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칭적 번역과 서사

그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고유명사로서의 개인으로서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적어도 텍스트 상에서.

어떤 번역에서든 텍스트 간의 충돌에서든 혹은 독서에서든 일관성(문법?)이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합리성의 요구가 아니다.

고전 혹은 작품의 권위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원저자가 중요하지 않은 텍스트 혹은 저자를 알 수 없는 텍스트 혹은 고유명사가 필요없는 텍스트에 대한 번역의 태도는?

번역과 메타언어, 인칭과 무인칭/비인칭, 글 속의 나와 글쓰는 나, 관계와 문법, 화폐와 기호, 양태와 시간.

육체의 번역활동

말과 사물, 말과 말, 말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동의어의 문제-은유와 환유. 연상관계와 결합관계.

문학의 출발은 번역이었다. 호메로스와 단테.

무인칭/비인칭의 번역과 서사

인칭과 비인칭/무인칭, 담론과 서사, 번역과 이론구성의 문제에 대하여.

데리다와 푸코, 문자와 문서(글쓰기와 쓰인 글), 해체와 권력.

고유명사로 말하기는 동시에 비인칭으로 말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텍스트 내에서 ~는 말했다 라는 식의 진술은 불가능하다. 즉, 인용은 '말했다'가 아니라 '썼다'로 접속되어야 한다. 가령 직접 들은 말이나 인터뷰의 기록은 예외일 수 있다.

진정 개인으로 말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다만 ~에게 기대어 말하기만이 가능하다. 인용과 문법의 문제.

아무리 어렵고 해독불가능해 보이는 텍스트일지라도 '어떤 규칙'을 지켜서 말하는데. 이 규칙을 문법이라 한다. 문법을 지키는 것은 타자와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듣는다는 뜻이다. 이 타자는 거의 언제나 불투명하다. 투명하고 구체적인 타자를 만나는 것은  글 쓰는 나, 즉 저자가 아니라 텍스트/작품 자체이다.

저자가 명시되지 않은 책, 고유명사 없는 책, 절대의 책-스테판 말라르메!!

고유명사의 힘! 텍스트 읽기를 저자와의 대화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나아가, 그 저자를 실체화하고 주체화며, 이로써 자기 자신을 주체로 상정한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에서는 한국어와 일본어에서보다 인칭의 적시가 본질적이다. 인칭 없이 말한다는 것, 그것은 앞의 세 언어가 극복할 수 없는 문제이다.

신의 언어는 전적으로 완전한 수동태로만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수동태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그것의 시제를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은 말했다, 라고 누군가가 쓴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시간을 초월하는 초월자/신의 위치로 상정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서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문서화가 권력을 공히 하는 하나의 전략이라고 한다면, 이 전략의 핵심축은 '고유명사'에 있다.

가령, 저자 표시를 하지 않은 텍스트/책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은 연대기나 출처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고대의 텍스트와 동일하지만, 그 내용이나 텍스트/책의 상태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러나 결코 저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이 텍스트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전개될까? 그것이 가령 하나의 논문이라면?

벤야민의 텍스트처럼 보이는, 하지만 확실히는 알 수 없는 텍스트가 존재한다면? 실제로 이런 일은 종종 발생한다.

핵심테제: 글쓰는 나와 글 속의 나를 구분할 것. 인칭과 비인칭/무인칭의 문제, 담론과 서사 그리고 번역, 이론의 문제. 은유와 환유, 연상관계와 결합관계, 시제와 시간의 문제. 고유명사의 문제.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번역의 필요성에 대해서 혹은 번역의 정확성에 대해서 전혀 판단할 수 없듯이, 문법을 벗어난 형태의 말하기/글쓰기, 듣기/읽기는 불가능하다.

벤야민의 번역이론, 앙트완 베르망의 낭만주의 번역이론 해석, 서사학과 기호학의 문제, 김태환 선생님의 이론, 사카이 나오키의 책, 해석학, 데리다와 푸코, 벤베니스트, 야콥슨의 저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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