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아담 스미스(1723-1790)
- 생활정보
- 2007. 7. 22. 16:49
아담 스미스는 계몽주의 시대의 독창적인 윤리학자이며 경제학자이다. 1723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글래스고우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쳤고, 근대 국민경제학의 창시자라 일컬어진다. 1790년 에딘버러에서 죽었다. 그는 데이비드 흄의 생각들 중에서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으며, 인간들 간의 공감에 대한 고찰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이를 발전시켰다. "공감"은 동료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나누는 능력이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통해 도덕적 가치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우선 동료인간들을 그들의 행위 가운데서 이해하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그것을 평가하며, 마지막으로 우리의 도덕적 감정의 기초 위에서 도덕 법칙을 정식화한다. (<<도덕적 감정의 기초>>,1759) 최초의 인류에게는 홉스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인간들은 서로에 대해 짐승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으며, 서로 죽이지도 않았다. 짐승들도 무리를 이루어 함께 살았으며, 서로를 지켜주었다.
따라서 인간들이 생존하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일은 당치 않다. 오히려 그들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모든 사람은 서로 간에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낯설은 슬픔에도 익숙하지 않은 즐거움에도 공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인 관찰자가 우리와 공감할 수 있도록 행위해야 한다. 우리의 공동체는 공감의 자연적 소질에 기반해 세워진다. 이기주의만으로는 국가가 성립할 수 없다. 우리는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육체적 감정을 스스로 체험해 보아야 하며, 그럴 때에 우리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을 직접 겪어 보면 다른 이들의 고통에 동정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또한 동료인간의 기쁨에 공감할 수 있기 위해서 기쁨도 느껴보아야 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마음보다 공감하기가 힘들다. 자연은 우리를 보편적인 인류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해 준다. 이것이 자연과 종교의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동료인간의 감정을 자기 마음에 비춰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능과 충동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없게 된다. 덕은 감정의 절제를 추구하며, 과잉이나 억압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우리 행위의 의도를 판단하며, 그것이 우리 자신과 사회에 유용한 것인지를 묻는다. 선한 의도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게 되고, 악한 의도에 대해서는 경멸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와 동료인간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감정을 통해서이지, 오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우리의 양심은 객관적인 관찰자에게 익숙하거나 낯선 행위로 나타난다. 도덕적 감정을 가지고 행위를 판단할 경우, 우리는 현재의 체험을 과대평가 해서도, 이기적인 추구를 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 자신과 동료인간의 행위를 점검하고 평가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러한 평가들에서 우리의 태도, 이른바 도덕규범을 위한 보편적 법칙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행위를 위한 보편적 법칙, 금언, 원칙을 형성한다. 그리고 보편적 도덕법칙에 대한 외경심과 의무의 감정을 체험한다. 보편적 도덕법칙은 우리 행위의 최고 심판자이며, 우리는 또한 그것을 신의 계명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인간은 의무와 욕구가 일치하며, 우리도 우리의 욕구를 의무에 맞출 수 있다. 엄격한 의무는 그것이 동료인간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일 때에만 존재한다. 이 경우에는 도덕적인 태도를 배우기 위해 처벌도 필요하게 된다.
모든 인간은 본래적으로 행복을 느끼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싶어하며, 그들이 우리와 공감해 주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의도와 감정을 교류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과 못 생긴 사람들은 부자와 잘 생긴 사람들에 대해 거의 공감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이들과 공감하는 데 인색하다면 우리의 영혼이 가난해진다. 우리 안에는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픈 깊은 욕망이 있다. 행복은 감정을 교류하는 데서 느껴진다.
우리의 경제행위 전체는 도덕법칙에 근거를 둔다. 개인의 노동이 민족의 부의 원천이다. 노동력과 재화의 교환가치는 측정될 수 있다. 그러나 학자와 예술가의 작업은 측정하기가 어렵다. 노동 분업은 효율을 높여주며, 생산된 재화는 시장에서 돈으로 교환된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지를 갖는다.
경제의 중심은 교환가치이다. 교환가치의 형성법칙이 경제법칙이다. 그러나 경제가 기능하기 이한 토대는 무엇보다 개인의 완전한 자유다. 새로운 경제체제는 새로운 사유, 자유로운 이윤창출, 그리고 경쟁에 기초한다. 그렇지만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한계를 갖는다. 개인의 최대이익은 길게 보면 국가를 위한 최고의 이익이다. 따라서 경제에 있어서 어떤 제약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자유시장경제는 최고의 효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생각과 행동의 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보장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농노들은 신체적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주인이 그들의 행위를 조종해서는 안 된다. 자유시장은 재화의 가격을 형성하며, 가격은 전체 경제를 조절한다. 그렇지만 자유경제는 자유로운 국가에서만 실현가능하다.
자유국가는 외국의 침략과 국가 내의 불의로부터 시민을 보호한다. 국가는 (도로건설, 운하건설 따위의) 공동체의 관심사를 위한 업무를 맡는다. 개인의 행복은 국가의 번영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공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개인의 행복과 안정은 경제가 번영하기 위한 최고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므로 절대주의 국가는 반드시 자유주의 국가에 의해 해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약자들이 강자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통해 도덕적 가치들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우선 동료인간들을 그들의 행위 가운데서 이해하고자 한다. 다음으로는 그것을 평가하며, 마지막으로 우리의 도덕적 감정의 기초 위에서 도덕 법칙을 정식화한다. (<<도덕적 감정의 기초>>,1759) 최초의 인류에게는 홉스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따위는 있지도 않았다. 인간들은 서로에 대해 짐승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으며, 서로 죽이지도 않았다. 짐승들도 무리를 이루어 함께 살았으며, 서로를 지켜주었다.
따라서 인간들이 생존하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일은 당치 않다. 오히려 그들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모든 사람은 서로 간에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우리는 낯설은 슬픔에도 익숙하지 않은 즐거움에도 공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인 관찰자가 우리와 공감할 수 있도록 행위해야 한다. 우리의 공동체는 공감의 자연적 소질에 기반해 세워진다. 이기주의만으로는 국가가 성립할 수 없다. 우리는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육체적 감정을 스스로 체험해 보아야 하며, 그럴 때에 우리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고통을 직접 겪어 보면 다른 이들의 고통에 동정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또한 동료인간의 기쁨에 공감할 수 있기 위해서 기쁨도 느껴보아야 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마음보다 공감하기가 힘들다. 자연은 우리를 보편적인 인류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해 준다. 이것이 자연과 종교의 가장 중요한 계명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동료인간의 감정을 자기 마음에 비춰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능과 충동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없게 된다. 덕은 감정의 절제를 추구하며, 과잉이나 억압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우리 행위의 의도를 판단하며, 그것이 우리 자신과 사회에 유용한 것인지를 묻는다. 선한 의도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게 되고, 악한 의도에 대해서는 경멸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와 동료인간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은 감정을 통해서이지, 오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우리의 양심은 객관적인 관찰자에게 익숙하거나 낯선 행위로 나타난다. 도덕적 감정을 가지고 행위를 판단할 경우, 우리는 현재의 체험을 과대평가 해서도, 이기적인 추구를 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 자신과 동료인간의 행위를 점검하고 평가하기에 힘써야 한다. 이러한 평가들에서 우리의 태도, 이른바 도덕규범을 위한 보편적 법칙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행위를 위한 보편적 법칙, 금언, 원칙을 형성한다. 그리고 보편적 도덕법칙에 대한 외경심과 의무의 감정을 체험한다. 보편적 도덕법칙은 우리 행위의 최고 심판자이며, 우리는 또한 그것을 신의 계명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인간은 의무와 욕구가 일치하며, 우리도 우리의 욕구를 의무에 맞출 수 있다. 엄격한 의무는 그것이 동료인간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일 때에만 존재한다. 이 경우에는 도덕적인 태도를 배우기 위해 처벌도 필요하게 된다.
모든 인간은 본래적으로 행복을 느끼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싶어하며, 그들이 우리와 공감해 주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의도와 감정을 교류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자들과 못 생긴 사람들은 부자와 잘 생긴 사람들에 대해 거의 공감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이들과 공감하는 데 인색하다면 우리의 영혼이 가난해진다. 우리 안에는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픈 깊은 욕망이 있다. 행복은 감정을 교류하는 데서 느껴진다.
우리의 경제행위 전체는 도덕법칙에 근거를 둔다. 개인의 노동이 민족의 부의 원천이다. 노동력과 재화의 교환가치는 측정될 수 있다. 그러나 학자와 예술가의 작업은 측정하기가 어렵다. 노동 분업은 효율을 높여주며, 생산된 재화는 시장에서 돈으로 교환된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지를 갖는다.
경제의 중심은 교환가치이다. 교환가치의 형성법칙이 경제법칙이다. 그러나 경제가 기능하기 이한 토대는 무엇보다 개인의 완전한 자유다. 새로운 경제체제는 새로운 사유, 자유로운 이윤창출, 그리고 경쟁에 기초한다. 그렇지만 나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한계를 갖는다. 개인의 최대이익은 길게 보면 국가를 위한 최고의 이익이다. 따라서 경제에 있어서 어떤 제약도 있어서는 안 된다.
자유시장경제는 최고의 효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생각과 행동의 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보장될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농노들은 신체적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주인이 그들의 행위를 조종해서는 안 된다. 자유시장은 재화의 가격을 형성하며, 가격은 전체 경제를 조절한다. 그렇지만 자유경제는 자유로운 국가에서만 실현가능하다.
자유국가는 외국의 침략과 국가 내의 불의로부터 시민을 보호한다. 국가는 (도로건설, 운하건설 따위의) 공동체의 관심사를 위한 업무를 맡는다. 개인의 행복은 국가의 번영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공표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개인의 행복과 안정은 경제가 번영하기 위한 최고의 전제조건이다. 그러므로 절대주의 국가는 반드시 자유주의 국가에 의해 해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약자들이 강자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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