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근대이후 2(08.01.12)
- 생활정보
- 2008. 1. 12. 01:26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도 알고 있었듯, 초기 시장사회는 개인과 예술의 자율성을 가능케 했다. 후기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원자화와 획일화에 불을 붙였고, 이들을 지역적 관계, 계급적 위치, 집단적 연대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떼어놓았다. 이를 통해 시장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을 반복해서 폐기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시장은 개별적인 것의 일회성을 상업화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특히 미디어를 통해)의 획일화로 대체하고, 예술의 자율성을 문화 산업 내에서 예술이 상품이 되게 함으로써 파괴한다.
이러한 변증법은, 시장 사회의 다양성만을 강조하는 바우만에게는 지각되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와는 별개로 다른 글에서는 기술, 사회, 심리, 그리고 실존적 능력(“숙련”)을 파괴하는 것은 개인의 “시장종속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그는 그러한 사회를 지배하는 무관심은 하버마스가 제기했던 정치적 합법성에 대한 물음을 무관심(관심의 결여) 속으로 던져버린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문제는 극단적 특수주의(급진적 다원주의)와 극단적 보편주의(통일적 사유)가 무관심 속에서 교환가능한 것으로서 서로 뒤바뀔 수 있다는 데 있다. 모든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집단이 보편화 불가능한 가치를 고수하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는 어떤 가치나 진리도 구속력이 없으며, 교환가능한 것이 된다. 바우만이 보편화 가능성을 체현하고자 하는 진리개념(“진리의 기획”)으로부터 탈피한 것은 일관적인 태도라 하겠다. 다른 보편적 가치들, 이를테면 자유, 평등, 민주주의, 과학성과 같은 것들이 지역적이고 문화적이며 집단에 특수한 가치를 대체하려 할 경우에는 이들 가치들 역시 교환가능하고 무책임한 것이 된다.
특수와 보편의 변증법을 견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라는 잘못된 선택지를 거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추상적으로 세우려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개념들이 어떤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문화 속에서 어떤 구체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후근대적 시각에서 근대를 고찰하며(“나는 ‘포스트모더니티’라는 경험의 견지에서 ‘모더니티’를 규정하고 있다.”) “근대적 보편주의는 헛된 꿈”이라 여기는 바우만처럼, 후근대적 정치학과 윤리학의 옹호자는 더 이상 이러한 변증법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거듭해서 언급될 것이다.(몇 몇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이러한 변증법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계몽주의와 합리화과정으로서의 근대가 몰고온 위기에 대한 바우만의 후근대적 반동을 투렌, 베크, 기든스의 근대 비판과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점과 모순이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 공통된 문제제기와 답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후근대적 문제상황은 근대적 문제상황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부하면서 자기비판적이고 반성적이며 민주적으로 개선된 근대를 구상하는 투렌, 베크, 기든스는 아마도 이러한 구성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이 바우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다른 사회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알렝 투렌 역시 계몽된 근대에서 우선 전통적 사회형태와의 단절 및 합리주의적 원칙의 관철을 지각한다. 이 원칙은 그가 근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자연과 사회화된 주체에 대한 지배에 의거하는 것이다. 투렌은 한편으로는 막스 베버를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몽의 변증법에 의지하는데, 이는 근대에 대한 다음의 간략한 서술에서 알 수 있다: “근대는 무역과 산업을 조직하고 식민지를 향한 길을 닦음으로써 합리주의적이고 근대주의적인 엘리트들이 세계의 나머지를 지배하기 위한 토대를 놓았다.” 바우만,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합리화 과정뿐 아니라 진보 신앙과 지배의 근대적 형식 모두가 근본적으로 회의의 대상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투렌이-이전에 푸코가 그랬듯이(3장 참조.)- 17세기에 최초의 근대화의 추동력이 생겨났다고 생각하며, 어떤 “단일성의 신화(mythe unitaire)”에 의해서도 지배받지 않았던 16세기를 칭송한다는 점이다. 이성의 신화나 진보의 신화 따위는 16세기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새 천년을 앞둔 우리는 계몽과 혁명의 시대가 아니라 16세기 근대의 시초 단계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는 물음을 던진다.
다소 수사적인 이 질문에 대한 긍정이 진보 사상과 단절을 야기한다는 사실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그것은 동시에 (바우만에게서 보았듯이) 투렌이 체계적이고 지배적인 진보 사상과 동일시하는 역사적 유물론과의 단절이기도 하다. 그가 생각하기에 마르크스와 루카치에게 있어 프롤레타리아는 자율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계급주체가 아니라 역사적 필연성을 구현하는 자일 뿐이었다. 합리주의적 보편주의를 밀고 나아가려는, 헤겔의 유산인 총체성이라는 범주는 이성, 주체, 역사의 동일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성, 합리화, 주체성이 얼마나 서로 낯선 것인지를 보이려 애쓰는 투렌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비난한다. “그것(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은 계급의 주체성에 적대적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을뿐더러 사회 정의보다는 역사적 운명의 실현에 관심이 팔려 있다.” 3장과 4장에서는 이러한 “후근대적” 사상을 카뮈의 반항적 인간L'Homme révolté이 선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줄 것이다.
투렌은 계몽의 변증법과 바우만을 관통하는 사유의 흐름에 합류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비판적으로 성찰된 근대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전반적으로 특징짓는다: “근대(모더니티)는 일자의 승리(triomphe de l'Un)가 아니라, 일자의 소멸이고 합리화 및 개인적 집단적 자유 사이의 힘들지만 필연적인 관계의 관리를 통한 일자의 대체이다.” 이 지점에서 베버적 고찰방식이 다시금 더 큰 설득력을 얻게 된다: 합리화와 관료화는 주체적 요소, 즉 주체의 주도권과 자유를 통해 적절히 제어되어야 한다. 그러나 베버에게서는 주체성이 카리스마의 개념과 많은 부분 합치하는 반면, 투렌에게서 그것은 사회적 운동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사회학을 위하여(1974)와 같은 초기 저작들에서 그는 이미 사회학에서 체계의 영역과 행위자 및 그의 행위의 영역을 단절시켜 고찰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행위자의 행위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서 경제나 정치의 체계를 분석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행위방식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행위의 사회학자에게 사회란 행위나 체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의 체계적 복합작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계급들 간의 관계, 정치적 영향력, 조직의 역할, 인간들 간의 관계 들은 사회적 관계의 가장 중요한 범주들이다.”
이러한 사유를 통해 투렌은 후기산업사회가 4개의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영역들로 분화되었다는 가정에 기초하여 근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 모델을 제시한다. 이 영역들 중 2개는 개인적인 특징을 띠고, 나머지 2개는 집단적 성격을 갖는다. 에로스(섹슈얼리티)와 소비가 전자이고, 민족주의와 경제기획이 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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