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이론가로서 발터 벤야민-franz72



21세기에 들어서도 발터 벤야민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클라우스 가르버에 의해 편집된 「글로벌 벤야민」(1999)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1992년에 벤야민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일의 오스나브뤽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원고들을 바탕으로 8년간의 편집 기간을 거쳐 3권의 책으로 출판된 이 책은 2,00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생전에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한 사상가가 현재는 얼마나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부르크하르트 린트너에 의해 편집된 「벤야민 사전」(2006)은 벤야민이 50년 정도의 비교적 짧은 수용기간에도 불구하고 괴테, 쉴러, 브레히트, 니체, 비트겐슈타인 등 현대 문화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대가들과 이미 동등한 반열에 올라섰음을 말해준다. 이제 벤야민은 학계를 넘어서서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벤야민에 대한 입문서가 2000년대에 들어서 노르베르트 볼츠와 빌렘 반 라이엔(2000), 스벤 크라머(2004), 우베 슈타이너(2004) 등에 의해서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특히 독일의 대표적인 벤야민 연구가 중 한 사람인 우베 슈타이너의 입문서는 그 동안 학계에 축적된 벤야민 연구의 성과를 충실하게 반영하면서도, 그 구성과 서술에 있어서 벤야민 입문서의 표준적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정밀한 문헌학적 연구를 통하여 벤야민의 “정치적인 것 das Politische"의 개념을 밝혀냄으로써,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초기 벤야민과 마르크수주의로의 전향 이후 유물론적인 후기 벤야민을 구분하는 통념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점은 중요한 업적으로 손꼽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세속적인 질서는 메시아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행복의 이념”을 추구하기 때문에 세속적이라 할 수 있다. 이때 행복을 추구하는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억압된 집단이기 때문에 초기 벤야민의 “행복의 이념”에는 이미 후기의 사유를 규정하고 있는 정치의 계기가 내포되어 있다.


벤야민에 대한 이와 같은 열광적인 반응은 최근 독일의 학계가 문화학과 매체학으로의 방향 전환을 시도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 지각의 역사성을 이론적 전제로 공유하고 있는 문화학과 매체학은 새로운 매체학의 담론 창시자 중 한 명으로 벤야민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1936)은 거의 모든 매체 관련 이론서들에 포함될 정도로 경전화 되어 있다. 매체이론가로서 벤야민의 새로운 면모를 조명하는 시도들 역시 꾸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하랄드 힐개르트너와 토마스 퀴퍼에 의해 편집된 린트너의 기념 논문집인 「미디어와 미학」(2003), 니콜라스 페테스에 의해 편집된 「문서고-인용-사후의 삶」(2005), 크리스티안 슐테에 의해 편집된 「발터 벤야민의 매체이론」(2005), 데트레프 쇠트커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코멘트」(2007) 등은 대표적인 사례들이라 할 수 있다.


사진이나 영화, 라디오 등의 기술적 매체의 발전으로 인한 지각방식의 변화에 대한 벤야민의 성찰은 그의 전작에 흩어져 있으며, 체계적인 매체이론을 남겨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를 매체이론가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페테스의 논문집은 바로 이와 같은 의문에서 출발하여, 벤야민의 이론 단편들, 짧은 기록문들, 가설들을 역사적, 전기적, 텍스트 내적 맥락 속에서 추적함으로써 벤야민의 매체이론의 특성을 밝히고자 한다. 벤야민의 매체 개념을 그의 전작을 통해 재구성하려는 이와 같은 시도는 이미 쇠트커의 선구적인 작업인 「발터 벤야민의 매체미학적 저술들」(2002)에 의해서 그 토대가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단편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벤야민의 매체 이론적 성찰들을 수집하고 여기에 체계를 부여함으로써 독자적인 매체이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책에 실린 쇠트커의 후기는 알레고리, 아우라, 인용, 이념, 운명 등 벤야민의 중요 모티브들을 추적하고 있는 「벤야민의 개념들 I, II」(2000)에 빠져 있는 그의 매체 개념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벤야민은 사진, 영화, 라디오 등의 기술적 장치들에 대하여 흔히 통용되고 있는 “매체”(Medium)라는 표현 대신 “기계 장치”(Apparatu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과는 다른 매체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그의 초기 언어논문인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1916)에서 “매체” 개념은 어떤 것을 전달하거나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 전달의 직접성”으로 파악된다. 벤야민은 지각이 근본적으로 자연적,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기계장치적 사실들이 하나의 “역사적 선험성”을 형성하고 있는 매체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며, 그런 점에서 매체성이 기계장치에 선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벤야민의 이러한 매체 개념은 오늘날 기술 중심주의적이고 도구주의적으로만 해석되고 있는 매체에 대한 접근방식을 상대화시켜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벤야민 뿐만 아니라 그의 동시대인들은 오늘날과 다른 매체에 대한 이해방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알버트 큄멜과 페트라 뢰플러에 의해 수집된 텍스트 모음인 「매체이론 1888-1933」(2002)에는 비록 벤야민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있지 않지만 벤야민 당대의 매체에 대한 이해를 살펴볼 수 있는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벤야민의 매체이론」과 「미디어와 미학」은 오늘날의 발전된 매체 환경적 관점에서 벤야민의 매체 이론을 관찰하고 있다. 전자는 매체 분석적 관점에서, 후자는 미학사적 관점에서 벤야민의 저술의 탈경전화와 재맥락화를 시도하고 있다. 두 논문 모음집에서는 주문형 비디오, 상호매체적 수행성, 음향 설치예술, 컴퓨터 문자 등 오늘날의 매체기술적 환경 속으로 벤야민을 논쟁적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알렉산더 클루게와 패트릭 로트 같은 현대 작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벤야민의 논의가 지닌 현재성과 역사적 한계를 진단한다.


쇠트커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코멘트」는 벤야민의 텍스트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 맥락과 수용의 역사, 텍스트에서 언급된 기술들, 인명들, 관련 저술들에 대한 상세한 색인 목록과 핵심개념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며 텍스트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그는 벤야민의 영화 이론을 현대의 새로운 지각 형식들에 대한 패러다임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벤야민은 기술적 매체의 역사적 발전으로 인한 지각 방식의 변화를 예술 개념의 변화를 설명하는 이론적 토대로 삼음으로써 18,9세기에 예술이론으로 축소된 미학 개념을 지각이론과 결합시킴으로써 미학의 역사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방식은 유물론적 미학 이론으로서 벤야민의 매체이론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면서도 예술작품 논문이 지닌 정치프로그램으로서의 성격을 희석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벤야민은 기계적 장치가 지각의 매체성에 침투할수록 아우라가 사라지고 있다는 테제를 제시한 뒤(3장), 사라지고 있는 아우라의 빈자리를 스타숭배나 파시즘의 영도자 숭배와 같은 가짜 아우라가 대신 차지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와 같은 가짜 아우라는 파괴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4장) 벤야민은 가짜 아우라에 대한 투쟁이 이미 앗제의 사진과 초현실주의자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이해한다. 거짓된 아우라를 파괴하려는 아방가르드적 충동은 거짓된 성스러움을 거부하고 현실에 메시아적 지평을 열어 놓기 위한 시도로서 벤야민의 핵심적 정치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아우라의 파괴는 변증법적으로 구제의 비유로 읽을 수 있으며, 예술작품 논문은 이와 같은 구원의 문제를 혁명의 문제로 대체하고 있다. 영화가 “예술의 전통적 개념들에 대한 혁명적 비판”을 시도한다는 점에 영화의 “혁명적 업적”이 있다는 벤야민의 주장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현재의 매체담론 내에서 경전의 위치에 오른 발터 벤야민의 예술작품 논문은 작성될 당시에 완전히 실패한 논문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랑스의 인민전선과 소련의 스탈린주의의 문화정치 프로그램에 대한 응답으로 작성된 이 텍스트에서 벤야민은 "현재의 생산조건 하에서 예술의 발전경향들"을 재정치화하려고 시도했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은 공산주의 진영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내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논문에 대한 본격적인 수용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63년에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1931), 「수집가이자 역사가로서 에두아르 푹스」(1937)와 같은 논물들이 함께 묶여 출간됨에 따라 벤야민의 매체이론이 논의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마샬 맥루한의 매체이론이 독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독일의 좌파지식인들은 맥루한의 기술주의적 매체론에 대한 대안으로 벤야민의 매체이론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대중매체에 대해 염세주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다른 비판이론가들과 달리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주면서도 정치적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고 있는 벤야민의 논의는 탈정치적인 맥루한의 입장을 상대화할 수 있는 미디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계몽의 변증법」의 "문화산업"장과 아도르노의 「재즈에 관하여」(1936)는 벤야민의 예술작품 논문에 대한 비판적 응답이다.) 하이센뷔텔의 "마샬 맥루한에 대한 논평들"(1968)은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이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 예술이 1970년대 독일에 소개되면서 벤야민의 테제는 더욱 유효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미지의 복제를 통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대중 스타의 우상적 가치를 파괴시키고 있는 워홀의 작품은 복제를 통해 원본의 권위를 박탈할 수 있다는 벤야민의 미학 이론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예술작품으로 해석되었다.


벤야민의 텍스트가 지닌 급진적 성격은 프랑스 이론가들에 의해 부각되었다. 데리다는 「벤야민의 한 초상」(1975)에서 예술작품 논문에서 벤야민은 데리다 이전에 이미 해체구성적 비판 모델을 제시한 사상가로 평가하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상징적 교환과 죽음」(1976)에서 벤야민이 최초로 재생산의 원리들을 발견해냈고, 재생산 기술이 생산 과정 자체를 흡수하고 생산물과 생산자의 관계를 역전시켰다는 사실을 인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더욱 급진화시켜서 물질적 생산과정 전체가 재생산의 영역, 즉 소비의 문제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모델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 벤야민의 한계가 있다고 보드리야르는 지적한다. 그는 벤야민의 텍스트에서 제시된 상호대립적인 개념쌍들인 아우라와 복제, 제의가치와 전시가치가 시뮬라시옹의 파생 실제적 환경 속에서 그 긴장감을 상실한 채 이미 사라져버렸다고 분석한다. 즉 현대의 매체적 환경 속에서 매체를 통한 실재의 복제를 통해 실재 자체는 사라져버리고, 매체 자체가 실재가 되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예술작품 논문은 이러한 수용과정을 거쳐 미디어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축적된 지금에서야 운명의 시간을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벤야민의 텍스트는 현재의 매체이론의 기틀을 마련한 출발점으로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가버린 것에서 혁명적 에너지를 발견해낼 수 있듯이 낡은 것처럼 보이는 벤야민의 테제들 속에 현재를 새롭게 조망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텍스트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술적 매체들이 지각, 예술,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는 벤야민의 통찰은 당대의 예술사가들과 미디어 이론가들의 통찰에 크게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과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에 의해 문자 중심의 전통 담론이 위기를 겪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1900년대 초반에 문학작가들에 의해 인식되었다. 호프만스탈의 「찬도스 경의 편지」(1902)나 릴케의 「말테의 수기」(1910)는 변화한 미디어 환경에 대한 섬세한 문학적 관찰을 통해 적절한 문학적 대응 프로그램을 모색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예술작품을 관찰할 때 사진 매체의 활용은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생각은 벤야민에 의해서 처음으로 포괄적으로 다루어졌지만, 이미 파노프스키의  「원본과 복제」(1930)에서 그 가능성이 제시된 것이다. 벤야민의 텍스트에서 직접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인물들인 푹스, 발레리, 헉슬리, 아른하임 그리고 비인 학파의 예술사가들인 리글과 비크호프 이외에, 발라즈의  「가시적 인간 또는 영화의 문화」(1924),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소송」(1932), 1926년부터 시작한 크라카우어의 영화평론과 1920-1931년 사이에 쓰여진 글들의 모음인 「대중의 장식」(1963) 등은 암묵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텍스트들이다. 또한 에이젠슈타인, 프도프킨, 베르토프 그리고 아이헨바움과 뜨이냐노프와 같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영화 이론가들과 벤야민의 영화이론과의 연관성은 많이 연구되고 있지는 않지만 반드시 심도있게 다루어져야 할 주제이다. 또한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기원」(1936)은 벤야민의 텍스트와 시간적으로 비교적 가깝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모두 예술작품의 신성함이 사라진 상태에서 예술작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비교되어야 할 텍스트들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벤야민은 매체이론적으로 답변하고자 한다면, 하이데거는 현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헤겔의 예술종말 테제와 연관이 있으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1914/15)은 헤겔의 문제제기를 시대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이를 최초로 역사철학적으로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반드시 이들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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