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존 스튜어트 밀(1806-1873)
- 생활정보
- 2007. 7. 30. 02:16
철학자이자 사회개혁가, 그리고 국민경제학자로서 존 스튜어트 밀은 19세기 유럽의 선도적 지성인이었고, 당대의 다른 영국의 사상가들 가운데 빅토리아 시대의 최고의 면모를 구현한 인물이었다. 밀의 전형적으로 영국적인 행동방식은 사유과정을 객관적으로 사태에 걸맞게 이끌어가는 능력과 그의 특출한 공정성에 대한 감각에 걸맞다. 또 그에게는 청교도적 엄격성이 낯설지 않았는데, 특히 그에게는 보편적 인류애를 위한 이성적 도덕을 위해 스스로를 훈련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고집스럽게 일하며 신체적으로는 섬세하고 병약했던 밀은 특히 이론과 실천을 내적으로 엮어내는 데에 탁월했다. 그에게 행위는 사유의 중요성을 시험해 보는 검증절차였다. 즉 이론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가능한 사회적 소급효과에 대한 숙고는 충분히 추상적인 인식론적 물음에로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어떤 저작에서도 사회개혁이라는 실천적 목표에 연결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동인도 무역회사의 책임자로서, 탁월한 출판가로서, 그리고 영국 하원의 대표로서 밀은 자신의 사회철학적, 경제학적, 교육정치적 생각들을 관철시켜가려 했다. 자신의 정신적 동료이자 토론가이며, 후에는 부인이 된 해리엇 테일러에게 영감을 받아 여성들의 법적, 교육적, 사회적 평등을 위해서 표현의 자유를 위한 권리나 노동자들의 단결권 등을 위해서만큼 열정적으로 힘썼다. 정치가 밀은 사회적인 틀의 조건인 안전에 대한 사회적 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을 모든 자기규정의 전제조건으로서 옹호하는 편에 섰다.
오귀스트 콩트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또 프란시스 베이컨, 존 로크, 데이비드 흄으로 이어지는 경험주의적 전통에서 교육을 받은 밀은 실증주의의 영국적 계보를 정초했다. 실증주의는 감각경험만을 인식의 원천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전적으로 관찰에 의존하는 명제들만이 허용된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모든 종류의 형이상학적 사유에 분명한 반대입장을 취한다. 철학은 학적으로 인정된 사실과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라 정향되어야 한다고 밀은 주장한다. 실재 혹은 도덕적 당위요청으로 곧바로 통하는 문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관찰, 실험, 그리고 경험의 길을 통해서만 학적인 진술과 윤리적인 규칙들을 획득할 수 있고 정초할 수 있다.
두 권으로 된 밀의 이론적 주저인 <<논리의 체계>>는 논리적 원리를 궁극적으로 심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논리적 원칙들(모순율에서와 마찬가지로)의 경우에 있어서도 개념들의 결합은 습관에 의거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추론은 경험에 의존하는 모든 인식과 마찬가지로 가설적이다. 수학적 진리들조차도 관찰명제에 의한 일반화에 근거하는 것이며, 다수의 경험적 증거들로 인해 필연적인 것인 양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밀은 "논리"를 고대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지식이론으로 이해한다. 이는 경쟁하는 이론들의 인식론적 요청들을 검증하는 과제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 정치, 그리고 종교에서의 다양한 입장들과 같은 전문철학적 작업과 관계된다. 학문적 행동양식과 관련하여 밀은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개별 결과들에서 법칙적 인과관계로 추론해가는 방법에 우위를 두었다. 그 결과가 전혀 잠재적인 것이라 해도, 이러한 설명방식은 우리의 지식을 확장해 준다.
밀의 사회-정치철학적 주저인 <<자유에 관하여>>(1859)는 국가의 법이나 규준에 대하여 개별 시민의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는 고전적인 저서로 읽힐 수 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이 생각에 따라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개인의 권리는 국가의 번영보다 우위에 있다. 개인의 자유를 위한 밀의 변론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른 것이었다. "문명화된 사회의 구성원의 의지에 반하여 적법하게 강제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목적은 다른 이들이 해악을 입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국가의 의무도 도출된다. 미성년자들이 자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주는 것. 이를테면 적절한 교육을 받을 가능성을 보장해주고, 가난한 자들의 교육비 부담을 줄여주는 것. 여기서 밀의 자유론의 두 번째 관심사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강력하고 자기의식적이며 내적으로 자유로운 인격의 필연성이다. 외적인 정치적 자유가 가장 확실하게 보장되어야만 공공의 의견이나 사회적 합의를 위한 강요의 압력으로부터 개인이 활동할 여지가 남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밀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사회에 의해 '행복해야 한다'는 따위의 규정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유한 삶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용기를 길러야 하는 것이다.
밀은 아버지인 제레미 벤담 밀에 대한 우정을 가진 "급진파"들로 구성된 지적 환경에서 자랐다. 이들은 벤담의 이념에 기초해 정치적 운동을 해나가던 지지자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벤담의 공리주의적 원리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다양한 사회 영역들에서-특히 입법과 교육에 있어서- 구체화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다른 윤리 이론과 마찬가지로 공리주의도 목표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의 원리들에 대한 통합적 진술을 다룬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이 상정한다. 첫째,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은 (그 행동을 하게 만든 의도에서가 아니라)그것의 개연적 결과들에 따라 책정된다. 둘째, 행위의 결론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그 행위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그 행위가 가지는 의미 안에 성립한다. 공리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이웃사랑을 이야기하는 기독교적 윤리이다. 구체적 상황에 밀착해 있다는 점이 공리주의의 매력이다. 공리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경험의 토대 위에서 행위의 결과들에 대해 논변한다.
1861년부터 세 개의 에세이로 쓰여졌고, 1863년에 책으로 출간된 <<공리주의>>라는 논문으로써 밀은 공리주의에 대한 윤리적 토론을 오늘날까지도 지지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두 가지 결정적인 점에서 밀은 벤담의 단초를 넘어선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이 외적 쾌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없게 만드는 벤담의 편협한 쾌-불쾌의 심리학에 대해 개방적이고 발전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확실히 더 풍부한 이미지를 대비시킨다. 그래서 밀은 극대화되어야 할 "행복"을 우선적으로 양적으로가 아니라, 쾌의 감각에 대한 질의 측면에서 규정한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보다는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는 것이 더 인간에게 맞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행복을 위해 애쓰지만, 그것을 너무도 쉽게 놓쳐버리고 만다. 다른 한편 밀은 그를 급히 자신의 윤리적 사유의 한계로 이끌어간 유용성에 대한 숙고로부터 정의의 원칙들을 찾았다.
동인도 무역회사의 책임자로서, 탁월한 출판가로서, 그리고 영국 하원의 대표로서 밀은 자신의 사회철학적, 경제학적, 교육정치적 생각들을 관철시켜가려 했다. 자신의 정신적 동료이자 토론가이며, 후에는 부인이 된 해리엇 테일러에게 영감을 받아 여성들의 법적, 교육적, 사회적 평등을 위해서 표현의 자유를 위한 권리나 노동자들의 단결권 등을 위해서만큼 열정적으로 힘썼다. 정치가 밀은 사회적인 틀의 조건인 안전에 대한 사회적 자유주의적 프로그램을 모든 자기규정의 전제조건으로서 옹호하는 편에 섰다.
오귀스트 콩트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또 프란시스 베이컨, 존 로크, 데이비드 흄으로 이어지는 경험주의적 전통에서 교육을 받은 밀은 실증주의의 영국적 계보를 정초했다. 실증주의는 감각경험만을 인식의 원천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전적으로 관찰에 의존하는 명제들만이 허용된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모든 종류의 형이상학적 사유에 분명한 반대입장을 취한다. 철학은 학적으로 인정된 사실과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라 정향되어야 한다고 밀은 주장한다. 실재 혹은 도덕적 당위요청으로 곧바로 통하는 문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관찰, 실험, 그리고 경험의 길을 통해서만 학적인 진술과 윤리적인 규칙들을 획득할 수 있고 정초할 수 있다.
두 권으로 된 밀의 이론적 주저인 <<논리의 체계>>는 논리적 원리를 궁극적으로 심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논리적 원칙들(모순율에서와 마찬가지로)의 경우에 있어서도 개념들의 결합은 습관에 의거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추론은 경험에 의존하는 모든 인식과 마찬가지로 가설적이다. 수학적 진리들조차도 관찰명제에 의한 일반화에 근거하는 것이며, 다수의 경험적 증거들로 인해 필연적인 것인 양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밀은 "논리"를 고대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지식이론으로 이해한다. 이는 경쟁하는 이론들의 인식론적 요청들을 검증하는 과제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 정치, 그리고 종교에서의 다양한 입장들과 같은 전문철학적 작업과 관계된다. 학문적 행동양식과 관련하여 밀은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개별 결과들에서 법칙적 인과관계로 추론해가는 방법에 우위를 두었다. 그 결과가 전혀 잠재적인 것이라 해도, 이러한 설명방식은 우리의 지식을 확장해 준다.
밀의 사회-정치철학적 주저인 <<자유에 관하여>>(1859)는 국가의 법이나 규준에 대하여 개별 시민의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는 고전적인 저서로 읽힐 수 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이 생각에 따라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개인의 권리는 국가의 번영보다 우위에 있다. 개인의 자유를 위한 밀의 변론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른 것이었다. "문명화된 사회의 구성원의 의지에 반하여 적법하게 강제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목적은 다른 이들이 해악을 입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국가의 의무도 도출된다. 미성년자들이 자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주는 것. 이를테면 적절한 교육을 받을 가능성을 보장해주고, 가난한 자들의 교육비 부담을 줄여주는 것. 여기서 밀의 자유론의 두 번째 관심사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강력하고 자기의식적이며 내적으로 자유로운 인격의 필연성이다. 외적인 정치적 자유가 가장 확실하게 보장되어야만 공공의 의견이나 사회적 합의를 위한 강요의 압력으로부터 개인이 활동할 여지가 남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밀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사회에 의해 '행복해야 한다'는 따위의 규정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유한 삶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용기를 길러야 하는 것이다.
밀은 아버지인 제레미 벤담 밀에 대한 우정을 가진 "급진파"들로 구성된 지적 환경에서 자랐다. 이들은 벤담의 이념에 기초해 정치적 운동을 해나가던 지지자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벤담의 공리주의적 원리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다양한 사회 영역들에서-특히 입법과 교육에 있어서- 구체화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다른 윤리 이론과 마찬가지로 공리주의도 목표와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의 원리들에 대한 통합적 진술을 다룬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이 상정한다. 첫째,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은 (그 행동을 하게 만든 의도에서가 아니라)그것의 개연적 결과들에 따라 책정된다. 둘째, 행위의 결론에 대한 판단의 기준은 그 행위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그 행위가 가지는 의미 안에 성립한다. 공리주의의 역사적 뿌리는 이웃사랑을 이야기하는 기독교적 윤리이다. 구체적 상황에 밀착해 있다는 점이 공리주의의 매력이다. 공리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경험의 토대 위에서 행위의 결과들에 대해 논변한다.
1861년부터 세 개의 에세이로 쓰여졌고, 1863년에 책으로 출간된 <<공리주의>>라는 논문으로써 밀은 공리주의에 대한 윤리적 토론을 오늘날까지도 지지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두 가지 결정적인 점에서 밀은 벤담의 단초를 넘어선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이 외적 쾌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없게 만드는 벤담의 편협한 쾌-불쾌의 심리학에 대해 개방적이고 발전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확실히 더 풍부한 이미지를 대비시킨다. 그래서 밀은 극대화되어야 할 "행복"을 우선적으로 양적으로가 아니라, 쾌의 감각에 대한 질의 측면에서 규정한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보다는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는 것이 더 인간에게 맞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행복을 위해 애쓰지만, 그것을 너무도 쉽게 놓쳐버리고 만다. 다른 한편 밀은 그를 급히 자신의 윤리적 사유의 한계로 이끌어간 유용성에 대한 숙고로부터 정의의 원칙들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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