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소설단평 고친 것.

 

  소설가의 혀가 이미 맛보고 느끼고 핥은 것을 뒤쫓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비평가의 혀는 창조적 미식가의 그것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비평의 혀가 행복을 느끼려면 소설의 혀와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설의 혀에 돋은 맛봉오리들을 더듬고 훑고 빨아서 거기 남아 있는 맛을 느껴보는 수밖에. 그러나, 슬퍼라, 요리라기보다는 그저 음식일 뿐인 것에 인이 박힌 비평가의 혀라니. 온갖 진귀한 최상급의 요리들이 가득 차려진 테이블 앞에 서서 늘 먹던 김밥과 탕수육만을 집어 먹고 있는 꼴이다. 굳어서 딱딱하고 그래서 무감각한 비평가의 혀가 소설과의 키스를 망쳐버리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 딱하기도 해라. 세상의 모든 키스가 그러하듯이, 소설과 비평의 그것도 양쪽의 혀가 모두 섬세하고 부드럽게 서로를 쓰다듬어야 황홀경에 이르는 법이다.

  미각이 딸린다면, 차라리 주방으로 들어가 차려진 음식들이 만들어진 사연과 거기에 깃든 손길을 되짚어 보는 게 방책일 테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인가? “요리를 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재료의 구조를 이해해야”(287) 하듯이, 소설의 맛을 보기 위해선 가장 먼저 소설의 구조를 이해해야 하는 법. 이 소설의 주방에는 “사랑과 증오의 도착증”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을 듯하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도착증’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요리와 식사에 관한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성찰이 곳곳에서 독자를 유혹하고, 곧이어 역사적 에피소드와 야사에 가까운 수다들로 채워져 있어 현란하고 화려한 외양을 띠고 있긴 하지만, 소설의 도착증적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며 살다가, 다른 여자에게 이끌린 남자에게 버림받고 잊지 못해 몸부림치다가 결국 남자의 새 여자를 납치해 혀를 자르고 그걸로 요리를 만들어 남자에게 먹이는 것. 그러나 재료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요리의 출발일 뿐이다. 재료의 구조를 충실히 반영해서 이것이 어떤 것과 만나고 뒤섞여야 훌륭한 요리로 탄생하는지를 알아야 하듯이, 도착증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길을 따라 이동하는지를 세심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거위 새끼들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애착을 느낀다.” 그래서 “‘각인현상’이라는 말도 거위들한테서 처음 생겼다.”(191)


  주인공 정지원은 아주 뛰어난 감각과 이해력을 소유한, 말하자면 ‘엘리트’ 요리사이다. 요리에 관한 한 그녀의 능력과 자세는 탁월하다. 아프거나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요리가 무엇인지, 어떤 요리가 그 사람을 낫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감각적으로 간취해 낼 정도다. 그러나 이렇게 ‘합리적’인 그녀가 사람의 혀를 뽑아 요리를 만들어 옛 애인에게 먹이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다니. 왜일까? 그것은 그녀가 거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착증의 진짜 원인은 ‘각인현상’인 것이다. 거위인 그녀가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이 바로 그 남자, 한석주였기 때문에, 도착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 대상이 (...) 잘못된 대상일지라도 거위는 일평생 그 헛된 구애행동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191) 각인현상이 발생하는 장면: “나는 그가 접시를 비울 때까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부푸는 것까지. 음식을 먹을 때 입술은 피가 몰리면서 붉어지고 부풀기 시작한다.”(29) 거위 정지원이 지니게 된 각인현상의 핵심은 ‘입’이다. 입술과 혀를 포함한 입. 각인현상이 되돌릴 수 없는 것임을, 그녀가 정말로 거위임을 확인하게 되는 다음과 같은 진술: “나는 한 번만 더 빨아먹고 싶은 그의 붉은 혀를 본다.”(100)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정확하게 내 입을 향해 사정하던 낯선 남자가 떠오른다. (...) 그것이 내 입을 겨냥했을 때, 나는 세 번 놀랐다. 내가 그렇게 크게 입을 벌릴 수 있다는 것, 내 몸이 그토록 순간적이고 갑작스럽게 고양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익숙한 맛이라는 것.”(251-252) 화자는 이에 대해 심리적 설명을 덧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억압은 있어도 구강적 억압은 없다는 게 신기할 때가 있다. 그건 성인이 되기 이전의 우리들에겐 페니스보다는 혀가, 음문보다는 입이 먼저 있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 아닐까.”(131)

  중요한 주변 인물인 삼촌과 문주, 그리고 (인물은 아니지만) 폴리의 심경과 상황을 세심하게 헤아리고 배려하는 그녀가 한석주의 심경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혹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은 이러한 각인현상이 그녀의 시야를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입이 그녀의 눈을 먹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삼촌의 알코올 중독과 문주의 비만을 이해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도와주기까지 하면서도 한석주에게는 두 가지 말만 거듭할 뿐이다. “돌아와”, “당신도 사람이라면”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곳곳에 배치된 요리에 얽힌 진기한 볼거리, 들을 거리, 외울 거리들과 함께 수없이 반복되는 그녀의 갈등과 번민은 각인현상을 이겨내려는 안간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넉 달이라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탈리아 요리 전문점 ‘노베’의 부주방장으로 고속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잊으려는, 잊어보려는 처절한 몸부림. 그러나 이렇게 애달픈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광기의 제물이 되고 만다. 첫 번째 위기. 한석주의 새 애인인 이세연이 한석주 부모님과의 상견례 요리를 그녀가 맡도록 일을 꾸민다(굳이 지적하자면, 이세연의 이러한 행동은 개연성이 턱없이 부족하다. 정지원의 쿠킹클래스에 수강생으로 참여한 걸 계기로 한석주를 빼앗은 그녀가 정지원에게 상견례 요리를 부탁하는 것은 도저히 ‘정상적인’ 인간의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충분히 행복을 맛보고 있을 그녀가 왜 이렇게 잔혹한 기쁨을 맛보려 하는지? 게다가 어째서 한석주는 이러한 행위를 방기하는지? 이들에게는 ‘상식’과 ‘도리’라는 게 없는 걸까?). 정지원은 그러나 요리사로서의 자부심과 오기로 이러한 위기를 잘 넘긴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더 끔찍하게, 폭풍이 몰아친다. 예전 행복했던 한때, 그가 그녀에게 만들어주기로 했던-그는 건축가다- ‘꿈의 키친’에서 이세연과 그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녀의 안간힘은 허망하게 허물어지고 만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북극에서는 남십자성을 영원히 볼 수 없는 것처럼 저쪽에 있으면 이쪽을 볼 수 없는 데가 있다.”(168)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그녀의 광기가 지극히 차분히 발휘된다는 점이다. 해부학 책을 사서 ‘어떻게 인간의 혀를 잘라내야 하는지’를 찬찬히 연구한 다음, ‘노베’에 사직서를 내고, 삼촌에게 작별인사를 치른 후, “향신료로 쓰는 마취제”(267)인 정향으로 이세연을 기절시키는 일련의 ‘절차’를 한 치의 착오와 망설임도 없이 침착히 밟아 나아가는 것이다. 심지어 어떻게 한석주를 위한 ‘최상의 혀 요리’를 만들 것인가를 철저히 연구하고 실행하는 그녀. 아내의 죽음으로 알코올성 건망증후군을 앓게 된 삼촌의 회복을 위해서 어떤 배려도 아끼지 않던 모습과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극치의 섬뜩함을 뿜어내는 장면이다.

  각인현상에 묶여 ‘다른 대상’, 다른 가능성을 찾지 못하는 그녀가 한석주를 향한 맹목적 집착에 사로잡혀 파괴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파괴적인 결말’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건의 작위성과 더불어, 정지원은 모르는 어떤 굴곡이나 극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한석주에게 있었을 가능성이 철저히 차단돼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의구심은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리고 그녀에게 그토록 다정하고 부드러웠던 그가 왜 그렇게 잔인하게, 냉정하게, 파렴치하게 변한 것인지. 작가는 정지원이 갇힌 각인현상의 감옥에 독자를 함께 가두고 싶었던 것일까? 정지원과는 다른 감옥 속에 살고 있을 많은 독자들은 그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을 터인데. 알코올 중독자가 담배 중독자에게는 훌륭한 조언자가 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뒤집어 생각해 보자. 알코올 중독자는 담배 중독자의 괴로움을 알 수가 없다, 결코. 제아무리 훌륭한 조언자라 해도 이토록 괴로운 각인현상의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느 목요일 오후, 바람에 날린 검은 비닐봉지에 놀라 넘어진 정지원이 “다시 똑같은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마찬가지”(174)일 거라고 생각하듯이, 지극히 사소한 우연으로 인해 생긴 각인현상이라 해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되는 수가 있다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갖가지 진귀한 요리 이야기와, 슬픔으로 연명하는 자가 느끼는 감정의 섬세한 결들을, 쓰다듬듯 요리하듯 엮어낸 이 소설이 가지는 힘은 그 섬뜩하고 어두운 고통에 대한 성찰을 견뎌낸 데서 나오는 것이라 하겠다. 아, 이 쓰디쓴 황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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