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세놓음

 

세놓음


바보들이나 비평의 쇠퇴를 애석해한다. 비평의 명맥이 끊어진 지 이미 오래인데도 말이다. 비평이란 정확하게 거리를 두는 문제이다. 비평이 본래 있어야 할 곳은 원근법적 조망과 전체적 조망이 중요한 중요한 세계, 특정한 관점을 취하는 것이 아직도 가능한 세계이다. 그런데 지금 온갖 사물들이 너무 긴박하게 인간 사회를 짓누르며 다가오고 있다. ‘편견 없는’,‘자유로운 시선’ 같은 것은-그저 전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라면-거짓말이 되었다. 오늘날 사물의 핵심에 가장 본질적으로 가 닿는 시선은 광고라고 불리는 상업적 시선이다. 광고는 자유롭게 관찰할 여지를 없애버리며, 영화의 스크린에서 차가 점점 더 거대해지면서 우리 쪽으로 흔들리며 질주해 오듯이 사물들을 바로 우리 눈앞에까지 들이민다. 마치 영화에서 가구와 건물 정면을 완전한 모습으로 비판적인 관찰에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만을 단지 집요하게, 그러다가 갑자기 센세이셔널하게 부각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짜 광고는 사물들을 뛰어난 영화에 상응하는 속도로 우리에게 퍼붓고 있다. 그와 함께 ‘사실에 충실함’이라는 태도[객관성]는 마침내 처리되며, ‘클로로돈트’와 ‘슬레이프니르’가 거인들이 쓰기에 딱 알맞은 크기로 건물들의 벽에 그려져 있는 거대한 그림들 앞에서 다시 기력을 회복한 감상성이 마치 이미 아무것에도 감동받지 않고 어떤 것에서도 감흥을 느끼지 않게 된 사람들이 영화관 안에서 다시 눈물을 흘리는 법을 배우듯이 미국식으로 해방된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사물들일 그런 식으로 다가오도록 하는 것, 사물과 적절하게 접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돈이다. 미술상에게서 돈을 받고 화랑에서 그림 가격을 조작하는 평론가는 화랑이 쇼윈도를 통해 그림을 바라보는 예술 애호가들보다 어느 그림이 뛰어난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주제의 따뜻함이 그에게 전달되어 다감한 기분이 들게 한다-과연 광고를 비평보다 뛰어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빙글빙글 도는 빨간 네온사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아니다-아스팔트 위에서 그것을 비추며 불처럼 빛나고 있는 물웅덩이가 그것이다.

일방통행로, 조형준 역, 13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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