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블레즈 파스칼(1623-1662)
- 생활정보
- 2007. 7. 8. 17:02
고전적 이성주의의 이 사상가는 클레르몽에서 태어났고, 예수회 수도원에서 교육 받았으며, 여기서 쟝세니즘의 경건주의를 알게 되었다. 수학의 천재였던 그는 수학적 지식의 한계와 이성주의적 인식론의 한계를 알아차렸다. 그것들은 우리의 실존적 물음들, 즉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영혼의 평안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등에 대해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신의 계시와 은총에 자신을 위탁한다. 신의 계시와 은총은 이해불가능한 비밀이다. 이 비밀에서 인식된 현존재의 진리는 <<마음의 논리>>와 신적인 것에 대한 주관적이고 신비스런 체험에 근거하는 것이다.
수학자로서 파스칼은 확률계산과 미적분계산의 발전에 기여했다. 종교적 각성의 체험 후에 그는 <<프로방스 서한>>에서 신의 은총에 대한 쟝세니즘적 교리에 헌신했다고 한다. 그는 파리의 포르 루아얄 수도원에서 이 교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출간된 <<팡세>>에서 그는 신과의 신비적인 체험을 다루며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고 있다. 철학자들의 이성주의적 신은 아무런 인격적인 특성이 없어서 인간은 그에게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성서의 신만이 믿는 자들에게 확신과 삶의 기쁨,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준다.
그가 품 속에 지니고 다녔던 <<Memorial>>에서 그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신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깊은 기쁨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아갈 희망에 대해서 쓰고 있다. 철학적 인식은 종교의 교리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성은 우리 삶의 실존적 물음에 대해 어떤 것도 결정해 주지 못하며, 끝없는 혼란 속에 처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앙은 우리의 이성적 사유를 통해 뒷받침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이성적 인식을 넘어서 나아간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의 힘과 생활의 습관을 통해서 형성되지만, 그것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영혼의 감응이 필요하다.
자신의 논문<<기하학적 정신>>에서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적 인식의 이상에 대해 포괄적으로 비판한다. 인식에 대한 기하학적인 혹은 공리적인 방법은 논변과 증명의 순환으로 귀결된다. 하나의 공리체계에서 모든 개념은 다른 개념들로써 정의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끊임없는 정의의 사슬이 이어질 뿐이다. 모든 명제적 주장은 다른 명제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요청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증명의 무한한 연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이상은 기하학적 방법으로는 전혀 실현될 수 없다.
어떤 학문체계에서도 우리는 정의되지 않은 개념과 증명되지 않은 진술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물론 전혀 다의적인 의미가 없는 단순하고 자연스런 개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전혀 증명이 필요 없는 명증한 진술도 있다. 그러나 엄밀한 학적 체계에서는 모든 개념이 정의되어야 하고 모든 진술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체계는 전혀 불가능하다. 이성의 이러한 굴욕에 직면해서는 종교적 신앙의 교리 아래에 이성을 굴복시키는 것은 적절하고 그럴 만해 보인다. 그러므로 오성의 논리는 항상 마음의 논리에 종속되어야 한다. 종교가 비로소 우리의 힘으로는 찾을 수 없는 진리에 대한 헛된 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종교적 신앙은 이성적 논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학적 인식보다 훨씬 멀리 나아간다. 그것은 정직한 이성 위에 습관의 제의와 정신적 영감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는 구원의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감격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내기에 관한 유명한 논변에서는 종교적 신앙에 대한 긍정과 부정에 대해 논의된다. 이성은 이 물음에 대해 결정지어줄 수 없는데, 그것은 이성이 수많은 논증의 혼란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혼란의 가장 바깥쪽 가장자리에서 앞면 아니면 뒷면이 나오는 동전던지기 게임을 하고 있다. 신에 대한 물음에 있어서 우리는 다른 모든 게임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신의 실존은 모든 인간의 삶과 관계되어 있다. 이 내기를 할 때 우리는 이성과 의지를 사용한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최고의 선과 진리이다.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인간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얻게 된다. 이 내기는 안전채용설의 도덕적 원칙을 따른다.
인간 오성의 나약함 때문에 우리는 신의 계시에 의지한다. 그러나 우리의 곤궁함에는 어떤 숭고함이 있는데, 비록 제한된 것일지라도 우리의 사상에는 우리의 존엄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신의 무한함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하찮고 비루하며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을 인식할 때에야 우리는 마음의 겸손함을 배우고 신의 은총에 자신을 열어놓는다. 신의 능력에 자기를 내맡긴 자는 삶에 대한 신비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에 대한 사랑과 수학과 학문에 대한 사랑이 결합될 수 있다. 달리 말해, 논리와 신비는 서로를 보충한다.
이로써 파스칼은 후세의 근대적인 혹은 탈근대적인 사상가(비트겐슈타인)가 파악한 이념을 선취한 것이다. 학문의 관점은 종교적 사유를 파괴하지 않으며, 종교적인 인간이 위대한 학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은 영감과 열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수학자로서 파스칼은 확률계산과 미적분계산의 발전에 기여했다. 종교적 각성의 체험 후에 그는 <<프로방스 서한>>에서 신의 은총에 대한 쟝세니즘적 교리에 헌신했다고 한다. 그는 파리의 포르 루아얄 수도원에서 이 교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출간된 <<팡세>>에서 그는 신과의 신비적인 체험을 다루며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고 있다. 철학자들의 이성주의적 신은 아무런 인격적인 특성이 없어서 인간은 그에게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성서의 신만이 믿는 자들에게 확신과 삶의 기쁨,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준다.
그가 품 속에 지니고 다녔던 <<Memorial>>에서 그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신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깊은 기쁨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아갈 희망에 대해서 쓰고 있다. 철학적 인식은 종교의 교리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성은 우리 삶의 실존적 물음에 대해 어떤 것도 결정해 주지 못하며, 끝없는 혼란 속에 처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앙은 우리의 이성적 사유를 통해 뒷받침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이성적 인식을 넘어서 나아간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의 힘과 생활의 습관을 통해서 형성되지만, 그것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영혼의 감응이 필요하다.
자신의 논문<<기하학적 정신>>에서 파스칼은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적 인식의 이상에 대해 포괄적으로 비판한다. 인식에 대한 기하학적인 혹은 공리적인 방법은 논변과 증명의 순환으로 귀결된다. 하나의 공리체계에서 모든 개념은 다른 개념들로써 정의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끊임없는 정의의 사슬이 이어질 뿐이다. 모든 명제적 주장은 다른 명제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요청에 대해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여기서도 증명의 무한한 연쇄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이상은 기하학적 방법으로는 전혀 실현될 수 없다.
어떤 학문체계에서도 우리는 정의되지 않은 개념과 증명되지 않은 진술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다. 물론 전혀 다의적인 의미가 없는 단순하고 자연스런 개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전혀 증명이 필요 없는 명증한 진술도 있다. 그러나 엄밀한 학적 체계에서는 모든 개념이 정의되어야 하고 모든 진술이 증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체계는 전혀 불가능하다. 이성의 이러한 굴욕에 직면해서는 종교적 신앙의 교리 아래에 이성을 굴복시키는 것은 적절하고 그럴 만해 보인다. 그러므로 오성의 논리는 항상 마음의 논리에 종속되어야 한다. 종교가 비로소 우리의 힘으로는 찾을 수 없는 진리에 대한 헛된 추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종교적 신앙은 이성적 논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학적 인식보다 훨씬 멀리 나아간다. 그것은 정직한 이성 위에 습관의 제의와 정신적 영감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는 구원의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감격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내기에 관한 유명한 논변에서는 종교적 신앙에 대한 긍정과 부정에 대해 논의된다. 이성은 이 물음에 대해 결정지어줄 수 없는데, 그것은 이성이 수많은 논증의 혼란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혼란의 가장 바깥쪽 가장자리에서 앞면 아니면 뒷면이 나오는 동전던지기 게임을 하고 있다. 신에 대한 물음에 있어서 우리는 다른 모든 게임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신의 실존은 모든 인간의 삶과 관계되어 있다. 이 내기를 할 때 우리는 이성과 의지를 사용한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최고의 선과 진리이다.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인간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얻게 된다. 이 내기는 안전채용설의 도덕적 원칙을 따른다.
인간 오성의 나약함 때문에 우리는 신의 계시에 의지한다. 그러나 우리의 곤궁함에는 어떤 숭고함이 있는데, 비록 제한된 것일지라도 우리의 사상에는 우리의 존엄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신의 무한함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하찮고 비루하며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을 인식할 때에야 우리는 마음의 겸손함을 배우고 신의 은총에 자신을 열어놓는다. 신의 능력에 자기를 내맡긴 자는 삶에 대한 신비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에 대한 사랑과 수학과 학문에 대한 사랑이 결합될 수 있다. 달리 말해, 논리와 신비는 서로를 보충한다.
이로써 파스칼은 후세의 근대적인 혹은 탈근대적인 사상가(비트겐슈타인)가 파악한 이념을 선취한 것이다. 학문의 관점은 종교적 사유를 파괴하지 않으며, 종교적인 인간이 위대한 학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 신앙은 영감과 열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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