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근대이후 내 번역0123

 

  바로 이러한 요구에 대해, 본질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인 “전통” 철학 이론의 개념들을 의문시하는 페미니스트들은 퇴짜를 놓는다. 이러한 개념들이 남성적 표상과 인식 관심들을 암암리에 보편화가능한 상수로 탈바꿈 시켜놓는 까닭이다.

  낸시 프레이져와 린다 니콜슨은 이론적으로 정초된 사회비판을 옹호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보편화가능한 정리와 개념들을 료타르 와 같이 후근대적으로 거부하는 데 대해 거리를 둔다.(3장 참조)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남성 지배 사회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은 “다양한 방법론과 폭넓은 이론적 조망”을 필요로 하며, “적어도 사회 조직과 이데올로기의 변화에 대한 포괄적이면서 서사적인 설명을 전제로 한다.”1) 그렇지만 그들도 철학적 기초 없는 사회 비판에 힘을 쏟으면서(“철학 없는 사회 비판의 후근대적 페미니스트 패러다임”)2), 합리-, 헤겔-, 마르크스주의적인 보편화 지향을 기각하는 후근대적 페미니즘을 설계한다: “어쨌든 후근대적 페미니즘 이론은 비-보편주의적이다. 그것의 고찰 방식이 문화와 시대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경우, 그것은 보편주의적이기보다는 비교관찰적이고, ‘보편적 법칙’보다는 변화와 충돌에 관심을 쏟는 것일 게다.”3) 심리학자인 캐롤 길리건과 같은 여성 저자들이 여성들 간의 종교-, 문화-, 인종적 차이(“여성들 간의 차이”4))를 무효한 것으로 만들고 이 때문에 이 차이들이 신빙성을 잃게 되었을 때 그러한 비판은 타당성을 갖게 되었다.

  프레이저와 니콜슨의 주된 취약점은 그들이 보편과 특수의 변증법을 감당하지 않고 내던져 버렸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탄탄한 담론을 구축했던 프랑수와즈 도본느처럼 보편타당한 설명 원리-남성 지배와 남성우월주의-를 상정하면서도 동시에 철학과 사회 과학에서의 보편주의는 거부했던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결코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될 것이다(“모델을 통한 사유”를 병렬체로 대체하려 했던 아도르노는 이미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여성 저자들은 적어도 자신들은 보편지향적 가정에 대해서 반성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보편주의의 포기와 다양하게 변주된 특수화 경향이 후근대적 문제상황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두 가지 서로 보충적인 대답이라는 사실은 안나 이트먼의 책 『정치적인 것에 대한 후근대적 재조명』(1994)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특히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인류학적 특수주의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그러나 특수와 보편을 터무니없이 연관지으려 한다는 점에서 이트먼은 프레이저와 니콜슨보다 훨씬 더 거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이성들(reasons)”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료타르의 미심쩍은 명제에서 출발점을 삼은 그들은 합리주의자, 헤겔주의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사적 이성과 결별한다: “단수로서의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이 지배 없는 해방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 거라는 유토피아적 공상은 송두리째 신뢰를 잃었다.”5)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자연 지배, 합리화, 보편주의에 대한 후근대적 저항은 근대에 대한 저항이자 근대와의 절연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트만은 말한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적 시대를 선적인 진보로 구성하는 근대를 의심한다.”6)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후근대적 혹은 후기 산업사회적 문제상황의 틀 속에서 사유하려는 페미니스트들과 사회과학자들은 개인의 자율이나, 프롤레타리아나 예술의 진리내용을 통해 계급적 모순을 극복하는 것 따위의 전통적 논변모형을 가지고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후근대적 문제상황에 대한 이트먼의 대답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인가?

  그녀는 이 대답을 여덟 개의 테제로 요약해 제시한다. 간략히 소개해 보자면 이렇다: 1. 우리에게 전승된 근대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전통에 대한 해체(탈구성적?)적 입장. 2. 이론을 보편 넘어서는 것으로 만드는 기술을 통해 불가피한 이론의 보편화 경향에 대하여 소수자의 목소리를 관철시키는 것. 3. 경계는 다양한 것들을 가르기도 하지만 또한 묶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차이에 대한 이분적 구성이 임의적이고 양가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4. 상대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관점주의. 5. 이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이론화란 역사적으로 우연의 산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6. 이론가들은 제도화된 지적 권위와 실재적이고 잠재적인 공공성에 대한 관점을 가지지만, 그 자신이 특수하고도 우연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7. 주체성의 강조와 더불어 8. 언어가 물질적이고 실제적이면서 생산적인 체계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우리는 거듭해서 바우만을 떠올리게 되는 바, 그는 이론적 입장으로는 해결불가능한 부분성과 문화적 관점의 이질성을 강조했다. 이트만의 테제는 근대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에 대한 스티븐 베스트의 규정과 일치하는 듯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근대적 견해와는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통약불가능성과 파편화를 해방의 원리로 격상시킨다.”7) 페미니스트들은 이 해방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들은 “표상의 정치학”8)에 대한 요구를 출발점으로 잡고 있다. 현실에 대한 담론적 서술에 대한 물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학: "무엇 때문에 (특정한) 서술들이 관철되는 것인가? 현실에 대해 서술하는 권위는 누가 갖는 것인가?  다르게 질문해 보자면, 그러한 서술들이 관철되게 하기 위해 침묵을 강요받는 자는 누구인가?“9) 이러한 맥락에서 이트먼은 포퍼가 제안했던, 과학자 집단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진술에 대한 비판적 검증이나 합의에 이르고자 하는 하버마스의 노력은 그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말한다. ”합의는, 불일치를 불러온다는 이유로 목소리를 박탈당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10)

  여기서 다시금 상호주관적 검증가능성과 보편화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이고 합리주의적이며(포퍼) 해석학적인(하버마스) 요구는 철저한 특수화를 통해 의심받게 된다. 이러한 의심은 한편으로는 설득력이 있는데, 왜냐하면 포퍼와 하버마스는 (물론 완전히 다른 근거에서) 상호주관성이라는 추상적 기준에서 출발하며, 주체성의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을 괄호쳐 버리기 때문이다.11) 그러나 그것은 문제상황을 거칠게 단순화시킨 것인데, 형식논리학이 공통의 이해를 위한 토대 역할을 한다는 것과 최종적 메타언어로서의 일상어가 이데올로기적 특수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트먼은 숙고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 그것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2)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간의 언어-담론적 대립은 사회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철학적인 문제이며, 또한 이 책의 거의 모든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문제가 안나 이트먼의 논변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이 대립은 이트먼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녀가 여성들뿐 아니라 인종적, 문화적인 소수자들 역시 남성들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 과학-, 철학적 합의로부터 배제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인종-, 문화적 차이에 대한 지각에 토대를 둔 저항적 사유, 잘못된(즉, 합리주의, 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와 같이) 보편화로 이 차이들을 획일화시키려는 시도에 단호히 반대하는 저항적 사유에 진력한다. 이에 대하여 그녀는 호주와 뉴질랜드 원주민들의 경험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렇게 억압받는 집단의 출발점은 관점은 저마다 특수하다는 것이다. 마오리족, 파케하족 등등은 저마다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어떤 특권적인 보편적 입장이나 신의 시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13)

  그것이 정말로 올바른 인식이라 해도, 유럽과 미국, 일본의 학자들 및 생태학자들(그린피스 활동가들) 등의 이질적인 집단들이 마오리족, 폴리네시아인들과 핵실험의 유해성에 대하여 정치적인 층위에서 타협을 보는 데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폴리네시아와 마오리족의 물리학자나 정보전문가들이 과학의 층위에서 유럽이나 한국의 물리학자, 정보전문가들과 소통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주기적으로 그런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는 문화적, 언어적, 이데올로기적 인식틀의 역할이 중요하며(아마도 포퍼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동시에 그 인식틀이 의사소통에 심각한 방해가 될 수도 있으므로 때때로 합의에 이르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역에서의 소통이 미리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이에 대해서는 마지막 장에서 다룰 예정이다.)

  이트먼의 가장 큰 문제는 다양한 담론적 층위들-일상어, 정치, 과학, 사회과학 등-을 구별하지 않고, 결국에는 극단적 특수주의로 귀결될 관점주의를 강변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수주의가, 이트먼이 불가피한 것이라 인식한 보편화 경향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지점에서 그녀는 이미 낸시 프레이저와 린다 니콜슨에게서 가시화된 페미니즘 논변의 취약점을 반복해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 지점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수화 경향을 전반적으로 비판한『후근대적 정치학을 넘어서』(1994)를 쓴 호니 펀 하버에게서도 분명히 볼 수 있다. 차이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여성의 특수성이나 문화의 이질성에만 주목하는 것은 그녀가 보기에 사회적 연대성과 주체성에 대한 치명적인 위협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여성들을 통합하는 여성운동은 이 두 요소를 겸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들이 없이는 “대립적 정치학”14)은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러한 논변을 듣고 보면, 정치적 행위와 주체의 형성을 가능케 하기 위해 그녀가 언어의 보편적 측면에 대하여 숙고하며, 이트먼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에 반하여 차이들을 개별적으로 -체계적이지 않게-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녀는 (해체론 시대에)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까지 한다: “구조를 산출하는 것은 언어의 속성이므로, 차이에 대한 억압(repression of difference)은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다.”15) 이를 보면 사회비판과 저항적 행위는 전형적인 보편개념으로서의 진리개념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진리에 대한 추구 없이는 비판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3장과 4장 참조.)

  정당하게 비판된 특수주의라 해도 극단적인 차이화-호니 펀 하버가 올바르게 보았듯이-를 통해서, 혹은 특수주의로 인해 야기된, 차이화의 배면이기도 한 무차별성-그녀는 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을 통해서 사회적 연대성과 페미니즘적 주체성을 용해시킬 수도 있다. 모든 사회집단이 자신들의 일회성을 노출시킴으로 인해 의사소통이 좌절된 곳에서는 극단적인 다원주의 속에서 여러 견해와 입장들이 서로 교환가능해지고 무차별한 것이 되어버린다: “기껏해야 그것들은 미국에서의 ”민족지적 식당“처럼 일종의 취미처럼 향유되거나, 최악의 경우 폭력 사태를 빚을 수도 있다. 투렌은 이미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암시한 적이 있는데, 다문화주의는 분리와 인종차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chargé de ségrégation et de racisme").16)

  그렇다면 페미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린다 허천이 생각하는 것처럼 두 용어를 이데올로기로 만들거나 세계관적 입장으로 실체화시키는 것으로는 파악이 안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후근대적 사유와 결합가능한 것도 아니요, 몇몇 비판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러한 사유의 한 사례도 아니다. 잘된 경우, 그것들은 (남성적)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끌고 있는 행로를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powerful force)을 공히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17) 그렇다. 하나의 특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페미니즘들이 있다. 이것들은 신화적이고 남성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후근대적 문제상황의 틀 속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이들의 물음과 답이 사회학자들의 그것과 본질적인 점에서 중첩된다는 사실(근대의 보편주의에 대한 답으로서의 특수주의, 주체구성과 사회비판에 대한 관점에서 특수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후근대적 문제상황”이라는 표현이 유효하다는 추측을 확증해준다. 다음 절에서는 F. H. 텐브루크, 다니엘 벨, 아미타이 에치오니와 같은 다소 보수적인 사회학자들이 이와 유사한 물음을 제기하며, 많은 이데올로기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서로 비교가능한 대답들을 내어놓고 있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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