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5)
- 생활정보
- 2007. 8. 19. 21:21
이 네오마르크스주의 사상가는 1885년 루트비히스하펜에서 태어났고, 라이프치히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또 가르쳤다. 나치 독재 시기에는 미국과 영국으로 망명을 해야 했다. 전쟁 후에는 라이프치히로 돌아왔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뒤에는 튀빙엔에서 가르치다가 1975년 세상을 버렸다. 그의 정치참여는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를 계승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더 큰 사회정의를 향해 사회가 천천히 변화될 것이라 믿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을 배우느라고 소멸해갔다. 그러나 오늘날 중요한 것은 희망을 가르치는 것이다. 삶의 원리를 희망에 두는 사람은 성공할 것이다. 그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희망은 사람을 편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품이 넓어지게 만든다. 그들은 결코 지식이 충분하지 않으며, 그들 자신이 속해있는, 생성 중에 있는 자가 되도록 몸을 던진다. 희망은 삶의 비참함에 대해 참지 않는데,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자"로 단순히 기투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희망은 삶의 불안과 공포의 책동에 대항해서 활동하며, 세계 속에서 도움이 되는 것을 찾는다. 인간은 가능한 더 나은 삶을 꿈꾼다. 우리의 일상은 매일매일의 꿈으로 관통되고 있으나, 희망은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사유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고, 존재를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한, 살아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에게는 제일 우선한다. 기대와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는 미래는 우리를 유혹한다.
구 시민사회는 소멸상태에 있고, 새롭고 더 인간적인 생활세계가 생성 중이다. "시민적" 존재는 탈출구가 없고, 그 앞에는 어떤 미래도 펼쳐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도 어떤 한 인간에서 다른 어떤 인간으로 되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 자신이 되지 못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의 가능성을 붙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민적 존재는 공허하고 희망이 없으며, 거짓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새로운 존재가 예고되고 있으며, 그것은 근원적이고 진정한 존재이다.
희망은 예언가들이 말하듯이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희망은 세상을 바꾼다.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향해 규정되어 있다. 죽은 자들이 죽은 자를 매장하면, 인류의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류가 나쁜 상황에 처해 있는 만큼 우리는 더 나은 삶을 꿈꿀 수 있다. 그렇지만 희망은 시민적 실존주의 사상가들의 허무주의적 장례 종소리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사유란, 칼 마르크스가 거대한 전환이라 보았던 바 이제까지의 것을 뛰어넘는 것을 뜻한다.
희망하는 자들은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아직 생성되지 않은 것'을 향해 뻗어간다. 그들은 무엇이 생성되고 있는지 예감하지마,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시민적 철학은 미래를 망각했으며, 고정적 보수적으로 사유한다. 이와 함께 세계는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존재하는 것의 항상적 반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욕구는 식욕을 망쳐버렸다.
그렇지만 희망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현존을 직관한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미래, 일곱번째 창조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가장 거주하기 좋은 세계의 장소이지만, 남극처럼 연구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갈망과 기대는 그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하며, 유토피아의 정신은 우리를 미래로 몰아간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의 황혼이 언어를 두고 싸우고 있으며, "새로운 것"의 범주가 투쟁의 개념이 된다. 우리가 배운 희망은 가능한 것의 매혹적인 나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르크스 이후로 우리는 미래라는 층위를 함께 생각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진리를 탐구할 수 없다.
철학은 새벽의 양심이 되었고, 미래를 옹호한다. 그것은 지식과 열정적인 희망을 결합시킨다. 새로운 것의 철학은 우리의 의식을 열려진 것으로, '아직 생성되지 않은 것'으로 이끈다. 좋은 새로움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백일몽을 넘어서는 것이다. 유토피아적인 것은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자유를 위한 운동을 수행한다. 소유와 비소유는 항상 서로 뒤바뀐다. 그것은 플라톤적인 사랑이고, 우리를 미래로 들어가도록 밀어준다.
종교 속에는 변화하는 혁명적 개념들이 많이 저장되어 있다. 그것들은 새로운 철학에 의해 계승되어야 한다. 현존하는 것들에 대해 투쟁한 이들은 언제나 이단가들과 유토피아주의자들이었다. 신의 변화시키는 힘을 풀어놓기 위해서는 무신론이 요구된다. 기대되는 신의 나라를 인간의 나라로 이해할 수 있다. 인류를 그들의 열려진 미래로 들어가게 하는 것은 종말론의 힘이다.
유태인들이 말하는 출애굽은 불공정한 구조와 고정된 습관으로부터의 점진적인 탈출이 된다. 낡은 장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공동생활의 새로운 모델이 시도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능성을 붙잡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사례로 이해된다. 그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가면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기독교 사회의 유토피아는 이웃사랑의 나라를 약속하며, 신에 대한 이야기는 혁명적인 원리로 이해된다. 그것은 불의한 억압상황으로부터 인간을 불러내기 때문이다. 종교는 포이어바흐의 의미에서 계승되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인간적 목표가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종교의 모든 개념들이 세속적으로 해석될 수 있어야한다.
혁명적 변화를 위해 종교의 매력이 유용하게 쓰이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부활론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류의 희망과 유토피아 안에서의 삶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기독교도와 마르크스주의자 간의 대화는 가능하며, 지상의 관점에서 변화될 수 있다. 그것이 희망과 새로움, 그리고 우리의 손으로 변화시킬 유토피아의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지배와 억압없는 새롭고 인간적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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