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1677)

스피노자는 포르투갈의 한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점증하는 유태인에 대한 적개심을 피해 종교적으로 훨씬 더 자유로운 네덜란드로 이사했다. 1654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는 사업을 물려받았는데, 그 이후에도 지식인들과의 교류는 계속 유지했다. 암스테르담 시나고그로부터 추방을 당한 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이로 인해 자신의 사업을 포기해야 했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안경알을 갈아서 돈을 벌었다.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졌었고(그는 "추방당한 자"였으므로), 이 때문에 그는 1661년에 이른바 Kollegiat(이들은 자유로운 기독교 신앙공동체였는데)들의 중심지였던 린스부르크로 옮겨갔다. 엄격한 칼뱅주의자들과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던 온건파 칼뱅주의자들의 지도자인 Ratspensionaer 얀 드 비트와 가까워졌다. 1672년 비트가 살해되었을 때 그에게는 거의 마지막의 정치적인 지지대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167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명예로운 초빙마저 거절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서 첫 번째로 나는 그의 주저<<에티카>>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여기서 그가 윤리적 고찰에 있어서 익숙하지 않은 방법을 선호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실제로 그는 윤리학의 문제를-3장에서 분명히 설명되고 있는 바-기하학의 물음들과 방법적으로 같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나는 본성과 능력과 충동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영혼의 힘에 대해 내가 앞선 부분에서 신과 영혼에 대해 다루었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다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선과 면, 물체들에 대한 연구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와 충동들을 고찰할 것이다."(<<에티카>>, 90)

이러한 방법은 고유한 것이며, 기껏해야 규범에 대한 인지주의적 정초를 소크라테스에게서 유사함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각은 누군가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무지해서 그러하다는 관점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가 수학에 있어서 실수를 하는 것과 같다는 그러한 관점에서 정점에 이른다.

스피노자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방향을 취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므로 그는 도덕적으로 모든 상황에서 최고의 통찰에 알맞게 행동하게 된다. 나아가 그가 힘과 생명력을 높여주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자기를 보존하려는 노력은 모든 사물의 가장 근원적이고 고유한 본질이다."), 그는 이기적이고 따라서 비도덕적인 의도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자면 인간이 전적으로 활동적이고 전혀 수동적이지 않은 태도를 취할 때에야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하고도 무제한적인 만족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이 자연의 흐름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사물들에 의해 좌우되고 거기에 종속된다면 그는 수동적(따라서 타율적)이게 된다. 여기서도 스토아적 이상이 변함없이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자신의 대략적인 선행의 목록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무정념과 인식에의 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도덕적으로 고양된 인간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프로그램의 정당성을 확신시키려 애쓸 뿐 아니라 평화, 정의, 정직함 등의 가치를 지지하고 분노와 미움에 대해 사랑과 관용으로 답하기 위해 노력한다. 스피노자는 아마도 이러한 원칙을 설파했을 뿐 아니라 몸소 실천한 철학자로서 가장 좋은 예일 것이다.

그의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무엇보다 그가 드 비트로부터 자유주의적으로 개념화된 정치학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만들어내려는 과제를 부여받은 이론가들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때 무엇보다도 홉스의 이론이 논쟁거리가 되었고, 이들은 그의 권위주의적이고 철저히 전제적인 원리들이 네덜란드의 민주주의적 이상과 맞지 않은 까닭에 홉스를 부분적으로 비난했다. 스피노자에게는 군주정보다는 민주주의가 원칙적인 우위에 있는 것이었다. 홉스와 구별되는 것은 스피노자가 사회계약의 흐름 속에서 개인으로부터 국가로 넘어가는 자유가 개인을 위한 자유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는 국가의 정당성이란 항상 다수결보다 상위에 있는 자연법에 근거하여 투명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군주제가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민주주의에 의해 정초되는 것인데, 그것은 "왕의 권력은 오직 민중의 권력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이며 그들이 보호해 주어야만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TP, Kap.7 S. 31) 스피노자는 아마도 여기서 기본법을 생각한 것일 텐데, 이 기본법은 민주주의에서 표현되며, 이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 누구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적어도 잠재적으로 공동체의 번영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냉철한 고찰이요 옹호이며, 철저히 이성적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국가를 "절대 제국"이라 이야기할 때조차 그는 무엇보다 그것의 자율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곳에서 신의 왕국이 인간들을 다스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의 공통된 결의, 즉 이성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결의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그리고 그의 윤리학의 관점에서) 그는 아주 일관된 계몽주의자다. "너희 스스로가 이성적으로 되어라, 그러면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로 이성적으로 행할 것이다." 이것이 그의 모토다. 이는 전형적인 계몽주의적 몽매함인데, 분명히 제 기준에만 맞추어(이성의 통찰을 통해 모든 것이 정리될 수 있다는 식의)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에 대한 그의 해석  또한 "자의적 규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전통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조건지워진(즉 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닌) 것인 한에서 그러하다. 사람들은 그러므로 단지 불안감 때문에 법을 지키는 단순한 인간에서 도덕으로 고양되는 것이 현명한 자의 표식이라는 통찰에서 법을 따라야 한다.

스피노자의 사유에 있어서 (민주주의) 국가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가족이나 민족이 아닌 국가가 유일무이한 정점으로 나타난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국가를 통해서만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들이 창출될 수 있다. 이 자유는 정치적 차원 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차원도 가지는 것이다. 즉 스피노자는 다수의 인류가 정념의 노예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는 한, 완전히 이성적인 인간의 공동체는 국가의 자리에 들어설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으로 자유의 길을 향한 수단으로서의 충동의 통제는 우리가 대개 수동적으로 받는 충동을, 능동적으로 갖는 충동으로 밀어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두 번째 종류의 충동들은 우리의 유용함에 대한 참된 인식에 근거한다. 경험적 층위를 넘어서는 정신적 고양을 통해서 그렇게 획득되는 자유에 도달하게 된다. 사물을 흡사 "sub specie aeternitatis"로 고찰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들의 가짜 독립성을 잃게 된다. 이러한 해방은 인간이 신과의 결합을 의심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

자신의 종교철학 때문에 스피노자는 암스테르담의 유태교 공동체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이로부터 쫓겨났다. 모든 지적인 기독교도들 또한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는 무엇보다 "Deus sive natura sive substantia"라는 그의 명제 때문이었다.

첫 번째 동일시(신은 곧 자연이다)는 범신론, 나아가 만유재신론을 상기시킨다. 모든 참된 신자들의 눈에 신성모독으로 비칠 것이 틀림없는 이러한 동일시는 자연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반해 신은 그 정반대를 나타낸다. 그가 "신"과 "실체"를 다름과 같이 동일시한다 해도, 그러한 실체화는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범주로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실체를 자신 안에 그리고 자신을 통해 파악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에티카>>, 45) "실체"는 다른 것의 도움 없이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이며, 따라서 무한하며, 그러므로 "신"과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무한한 실체가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중 단 두 가지(연장과 사유)만을 알 뿐이라고 말했는데, 신에 대한 그의 정의는 그것의 중세-기독교적 뿌리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비판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가 모든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의 원인으로서의 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해도, 신의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고 있다해도 신의 관념에 독립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이유로 제일 원인을 내재적인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이는 역시 범신론적인 것이며 따라서 비난받았다.

그의 (근대적인 느낌을 주는) 구약성서에 대한 비판이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유태교 사회에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성서텍스트를 순수하게 내재적으로 해석하려는 그의 고집은 예언자들의 받아들인 구원의 성격을 상실하게 했으며, 텍스트 집필 당시의 사회-경제적이고 종교-정치적인 조건들을 도외시한 해석은 상대주의의 위험을 예상케 했다. 나는 이미 그가 근대적인 느낌을 준다고 이야기한 바, 그는 이와 관련하여 “문서를 해독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설명을 할 때 사용하는 방법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TP 3, 98쪽) 그래서 그는 초이성적인 인식의 가능성에 대해 반대하며, 예언이란 전혀 통찰의 표현이 아니며, 다만 환상일 뿐이라 생각했고,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의 예외로서 기적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하여 그는 이 두 영역을 철저히 분리했다. 인간의 이성적 인식을 훨씬 넘어서며 정치적인 결정권까지 갖는 특권적인 통찰을 계시에 근거하여 좌지우지하려는 교회의 끊임없는 요구에 대해 스피노자는 철저히 거부했다. 그 때문에 그는 엄격한 칼뱅주의자와 신정정치를 은밀히 조장하던 독실한 유태교인들의 적개심을 샀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여기서도 다시 신학적 견지에서 기준이 되는 이성적 통찰을 한다고 여겼으며, 민중을 계몽시키는 대신 터무니 없는 생각으로 그들을 더 손쉽게 다스리기 위해 그들을 몽매한 상태로 내버려 두려는 신학자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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