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오캄(1280-1349)
- 생활정보
- 2007. 6. 8. 12:18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윌리엄 오캄의 사유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서 있다. 그의 저작들은 세속권력이 정신적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고, 스콜라 철학의 견고한 세계상의 근거가 문제시되고 불확실해진 14세기의 변혁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신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물음과 이에 따른 인식 비판과 지식의 분석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1280년 영국 남부의 오캄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로 윌리엄은 프란체스코에 입회하고, 그 역시 강의를 하기도 했던 옥스포드에서 공부했다. 1324년에 대학의 총장이 이단의 혐으로 그를 고소하여 아비뇽의 교황청에서 재판이 열렸고, 1328년에 그는 프란체스코회의 Generalmagister였던 체세나의 미카엘과 함께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황제에게 피신했다. 바이에른의 뮌헨에서 그는 흑사병으로 죽게되는 1349년까지 살았다.
그의 작품들이 쓰여진 과정 속에 이러한 사건들이 반영되어 있다. 초기 저작들이 인식론적이고 언어논리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반면, 바이에른 망명 시기에 썼던 저작들은 정치적인 주제들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내적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캄의 윌리엄이 쓴 저작들은 철학의 도움으로 전체현실을 파악하고 설명하려 시도했던 신학으로부터, 우연성의 체험으로 인해 점증하던 낡은 세계관 모형에 대한 의구심으로 옮겨간다. 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는 14세기 초기에 표준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과 논리학에 대한 지식을 그의 선행자들보다 더 일관되게 적용했고, 그래서 "하나의 합리성의 표준, 현실 개념, 개별성의 경험과 자유의 경험"을 당대에 부응하게끔 공식화했다.
오캄의 기본의도는 보편개념들(이념)로부터 독립적인 존재 및 그것들을 표시하는 사물들을 의문시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에 근거한 이론, 즉 모든 사물은 하늘과 -아우구스티누스적 기독교의 독해방식으로 보자면-신 안에 현존하는 이데아(보편자)의 모방일 뿐이라는 이론은, 앞서 로스켈리누스와 아벨라르가 저항했고,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러한 개념 속에서 인간과 개별적 인간의 인간성이 보편존재로부터 어느 정도 개체화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오캄도 이에 반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성이나 인간의 이념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인간이 먼저 존재한다. 그후에야 우리는 사유와 언어 속에서 개별적 사물들에 대한 보편개념을 형성한다. 보편적인 것이 실재에 있어서 "이름"에, 즉 보편개념에 상응한다는 것을 반박했던 까닭에 오캄은 "유명론자"(라틴어로 이름을 의미하는 nomen에서 유래하는)라 불리운다.
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요구한 것은 학적 인식의 출발점으로서 개별 사물을 취하고, 이들로부터 개념적 추상에 이르는 길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불필요한 이론들 없이, 서술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버리는 새로운 학
적 경제성을 말한다.(오캄의 면도날)
이로써 오캄은 현실에 대한 적합한 재현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종래의 믿음을 뒤흔들고 동시에 전통 형이상학을 의문에 빠트렸다. 진실로 개별 사물만이 존재하고 이는 덧없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라면 소멸하지 않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감각적 지각이 거짓일 수 있다는 실제의 경험은 마침내 모든 것을 의문시하고 주관적 지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는 "별이 부서진다 해도 별에 대한 직관은 남아있을 수 있다"라고 썼으며, 다른 곳에서는 혹시라도 누군가가 비록 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에 대한 관조를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고와 함께, 전승된 세계상은 철저히 의문시되었고, 신학과 철학의 설명과 고유한 지각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로 흔들리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현실의 개념은 또 하나의 다른 신의 형상을 결과로 가져왔다. 보편자(보편개념)가 인간 사유의 구성물 이상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정했듯이, 그것을 넘어서 신에 대한 인식에 이르는 길은 없다. 그러므로 신의 현존은 이성으로는 증명될 수 없고, 다만 초자연적인 개시에 근거해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오캄은 신학과 철학의 결합을 깨뜨렸다.
그에게 신이란 자신이 지정한 보편적 원리에 따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질서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신이 아니고, 자신의 전능함 가운데서 마음대로 행하는 신이다. 이 신은 현재의 세계와 구원의 질서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세워 놓았다. 어떤 보편법칙에도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다른 세계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다시 인간의 주관적 표상에 대한 사유와 스스로 존재하는 보편 원리들에 대한 거부가 작용한다. 오캄에게는 신에 대한 우리의 진술들은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신 자신 혹은 그의 존재는 인간에 의해 인식될 수도 증명될 수도 없다.
신에 대한 이러한 형상에서 이미 루터의 신 개념의 선구자를 볼 수 있는데, 루터도 스콜라 철학의 합리적 신 개념을 거부했던 것이다.
오캄을 정치이론에 뛰어들게 한 시발점은 프란체스코회의 급진파와 교황 요한 22세 사이에 벌어진 청빈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사유재산의 형태와 인간의 지배형식, 그리고 이에 따라 교회와 국가 간의 권력분배에 대한 고찰로까지 번졌다. 교회와 국가 양자는 신으로부터 유래하며 각기 고유의 영역을 갖는다.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합의에 근거하는 것이며, 교황이 부여한 것이 아니다. 이로써 오캄은 교회 권력의 영역을 제한시켰고, 영원한 신의 계획에 기초되어 있는 질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창조된 질서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이론의 기반을 다졌다. 여기서도 오캄의 학설은 벌써 중세를 지나 신과 세계가 항상 분리되어 고찰되는 근대를 분명히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오캄의 기여는 확실히 낡은 스콜라적 체계의 허약함과 근대의 요구에 대해서 그것의 불충분함을 인식케 한 것이었다. 그의 <<유명론>>과 먼저 구체적인 개별 사물을 연구해야 한다는 요구로서 그는 경험적 자연과학의 선두에 서게 된다. 그의 국가론은 교회와 국가의 새로운 관계를 향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신에 대한 학설은 새로운, 철학적 합리주의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신의 개념을 향한 길을 자유롭게 만들었는데, 물론 이는 철학과 신학의 결합을 깨뜨리는 희생을 통한 것이었다.
1280년 영국 남부의 오캄에서 태어나 젊은 나이로 윌리엄은 프란체스코에 입회하고, 그 역시 강의를 하기도 했던 옥스포드에서 공부했다. 1324년에 대학의 총장이 이단의 혐으로 그를 고소하여 아비뇽의 교황청에서 재판이 열렸고, 1328년에 그는 프란체스코회의 Generalmagister였던 체세나의 미카엘과 함께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황제에게 피신했다. 바이에른의 뮌헨에서 그는 흑사병으로 죽게되는 1349년까지 살았다.
그의 작품들이 쓰여진 과정 속에 이러한 사건들이 반영되어 있다. 초기 저작들이 인식론적이고 언어논리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반면, 바이에른 망명 시기에 썼던 저작들은 정치적인 주제들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내적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캄의 윌리엄이 쓴 저작들은 철학의 도움으로 전체현실을 파악하고 설명하려 시도했던 신학으로부터, 우연성의 체험으로 인해 점증하던 낡은 세계관 모형에 대한 의구심으로 옮겨간다. 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는 14세기 초기에 표준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과 논리학에 대한 지식을 그의 선행자들보다 더 일관되게 적용했고, 그래서 "하나의 합리성의 표준, 현실 개념, 개별성의 경험과 자유의 경험"을 당대에 부응하게끔 공식화했다.
오캄의 기본의도는 보편개념들(이념)로부터 독립적인 존재 및 그것들을 표시하는 사물들을 의문시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에 근거한 이론, 즉 모든 사물은 하늘과 -아우구스티누스적 기독교의 독해방식으로 보자면-신 안에 현존하는 이데아(보편자)의 모방일 뿐이라는 이론은, 앞서 로스켈리누스와 아벨라르가 저항했고,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러한 개념 속에서 인간과 개별적 인간의 인간성이 보편존재로부터 어느 정도 개체화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오캄도 이에 반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성이나 인간의 이념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인간이 먼저 존재한다. 그후에야 우리는 사유와 언어 속에서 개별적 사물들에 대한 보편개념을 형성한다. 보편적인 것이 실재에 있어서 "이름"에, 즉 보편개념에 상응한다는 것을 반박했던 까닭에 오캄은 "유명론자"(라틴어로 이름을 의미하는 nomen에서 유래하는)라 불리운다.
이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요구한 것은 학적 인식의 출발점으로서 개별 사물을 취하고, 이들로부터 개념적 추상에 이르는 길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불필요한 이론들 없이, 서술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버리는 새로운 학
적 경제성을 말한다.(오캄의 면도날)
이로써 오캄은 현실에 대한 적합한 재현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종래의 믿음을 뒤흔들고 동시에 전통 형이상학을 의문에 빠트렸다. 진실로 개별 사물만이 존재하고 이는 덧없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라면 소멸하지 않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감각적 지각이 거짓일 수 있다는 실제의 경험은 마침내 모든 것을 의문시하고 주관적 지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는 "별이 부서진다 해도 별에 대한 직관은 남아있을 수 있다"라고 썼으며, 다른 곳에서는 혹시라도 누군가가 비록 신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에 대한 관조를 향유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고와 함께, 전승된 세계상은 철저히 의문시되었고, 신학과 철학의 설명과 고유한 지각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로 흔들리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현실의 개념은 또 하나의 다른 신의 형상을 결과로 가져왔다. 보편자(보편개념)가 인간 사유의 구성물 이상의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정했듯이, 그것을 넘어서 신에 대한 인식에 이르는 길은 없다. 그러므로 신의 현존은 이성으로는 증명될 수 없고, 다만 초자연적인 개시에 근거해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오캄은 신학과 철학의 결합을 깨뜨렸다.
그에게 신이란 자신이 지정한 보편적 원리에 따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질서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신이 아니고, 자신의 전능함 가운데서 마음대로 행하는 신이다. 이 신은 현재의 세계와 구원의 질서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세워 놓았다. 어떤 보편법칙에도 종속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다른 세계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다시 인간의 주관적 표상에 대한 사유와 스스로 존재하는 보편 원리들에 대한 거부가 작용한다. 오캄에게는 신에 대한 우리의 진술들은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신 자신 혹은 그의 존재는 인간에 의해 인식될 수도 증명될 수도 없다.
신에 대한 이러한 형상에서 이미 루터의 신 개념의 선구자를 볼 수 있는데, 루터도 스콜라 철학의 합리적 신 개념을 거부했던 것이다.
오캄을 정치이론에 뛰어들게 한 시발점은 프란체스코회의 급진파와 교황 요한 22세 사이에 벌어진 청빈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사유재산의 형태와 인간의 지배형식, 그리고 이에 따라 교회와 국가 간의 권력분배에 대한 고찰로까지 번졌다. 교회와 국가 양자는 신으로부터 유래하며 각기 고유의 영역을 갖는다.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합의에 근거하는 것이며, 교황이 부여한 것이 아니다. 이로써 오캄은 교회 권력의 영역을 제한시켰고, 영원한 신의 계획에 기초되어 있는 질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창조된 질서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이론의 기반을 다졌다. 여기서도 오캄의 학설은 벌써 중세를 지나 신과 세계가 항상 분리되어 고찰되는 근대를 분명히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오캄의 기여는 확실히 낡은 스콜라적 체계의 허약함과 근대의 요구에 대해서 그것의 불충분함을 인식케 한 것이었다. 그의 <<유명론>>과 먼저 구체적인 개별 사물을 연구해야 한다는 요구로서 그는 경험적 자연과학의 선두에 서게 된다. 그의 국가론은 교회와 국가의 새로운 관계를 향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신에 대한 학설은 새로운, 철학적 합리주의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신의 개념을 향한 길을 자유롭게 만들었는데, 물론 이는 철학과 신학의 결합을 깨뜨리는 희생을 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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