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 <<혀>> 소설단편-문학과 사회
- 생활정보
- 2008. 1. 24. 22:15
소설가의 혀가 이미 맛보고 느끼고 핥은 것을 뒤쫓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비평가의 혀는 창조적 미식가의 그것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비평의 혀가 행복을 느끼려면 소설의 혀와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설의 혀에 돋은 맛봉오리들을 더듬고 훑고 빨아서 거기 남아 있는 맛을 느껴보는 수밖에. 그러나, 슬퍼라, 요리라기보다는 그저 음식일 뿐인 것에 인이 박힌 비평가의 혀라니. 온갖 진귀한 최상급의 요리들이 가득 차려진 테이블 앞에 서서 늘 먹던 김밥과 탕수육만을 집어 먹고 있는 꼴이다. 굳어서 딱딱하고 그래서 무감각한 비평가의 혀가 소설과의 키스를 망쳐버리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 딱하기도 해라. 세상의 모든 키스가 그러하듯이, 소설과 비평의 그것도 양쪽의 혀가 모두 섬세하고 부드럽게 서로를 쓰다듬어야 황홀경에 이르는 법이다.
미각이 딸린다면, 차라리 주방으로 들어가 차려진 음식들이 만들어진 사연과 거기에 깃든 손길을 되짚어 보는 게 방책일 테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방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인가? “요리를 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재료의 구조를 이해해야” 하듯이, 소설의 맛을 보기 위해선 가장 먼저 소설의 구조를 이해해야 하는 법. 이 소설의 주방에는 “사랑과 증오의 도착증”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을 듯하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도착증’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요리와 식사에 관한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성찰이 곳곳에서 독자를 유혹하고, 곧이어 역사적 에피소드와 야사에 가까운 수다들로 채워져 있어 현란하고 화려한 외양을 띠고 있긴 하지만, 소설의 도착증적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며 살다가, 다른 여자에게 이끌린 남자에게 버림받고 잊지 못해 몸부림치다가 결국 남자의 새 여자를 납치해 혀를 자르고 그걸로 요리를 만들어 남자에게 먹이는 것. 그러나 재료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요리의 출발일 뿐이다. 재료의 구조를 충실히 반영해서 이것이 어떤 것과 만나고 뒤섞여야 훌륭한 요리로 탄생하는지를 알아야 하듯이, 도착증이 어디서 왔으며 어떤 길을 따라 이동하는지를 세심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거위 새끼들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애착을 느낀다.” 그래서 “‘각인현상’이라는 말도 거위들한테서 처음 생겼다.”
주인공 정지원은 아주 뛰어난 감각과 이해력을 소유한, 말하자면 ‘엘리트’ 요리사이다. 요리에 관한 한 그녀의 능력과 자세는 탁월하다. 아프거나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요리가 무엇인지, 어떤 요리가 그 사람을 낫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감각적으로 간취해 낼 정도다. 그러나 이렇게 ‘합리적’인 그녀가 사람의 혀를 뽑아 요리를 만들어 옛 애인에게 먹이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다니. 왜일까? 그것은 그녀가 거위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착증의 진짜 원인은 ‘각인현상’인 것이다. 거위인 그녀가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이 바로 그 남자, 한석준이었기 때문에, 도착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잔혹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그 대상이 (...) 잘못된 대상일지라도 거위는 일평생 그 헛된 구애행동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각인현상이 발생하는 장면: “나는 그가 접시를 비울 때까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부푸는 것까지. 음식을 먹을 때 입술은 피가 몰리면서 붉어지고 부풀기 시작한다.” 거위 정지원이 지니게 된 각인현상의 핵심은 ‘입’이다. 입술과 혀를 포함한 입. 각인현상이 되돌릴 수 없는 것임을, 그녀가 정말로 거위임을 확인하게 되는 다음과 같은 진술: “나는 한 번만 더 빨아먹고 싶은 그의 붉은 혀를 본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정확하게 내 입을 향해 사정하던 낯선 남자가 떠오른다. (...) 그것이 내 입을 겨냥했을 때, 나는 세 번 놀랐다. 내가 그렇게 크게 입을 벌릴 수 있다는 것, 내 몸이 그토록 순간적이고 갑작스럽게 고양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익숙한 맛이라는 것.” 화자는 이에 대해 심리적 설명을 덧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억압은 있어도 구강적 억압은 없다는 게 신기할 때가 있다. 그건 성인이 되기 이전의 우리들에겐 페니스보다는 혀가, 음문보다는 입이 먼저 있다는 걸 자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중요한 주변 인물인 삼촌과 문주, 그리고 (인물은 아니지만) 폴리의 심경과 상황을 세심하게 헤아리고 배려하는 그녀가 한석주의 심경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혹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은 이러한 각인현상이 그녀의 시야를 가두어 버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입이 그녀의 눈을 먹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삼촌의 알콜 중독과 문주의 비만을 이해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도와주기까지 하면서도 한석주에게는 두 가지 말만 거듭할 뿐이다. “돌아와”, “당신도 사람이라면”
소설의 진행됨에 따라 곳곳에 배치된 요리에 얽힌 진기한 볼거리, 들을 거리, 외울 거리들과 함께 수없이 반복되는 그녀의 갈등과 번민은 각인현상을 이겨내려는 안간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굳이 지적하자면, 그럴 만한 개연성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한석주의 새 애인인 이세연이 한석주와의 상견례 요리를 그녀에게 부탁해 오는 ‘위기’를 한 차례 넘긴 후, 그가 그녀에게 만들어주기로 했던 ‘꿈의 키친’에서 이세연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보게 되는 순간 마침내 그녀의 안간힘은 허망하게 허물어지고 만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북극에서는 남십자성을 영원히 볼 수 없는 것처럼 저쪽에 있으면 이쪽을 볼 수 없는 데가 있다.”
얼핏설핏 읽으면 그저 ‘합리적으로’ 미친 한 여자의 비뚤어진 사랑이야기로나 읽힐 이 소설은 그러나 사랑과 요리와 혀를 청진기 삼아 내린 하나의 적확한 진단일 수도 있다. 만연해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병에 대한 진단. ‘사랑과 증오의 도착증’이 아니라면, 어떤 다른 형용사가 붙은 ‘~~ 도착증’이라는 팻말이 없는 부엌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바꿔 말해, 그게 사랑이든 돈이든 명예나 혹은 다른 어떤 것이든 누구나 저마다의 ‘각인현상’을 짊어지고 괴로워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독자가 한석주의 사연이나 내면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소설적 장치를 배치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다시 말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겠지만), ‘혀’라는 탁월한 소재와 꼼꼼한 공부를 통해 맛깔스럽고도 섬뜩한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의 솜씨는 자랑할 만하다. 그 솜씨를 맛보았으니 내 혀의 미각은 아마 조금 더 세련되어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각인현상’은 정말로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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