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sacer-Giorgio Agamben (1)
- 생활정보
- 2008. 3. 8. 01:19
서문
조에는 모든 생명체(동물, 인간 혹은 신)에 공통된 것으로, 살아 있음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가리켰다. 반면 비오스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태나 방식을 가리켰다. (33)
하지만 아테네 시민들의 '정치적 조에'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34)
<<정치학>>의 도입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심혈을 기울여 정치가를 삶의 재생산과 종족 보존의 역할을 맡은 오이코노모스['가계의 책임자'로서의 가장] 및 데스포테스[가족구성원에 대한 책임자, 혹은 노예에 대비되는 주인이라는 의미에서의 가장]와 구분하며 양자 간의 차이는 단지 양적인 것일 뿐 종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조롱했다.
[폴리스는] "생겨나기는 삶을 위해서이지만 존재하기는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이다."(35)
근대적 인간은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이다(푸코, <<앎에의 의지>>, p. 188)(36)
뒤이어 나타나는 것은 극도로 정교한 정치 기술을 통한 일종의 인간의 동물화이다. 인문 사회 과학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생명을 보호할 가능성과 동시에 그것의 대량 몰살Holocaust을 그대로 승인할 가능성도 나타난다. (푸코, <안전, 영토 및 인구>, p. 719)(37)
그러나 어쨌든 조에를 폴리스의 영역에 도입하는 것, 즉 벌거벗은 생명 자체를 정치화시키는 것은 근대(성)의 결정적 사건에 해당하며, 또한 고전적인 사유에서 나온 정치적.철학적 범주들을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38-39)
과연 권력체의 어디에 개인화의 기술들과 전체화 과정들이 만나는 비식별역(아니면 적어도 교차점)이 놓여 있을 것인가? 또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정치적인 '이중 구속'이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그런 통일적인 중심이 존재할까?(41)
이 연구는 이처럼 권력에 대한 법.제도적 모델과 생명정치적 모델 사이의 숨겨진 교차점을 주제로 하고 있다.
심지어 생명정치적 신체를 생산하는 것이 바로 주권 권력 본래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정치란 적어도 주권적 예외만큼이나 유구한 것이다. 근대 국가는 생물학적 생명을 자신의 계산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다름 아니라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의 결합이라는 비밀스러운 관계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근대 권력과 태고의 통치 비법들 간의 결속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42)
"어떻게 해서 생명체가 언어를 갖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해서 벌거벗은 생명은 폴리스에 거주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정확히 대응한다. 생명체는 자기 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없애버리는 동시에 보존함으로써 로고스를 갖게 되었듯이, 마찬가지로 자신의 벌거벗은 생명을 폴리스 내부에서 [예외로서] 배제되도록 함으로써 폴리스에 거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정치란 생명체와 로고스 사이의 접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경계선이라는 점에서, 정치는 서양 형이상학의 진정 근본적인 구조처럼 보인다.(45)
즉 근대 정치를 특징짓는 것은 (...) 모든 곳에서 예외가 규칙이 되는 과정과 더불어, 원래 법질서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던 벌거벗은 생명의 공간이 서서히 정치 공간과 일치하기 시작하며, 이런 식으로 배제와 포함, 외부와 내부, 비오스와 조에, 법과 사실이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비식별역으로 빠져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외 상태는 벌거벗은 생명을 법적.정치적 질서롭터 배제하는 동시에 포섭하면서 바로 그것이 분리되어 있는 상태 속에서 정치체제 전체가 의존하고 있는 숨겨진 토대를 실제적으로 수립했다. 예외 상태의 경계들이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러한 경계 안에 머물러 있던 벌거벗은 생명은 도시[국가]에서 해방되어 정치 질서를 둘러싼 갈등들의 주체이자 대상, 즉 국가 권력이 조직되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장소가 된다.(46-47)
오늘날 정치는 생명 이외의 어떤 가치(따라서 비-가치)도 알지 못하며, 그로부터 비롯된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는 한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결정을 최우선적인 정치적 기준으로 만들어버린 나치즘과 파시즘은 여전히 위협적인 현실로 남아 있을 것이다.(48)
(모든 한계 개념은 항상 두 개념 사이의 한계이기에)(50)
1. 주권의 논리Logik der Souveraenitaet
규칙은 동질적인 환경을 필요로 한다. 현실이 정상적인 상태여야 한다는 것은 법률가가 무시할 수 있는 단순한 '외부 전제'가 아니다. 정반대로 그것은 규칙의 내재적 효력에 속한다. 혼돈 상태에 적용할 수 있는 규칙은 없다. 법질서가 유의미하려면 먼저 질서가 확립되어야 한다.즉 정상적인 상황을 창출해야만 한다. 이러한 정상적인 상황이 진정으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자가 바로 주권자이다.(칼 슈미트, <<정치 신학>>, p. 39~41)(56-57)
예외가 실정법에 대해 갖고 있는 관계는 부정 신학이 실증 신학에 대해 갖고 있는 관계와 동일하다. (59)
예외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배제된 것은 바로 배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규칙과 완전히 무관해지지 않으며, 반대로 규칙의 정지라는 형태로 규칙과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규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고 예외로부터 철수하는 가운데 예외에 적용된다. 따라서 예외 상태란 질서 이전의 혼돈이 아니라 단지 질서의 정지에서 비롯된 상황일 뿐이다.(60)
예외가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칙이 스스로의 효력을 정지시킴으로써 예외를 창출한다. 즉 예외와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만 비로소 자신을 규칙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예외로부터 창출된 상황은 사실 상태로도 법률 상태로도 정의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양자 사이에 역설적인 비식별역을 설정한다는 특수성을 갖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규칙의 정지에 의해서만 창출되기 때문이다.(61)
이러한 의미에서 주권자의 예외란 근본적인 위치 확정Ortung으로서, 이는 단지 내부에 있는 것과 외부에 있는 것, 정상적 상황과 혼돈을 구별하는 것에만 한정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 둘 사이의 경계(예외 상태)를, 그러니까 그것에 기반해 외부와 내부, 정상적 상황과 혼돈이, 법질서의 효력을 가능케 하는 복잡한 위상학적 관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계를 찾아내는 것이다.
"혼돈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떤 규칙도 없기" 때문에 혼돈은 무엇보다 먼저 외부와 내부, 혼돈과 정상적 상황 사이의 비식별역의 창출을 통해, 다시 말해 예외 상태를 통해 질서 속으로 편입된다. (62)
이 연구가 제시하는 테제 가운데 하나는 오늘날 예외 상태 자체가 바로 근본적인 정치 구조로서 점점 더 전면에 떠오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규칙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가 공간 확정이 곤란함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이고 항구적인 공간 확정을 시도한 결과물이 바로 강제 수용소였다.(63)
이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전달하는 순수한 잠재성으로서의 랑그만이 모든 구체적인 발화 수행에서 물러나 언어와 비언어적인 것을 구분하며, 특정한 용어들이 특정한 외시들에 상응하는 의미 작용적인 담화의 공간을 열어준다. 언어란 영원한 예외 상태에서 언어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언어는 언제나 자신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선언하는 주권자이다.(66)
Wie nur die souveraene Entscheidung ueber en Ausnahmezustand den Raum gibt, in dem die Grenzen zwischen dem Innen und dem Aussen gezogen ud bestimmte Normen bestimmten Gebieten zugewiesen werden koennen, so teilt nur die Sprache als reinen Potenz der Bezeichnung, indem sie sich aus jedem konkreten Redevollzug zurueckzieht, das Sprachliche vom Nichtsprachlichen und erlaubt, den bezeichnenden Reden Bereiche zu oeffnen, in denen bestimmten Worten bestimmte Bedeutungen entsprechen. Die Sprache ist der Souveraen, der in einem permanenten Ausnahmezustand erklaert, dass es kein Ausserhalb der Sprache gibt, dass Sprache stets jenseits ihrer selbst ist. (S. 31)
예가 보여주는 것은 자기가 어떤 집합에 속한다는 것이지만 바로 이 때문에 예는 자신의 집합을 드러내고 한계짓는 순간 그것에서 빠져나오게 된다(언어적 구문의 경우 예는 자신의 고유한 기표를 드러내며 자신의 기의를 유예시킨다).
예란 실로 어원적인 의미에서 계열체paradigme이다. 그것은 "옆에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집합은 자신에 고유한 계열체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다. (67)
여하튼 예외와 예는 상관 개념으로 궁극적으로는 서로 구별할 수 없으며, 개별자들이 어디에 '속한다' 그리고 공통의 특징을 가진다는 말의 의미 자체를 정의해야 할 때는 어김없이 문제시된다. 모든 사회 체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논리 체계에서 외부와 내부, 낯섦과 친밀함 간의 관계는 이렇듯 복잡하다. (68)
어떤 식으로든 포함될 수 없는 것은 예외 형태로 포함된다. (72)
언어의 관점에서 본다면 포함을 의미와, 귀속을 외시와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한 단어는 항상 실제로 외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감추고 있으며, 자기가 외시할 수 있는 것을 넘어 의미와 외시 사이에는 도저히 환원 불가능한 간격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과승점의 정리에 상응하는 것이다. (72-73)
결정이란 법률문제도, 사실문제도 아니며 법과 사실의 관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법은 규범적 성격을 가지며, 명령하거나 규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실제 삶에서 자기 고유의 참조 영역을 만들어내고 그러한 참조를 규칙화해야 하기 때문에('측정자'라는 본래적 의미에서) '규칙'이 된다.(74)
법이란 본래 렉스 탈리니오스lex talionis(탈리스talis, '그와 같은'에서 유래한 이 탈리오talio 라는 말은 '사물 그 자체'를 의미했다)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법질서가 원래는 단지 위반 사실에 대한 제재가 아니라 어떤 제재도 없이 동일한 행위가 반복되는 것, 즉 일종의 예외적 사례를 통해 정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러한 최초의 위법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법질서 속에 이를 포함시키는 것, 즉 폭력을 원초적인 법 사실로 정립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외란 법의 본래적 형태이다. (75)
규칙의 근거가 과실인지 아니면 과실의 전제가 규칙인지를 규정하기가 이처럼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외부와 내부, 생명과 법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인데, 바로 그것이 예외에 대한 주권자의 결정이 지닌 특징을 이룬다. 법의 '주권적' 구조, 법의 독특하고 본래적인 '효력'은 그 속에서는 사실과 법의 구분이 불가능하게 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은 내려져야만 한다) 예외 상태의 형식을 취한다. 이런 식으로 강제된ob-ligata 생명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포함된 배제를 전제함으로써만, 즉 예외화exceptio로서만 법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다. 생명의 한계-형상, 즉 생명이 법질서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자리하는 일종의 비식별역이 존재하며, 그곳이 바로 주권의 장이다. (76)
주권자의 결정은 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 노모스[법, 관습]와 퓌시스[자연]사이의 비식별역을 구획짓고 종종 이를 갱신하는데, 그러한 영역에서 생명이란 본래 법 속에서 배제된 것이다. 그러한 결정은 곧 결정 불가능한 것의 지정이다.
슈미트의 첫 저술이 온통 과실 책임이라는 법적 개념에 대한 규정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77)
벤야민에게 중요한 문제는 법이라는 잔여물residu을 남긴 악마적인 실존 상태를 극복하고 인간을 과실 책임에서 해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과실 책임이란 무엇보다도 법과 운명의 질서 속에 기입된 자연 생명일 뿐이다). 이와 반대로 과실 책임이라는 개념의 법률적 성격 및 중심적 성격에 대한 슈미트의 주장의 핵심에는 윤리적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기껏해야 적그리스도의 지배를 최대한 늦출 수 있을 뿐인 주권 권력의 억제력(카테콘catechon)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78)
예외 관계는 추방령의 관계이다. 실제로 추방령을 받은 자는 단순히 법의 바깥으로 내쳐지거나 법과는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법으로부터 버림받은abbandonato 것이며, 생명과 법, 외부와 내부의 구분이 불가능한 비식별역에 노출되어 위험에 처해진 것이다. 그가 과연 법질서의 외부에 있는지 아니면 내부에 있는지를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 (79)
추방령이란 관계의 한 형식이다. 하지만 아무런 실증적인 내용도 갖지 않으며 또 관계의 항목들이 서로를 배제한다면(동시에 서로를 포함한다면) 그러한 관계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추방령으로 표현되는 법의 형식은 과연 어떤 것일까? 추방령이란 스스로가 무엇인가와 관계를 맺는 일반적이고 순수한 형식, 즉 관계없는 것과의 단순한 관계 설정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추방령이란 관계의 한계 형태에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추방령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관계라는 것의 형식 자체를 의문시하게 될 것이다. 또한 정치적 사실 역시 관계를 넘어서, 달리 말하자면 연관성rapporto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서는 더이상 사고할 수 없는 것인지도 자문하게 될 것이다.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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