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프랑수와 볼테르(1694-1778)
- 생활정보
- 2007. 7. 19. 15:59
본명은 프랑수와-마리 아루에. 볼테르는 파리에서 태어나 예수회 신학교 루이 르 그랑에서 교육받았다. 1717년에 정치적 풍자시 때문에 11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1718년에 필명으로 "볼테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이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가 검열기관과의 광범위한 투쟁을 치른 후 그는 프랑스를 떠난다는 조건 하에 자유를 얻게 된다. 영국으로 간 그는 영국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열광했고, 이는 1729년 <<영국에 대한 편지>>라는 저작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비록 파리 의회로부터 금지처분을 받았으나, 이 책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볼테르는 파리를 떠나 샹파뉴의 뒤 샤틀레 부인의 집에 머물렀고, 여기서 15년을 지냈다. 1750년에서 1753년까지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초청으로 포츠담에 머물렀고, 여기서 주요한 역사적 저작들에 몰두했다. 그는 새로운 학적 해석의 방법을 통해 이 저작들을 주목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3년 후 프로이센 국왕과의 불화 때문에 다시 떠난다. 제네바에 자리를 잡고, 거기에 자기가 "Les Delices"라 부른 집을 짓고 살았다. 1758년에는 페르니(프랑스 국경 근처에 있는)로 이사했는데, 제네바 관청과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스본에 끔찍한 지진이 일어났던 1755년은 모든 점에서 그의 삶과 작품 활동에 단절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는 어느 시에서 모든 종교적 낙관주의(특히 라이프니츠)에 맹렬히 반대했는데, 이러한 낙관주의는 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에 가장 좋은 세계라 여긴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는 신랄하게 교회를 비판했다.
볼테르가 신학에 대해 지독하게 비판했더라도, 그는 오히려 전적으로 실천적인 제도개혁을 프랑스 계몽주의의 공격적인 변형태와 동의어로 간주될 수 있으며, 중간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 확실히 언급되어야 한다. (?) 그래서 이를테면 그는 도덕적인 것에 있어서 종교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미신과 종교적 불관용, 그리고 광신에 대항해 투쟁하는 데 지치지 않았다. 동시대의 급진적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그는 신의 개념을 확고히 지켰고, (엄격히 실천적인 방식으로) 무신론은 단순한 인간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신의 실존을 이론적으로 확신했다고 한다면, 그 확신은 이론보다 삶의 실천에 있어서 더 컸다. 선을 칭찬하고 악을 벌하는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인간성을 위해서 최고로 유익한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우 실천적으로 정향된 논변을 했음에도 볼테르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무신론을 독단적이고 종종 광신에 물든 기독교보다는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여겼다. "무신론은 피맺힌 고통을 느끼게 하지 않지만 광신은 그렇게 하며, 무신론이 범죄를 막지 못하는 반면 광신은 범죄를 저지르게 하기 때문이다."
많은 볼테르 해석가들이 그의 종교에 대한 양가적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워 했지만, 그것은-정확히 보면-전혀 양가성이 아니다. 그것은 (이신론적 의미에서) 신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며, 자연적인 종교를 위한 것이며,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고귀하게 여겨질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는 한 허구적 대화에서 목사의 입을 통해 설명한다. "나는 항상 도덕에 관해 이야기하지 결코 신앙논쟁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종교적 광신, 교회의 부도덕, 카톨릭의 은총론, 기적과 계시에 대한 신앙을 맹렬히 반대했다. 그의 종교적 근본태도는 또한 그가 두 가지 신 존재증명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 하나는 우주론적인 증명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신학적인 증명이다. 그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며, 이때 그 무엇은 영원으로부터 생성된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인 무로부터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지성으로 만들어졌으며, 따라서 또한 지성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우리에게 목적과 수단을 알려주는 모든 작품은 그 뒤에 한 장인이 숨어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세계의 악에 대한 고통스런 물음과 이 악을 변호하는 데 있어서 볼테르는 이상해 보이는 관점(에피쿠로스를 상기시키는)에 도달하는데, 신은 최고의 권력을 체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권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도 자신이 그 안에서 현존하고 있는 조건들 아래에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이론은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라이프니츠적인 세계관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이 세상의 수많은 악들에 대한 신의 책임을 면해주기 위해서 유일한 길은 그의 힘이 그리 크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악한 신보다는 유한한 신에게 기도하고 싶다. 악의 원천은 나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곧 모든 것을 만든 선한 오르츠무트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라고 그는 썼다.
심오한 철학적 고찰을 싫어하고 오히려 평범한 삶을 고려하면서 그는 "법을 정하는 독재자"로 파악될 수 있는 신의 개념에 도달한다. "어떤 사회도 정의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신을 전도하자. 국가의 법이 알려진 범죄자를 처벌한다면,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범죄자도 벌할 신을 전도하자."
이렇게 정식화된 진술에 근거해 우리는 정당하게도 왜 볼테르가 항상 계몽주의자par excellence로 이야기되는지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전야에 살았던, 혁명을 강력한 방식으로 이론적으로 준비했던, 말하자면 혁명의 흐름에 안내자 역할을 했던 한 남자로서의 볼테르.
또한 당시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사회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그는 아주 겸손했으며 혁명의 세 표어를 과격하게 요구했던 류의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는 그의 원리는 다만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며 말하자면 인류학적 상수일 뿐이지, 결코 구체적인 정치적 생활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에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두 계급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이라고 무조건 동정받을 수는 없다. 그들의 길고 고된 노동의 의무로 보자면 그들은 어쨌든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반성에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아이들이 읽고 쓰고 셈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중들, 특히 수공업자의 아이들은 밭가는 일만을 해야 한다. 2백년 내지 3백년 동안 가난한 자들에게는 깃털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욕구와 능력을 갖고 있을 때에만 인간들이 실제로 평등할 것이라는 점이 그에게는 분명했고, 이런 가정은 물론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법학의 분야에 있어서도 유사한 표현이 보인다. 물론 여기서 그는 당파적으로 정향되어 있고 지배적인 종교에 맞추어져 있는 판결가능성에 대한 격렬한 적대자였다. 칼라스의 재판이 그에게 정의를 향한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이 가문(가장인 칼라스는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고발되어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가족들은 두려운 압박감 속에 처했다.)의 궁극적인 명예회복은 그의 덕분이었던 것이다. <<관용론>>(1763)에서 그는 법의 왜곡을 종교적 광신에로 소급시킨다. 볼테르는 관용의 이념을 통시적인 관점으로 다루고, 초기 기독교는 종교적 광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법이론적 숙고들은 이론적으로 빈약했고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자연법 이해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 하나는 그가 이성에 걸맞는 법의 규정에 대한 로크의 통찰을 차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게 자연법은 그리스와 로마의 오랜 "ius gentium"과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의 존속을 위해서 법은 필수적인 것이고, 따라서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될 수 없고 특정한 시간과 사회의 조건들에는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있어 법과 규범의 유일하고 객관적인 기준은 인류의 보편적인 행복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로부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혹은 사회적인 변화들은 법과 불법에 대한 생각들도 변화시킨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는 우리가 곧장 법실증주의라 불러야 할 관점이다. 그가 한 사회의 법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감정들에 근거해야 한다고 설명할 때, 우리는 그의 사유 속에서 어떤 피상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피해갈 수 없다. 그래서 볼테르의 나머지 판단들은 철학적 저술가요, 수많은 희곡과 2만여 통의 편지를 쓴 풍자작가로서의 볼테르의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철학적 깊이는 데카르트와 스피토자 혹은 로크에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겠다.
그러나 한 가지 영역에서 그는 독특한 사상가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역사에 대한 것이다. 그가 역사철학을 탄생시킨 최초의 인물이라는 주장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뒤 샤틀레 부인은 이른바 위대한 인물들의 성인 전기식 서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통해 그로 하여금 학문 분야에서 곁가지로 경시되던 이 분야에 새로운 기초를 놓게끔 추동했던 것이다. 볼테르는 방법적으로 모든 진술을 그것의 신빙성에 기초해 연구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다. 이때 그는 광신적 열정과 기적에 대한 신앙 혹은 강력한 종교적 속박과 관련된 모든 역사를 신뢰할 만한 사료들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그는 수백년을 거쳐 계승되어온 수많은 역사서술 상의 오류들을 바로 잡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역사 서술에서 궁극적으로 한 특정한 시대를 특징짓는 모든 환경을 서술하기 위해 '위대한' 인물들과 관련된 잉여적인 성인전기 쓰기를 포기하려 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적 통찰의 중요성은, 문화와 문명의 길항적인 흐름이 한편으로는 그들의 계몽적인 지향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와 광신주의에 있어서 다양한 사회지배권을 두고 우위를 다투는 양상을 서술하는 데 있었다. 여기서 그는 당시의 시대에 대해 철저히 염세적인 태도를 취했다.
볼테르가 신학에 대해 지독하게 비판했더라도, 그는 오히려 전적으로 실천적인 제도개혁을 프랑스 계몽주의의 공격적인 변형태와 동의어로 간주될 수 있으며, 중간 입장을 취했다는 점이 확실히 언급되어야 한다. (?) 그래서 이를테면 그는 도덕적인 것에 있어서 종교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미신과 종교적 불관용, 그리고 광신에 대항해 투쟁하는 데 지치지 않았다. 동시대의 급진적 사상가들과는 다르게 그는 신의 개념을 확고히 지켰고, (엄격히 실천적인 방식으로) 무신론은 단순한 인간에게 전혀 이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많은 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신의 실존을 이론적으로 확신했다고 한다면, 그 확신은 이론보다 삶의 실천에 있어서 더 컸다. 선을 칭찬하고 악을 벌하는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인간성을 위해서 최고로 유익한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우 실천적으로 정향된 논변을 했음에도 볼테르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무신론을 독단적이고 종종 광신에 물든 기독교보다는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여겼다. "무신론은 피맺힌 고통을 느끼게 하지 않지만 광신은 그렇게 하며, 무신론이 범죄를 막지 못하는 반면 광신은 범죄를 저지르게 하기 때문이다."
많은 볼테르 해석가들이 그의 종교에 대한 양가적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워 했지만, 그것은-정확히 보면-전혀 양가성이 아니다. 그것은 (이신론적 의미에서) 신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며, 자연적인 종교를 위한 것이며,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고귀하게 여겨질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는 한 허구적 대화에서 목사의 입을 통해 설명한다. "나는 항상 도덕에 관해 이야기하지 결코 신앙논쟁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종교적 광신, 교회의 부도덕, 카톨릭의 은총론, 기적과 계시에 대한 신앙을 맹렬히 반대했다. 그의 종교적 근본태도는 또한 그가 두 가지 신 존재증명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 하나는 우주론적인 증명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신학적인 증명이다. 그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며, 이때 그 무엇은 영원으로부터 생성된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인 무로부터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지성으로 만들어졌으며, 따라서 또한 지성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우리에게 목적과 수단을 알려주는 모든 작품은 그 뒤에 한 장인이 숨어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 세계의 악에 대한 고통스런 물음과 이 악을 변호하는 데 있어서 볼테르는 이상해 보이는 관점(에피쿠로스를 상기시키는)에 도달하는데, 신은 최고의 권력을 체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권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도 자신이 그 안에서 현존하고 있는 조건들 아래에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이론은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라이프니츠적인 세계관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보기에 이 세상의 수많은 악들에 대한 신의 책임을 면해주기 위해서 유일한 길은 그의 힘이 그리 크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악한 신보다는 유한한 신에게 기도하고 싶다. 악의 원천은 나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곧 모든 것을 만든 선한 오르츠무트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라고 그는 썼다.
심오한 철학적 고찰을 싫어하고 오히려 평범한 삶을 고려하면서 그는 "법을 정하는 독재자"로 파악될 수 있는 신의 개념에 도달한다. "어떤 사회도 정의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신을 전도하자. 국가의 법이 알려진 범죄자를 처벌한다면,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범죄자도 벌할 신을 전도하자."
이렇게 정식화된 진술에 근거해 우리는 정당하게도 왜 볼테르가 항상 계몽주의자par excellence로 이야기되는지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전야에 살았던, 혁명을 강력한 방식으로 이론적으로 준비했던, 말하자면 혁명의 흐름에 안내자 역할을 했던 한 남자로서의 볼테르.
또한 당시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사회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그는 아주 겸손했으며 혁명의 세 표어를 과격하게 요구했던 류의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는 그의 원리는 다만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며 말하자면 인류학적 상수일 뿐이지, 결코 구체적인 정치적 생활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에는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두 계급이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다. 또한 가난한 자들이라고 무조건 동정받을 수는 없다. 그들의 길고 고된 노동의 의무로 보자면 그들은 어쨌든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반성에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아이들이 읽고 쓰고 셈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중들, 특히 수공업자의 아이들은 밭가는 일만을 해야 한다. 2백년 내지 3백년 동안 가난한 자들에게는 깃털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욕구와 능력을 갖고 있을 때에만 인간들이 실제로 평등할 것이라는 점이 그에게는 분명했고, 이런 가정은 물론 허무맹랑한 것이었다.
법학의 분야에 있어서도 유사한 표현이 보인다. 물론 여기서 그는 당파적으로 정향되어 있고 지배적인 종교에 맞추어져 있는 판결가능성에 대한 격렬한 적대자였다. 칼라스의 재판이 그에게 정의를 향한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이 가문(가장인 칼라스는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고발되어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가족들은 두려운 압박감 속에 처했다.)의 궁극적인 명예회복은 그의 덕분이었던 것이다. <<관용론>>(1763)에서 그는 법의 왜곡을 종교적 광신에로 소급시킨다. 볼테르는 관용의 이념을 통시적인 관점으로 다루고, 초기 기독교는 종교적 광신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법이론적 숙고들은 이론적으로 빈약했고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자연법 이해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 하나는 그가 이성에 걸맞는 법의 규정에 대한 로크의 통찰을 차용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게 자연법은 그리스와 로마의 오랜 "ius gentium"과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의 존속을 위해서 법은 필수적인 것이고, 따라서 절대적인 것으로 파악될 수 없고 특정한 시간과 사회의 조건들에는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있어 법과 규범의 유일하고 객관적인 기준은 인류의 보편적인 행복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로부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혹은 사회적인 변화들은 법과 불법에 대한 생각들도 변화시킨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는 우리가 곧장 법실증주의라 불러야 할 관점이다. 그가 한 사회의 법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감정들에 근거해야 한다고 설명할 때, 우리는 그의 사유 속에서 어떤 피상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피해갈 수 없다. 그래서 볼테르의 나머지 판단들은 철학적 저술가요, 수많은 희곡과 2만여 통의 편지를 쓴 풍자작가로서의 볼테르의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철학적 깊이는 데카르트와 스피토자 혹은 로크에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하겠다.
그러나 한 가지 영역에서 그는 독특한 사상가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역사에 대한 것이다. 그가 역사철학을 탄생시킨 최초의 인물이라는 주장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뒤 샤틀레 부인은 이른바 위대한 인물들의 성인 전기식 서술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통해 그로 하여금 학문 분야에서 곁가지로 경시되던 이 분야에 새로운 기초를 놓게끔 추동했던 것이다. 볼테르는 방법적으로 모든 진술을 그것의 신빙성에 기초해 연구했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다. 이때 그는 광신적 열정과 기적에 대한 신앙 혹은 강력한 종교적 속박과 관련된 모든 역사를 신뢰할 만한 사료들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그는 수백년을 거쳐 계승되어온 수많은 역사서술 상의 오류들을 바로 잡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역사 서술에서 궁극적으로 한 특정한 시대를 특징짓는 모든 환경을 서술하기 위해 '위대한' 인물들과 관련된 잉여적인 성인전기 쓰기를 포기하려 했다.
그가 보기에 역사적 통찰의 중요성은, 문화와 문명의 길항적인 흐름이 한편으로는 그들의 계몽적인 지향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와 광신주의에 있어서 다양한 사회지배권을 두고 우위를 다투는 양상을 서술하는 데 있었다. 여기서 그는 당시의 시대에 대해 철저히 염세적인 태도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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