회개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새로운 것이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일리 없다. 현명한 인간은 세계의 영원한 질서에 순응하며, 새로운 이론과 세계관들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가진다.
그런 까닭에 몽테뉴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이론을 거부했다. 그러한 이론은 학자들 간의 끝없는 싸움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의심을 없애주지만, 곧바로 이에 대한 불확실성이 세 가지나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이 궁극적인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는 한 그는 결코 쉼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는 모든 진리, 인식, 가치의 상대성과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으며 정신의 내적 평안을 얻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환경과 사회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 인간들은 사유에 있어서의 겸손함을 더 배우고, 신과 교회질서와 국가질서에 대해 더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우리 인간들은 이성적 사유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동물과 구별짓지만 이성적 사유는 동물들에게는 낯선 것인 거짓을 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논리는 우리에게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하며, 이성만으로 우리 인간이 도덕적으로 더 선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한계를 아는 것이 궁극의 진리를 장악하려는 망상보다 삶에 더 유익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대부분 감각적 지각에서 발생하며 이는 오류에 빠지기 쉬우므로 우리에게 확실한 통찰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신체적 감각도 이성적 사유도 우리에게 인식의 확실성을 줄 수는 없다. 감각과 이성은 종종 서로를 속이며, 우리는 진리에 대한 최종적 진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이성의 통찰들은 선입견들 때문에 빈번히 빗나가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계를 최종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인식할 수 없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해석이 틀린 것이라고 한다면, 별들의 운행에 관한 새로운 이론들 역시도 틀린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국가의 법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그것을 인간 본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법도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에게 지식이란 최고의 선이 아니다. 지식은 정신과 감정을 평안에 이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따르는 단순한 삶만이 이러한 내적 평화에 이를 수 있다. 인간 오성의 허약함과 인간적인 의견의 변화가능성과 모순성을 고려하면 이론들을 종교와 교회에 순응시키는 것이 좋다. 철학적 이론의 억지 또한 삶을 방향짓는 데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다. 신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좁은 경계선 안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삶에 대한 기준들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회의주의적 방식은 본능의 직관적인 방식과 사회적 종교적 관습들을 따른다.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의 형식 속에서 보수적이다. 그는 개혁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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